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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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 유아 사건은 1933년 당시 조선의 치부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경성은 총독부가 자랑한 것처럼 '안전한 도시'가 아니었다. 미신과 무지는 조선 사회를 여전히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숱한 어린이가 굶어 죽거나 유기되고 있었다. 잃어버린 아이의 몸통을 찾는 과정에 경성의 후미진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체가 암매장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하층민이 사회의 그늘에서 웅크리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경찰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사건 해결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삽질'했는지 백일하에 드러났다.-47쪽

(백백교 사건) 종교는 합리성과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 맹목의 영역에 속한다. 백백교 사건은 전용해라는 사악한 교주가 저지른 예외적인 일탈 행동이 아니다. 1987년 '오대양 사건'처럼 종교를 빙자한 크고 작은 범죄행위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백백교와 같은 사교 집단은 기성종교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세의 부귀영화와 영생을 약속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현세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보다 더 값진 마음의 평화일 것이다. 종교를 통해 현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려 들면 언제든 사교 집단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백백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파고든 경우였다.

=> 1987년 '오대양사건' 뿐이가? 지금도 종종 드러나는 사교의 행적은 무얼 의미하는가?-134쪽

박희도는 1939년 1월 일문日文으로 된 친일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진정한 내선일체와 황도 선양'을 위해 헌신했다. 3.1운동으로 한 차례, 사회주의 운동으로 또 한 차례 옥고를 치렀던(뤘던?) 박희도는 광복 후 친일 혐의로 반민특위에 의해 다시 한 번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박희도를 3.1운동 33인 가운데 가장 추악하게 타락한 인물로 평가한다.-181쪽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숙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해할 따름이었다.

(최영숙의 일기에서-324쪽)
'어젯밤 침상에 누워 생각했다. 명년에 집에 가면 무엇을 먼저 할까. 부모님 노쇠하고 형제들 약소하니, 내 할 일 무엇보다 가정을 정돈할 것. 유일한 나의 오빠 완치될 그날까지 마음을 다 바쳐서 오빠 위해 희생할 것. 그 다음 민족 위해 일할 때에 공민학교 설립하고 노동계급 청년 남녀 몸과 정신 수양하여 삶의 길을 찾자.'-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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