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눈은 진실을 알고 있다(전 2권)

발행일 : 2006.07.08 / Books D1 면 기고자 : 김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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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지오 팔레띠 장편소설|이승수 옮김|한스미디어|각권 9000원

이탈리아 로마의 여형사 모린은 악당에 의해 애인을 잃고 자신의 눈마저 잃는다. 미국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로부터 각막을 이식 받은 모린은 그 후 범죄의 현장을 보는 신비한 능력을 갖게 된다. 눈은 연쇄살인범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 비밀을 풀어나간 모린은 악당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린다.

이 소설은 범죄 스릴러로서 통속적 재미에 충실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화두를 곳곳에 던진다. 삶의 의미는 각자의 실존적 행위에 있지 않고 타자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에게 기억되지 못한 자의 인생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거짓된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 금방 사라지고 마는 고상한 섬광들로 이루어진”(1권 18쪽) 허상이다.

작가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파(?派)의 액션 페인팅, 제리코(Gericault)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 같은 고급문화를 끌어온다. 그 위에 만화 피너츠의 캐릭터, 팝아트의 아이콘 같은 것들을 적적히 배치해 가며 중첩된 무늬의 추리소설을 완성했다. 작가는 TV 코미디언으로 시작해, 산레모 가요제(1994년)에서는 가수로 참가해 비평가상을 받았으며, 2002년 ‘나는 살인한다’를 발표하며 범죄추리소설에 뛰어든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소설에는 세 번의 살인사건이 등장한다. 첫 번째 희생자의 이름은 제리 코(Jerry Kho). 19세기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이름을 딴 그는, 뉴욕시장의 아들이자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예술로 이름을 떨친다. 소설의 도입부는 제리 코가 ‘정사(情事)로 그린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는 거리에서 만난 여자와 함께 온 몸에 물감을 바르고, 바닥에 펼쳐진 커다란 캔버스 위에서 뒹군다. 시간의 흐름 속에 표현된 몸의 움직임을 캔버스에 남기고, 여자의 몸과 캔버스 위에 정액을 흩뿌리는 것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캔버스가 없고 몸에 바른 물감이 없었다면, 행위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삶은 어디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제리 코는 마치 유언처럼, 자신의 삶을 캔버스에 펼친 뒤 피살된다. 범인은 제리 코의 손을 입 속에 쑤셔 넣고는 접착제로 고정시켜, 시신을 만화 피너츠의 캐릭터 ‘라이너스’의 모습으로 만들고는 사라진다.

두 번째 희생자는 그의 대학동창이자 철강 갑부의 딸인 샹델 스튜어트. 제리코의 그림 ‘메두사의 뗏목’ 습작이 걸린 벽 아래서 그녀 역시 피너츠의 캐릭터인 ‘루시’의 모습으로 죽어 있다. 죽음으로 노를 저어가는 ‘메두사의 뗏목’에 오른 마지막 탑승자는 먼저 희생된 두 사람의 친구인 소설가 엘리스테어 캠벨. 그는 연쇄살인범의 다음 표적이 자신임을 깨닫고 공포에 질린 끝에 스스로 심장이 멈춘다. 그들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줄리어스 황은 대학시절 피너츠 캐릭터 가면을 쓰고 이들 셋과 함께 은행강도 범행을 저질렀던 사실이 밝혀진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형사 모린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예지자(豫知者)들처럼 이들 네 명과 얽힌 범죄의 현장을 본다. 모린이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각막의 기증자가 제리 코였기 때문이다. 자막 없는 영상을 퍼즐처럼 꿰어 맞추며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거짓이며, 죽은 자의 각막으로 보는 환상이 오히려 진실할 수 있다”는 역설에 당혹해 한다. “어딘가에 또 다른 진실한 세계가 있으며, 그들 주변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것은, 때때로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을 제외하고 어느 것도 진실하지 않은, 단지 피상적인 현상에 불과할지도 몰랐다.”(2권 177쪽)

소설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롱한다. 보이는 것은 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김태훈기자 (블로그)scoop87.chosun.com)



 
기고자 : 김태훈 
본문자수 : 2004
기사유형 : 서평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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