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찾아서 창비시선 207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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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를 찾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한 현상이 단지 세태라고 할 수 없는 시대적, 문화적 환경이 있을 겁니다. 여하튼 시를 접하기에는 너무도 호흡이 빠른 시대입니다. 우리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어서 이렇듯 가쁘게 살아가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예전에 시로 읽던 시인들의 요즘 '시'(말로 짓는 절)은 어떨지 한번 베껴봅니다.

정희성.
[답청](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91), 그리고 최근 2001년에 그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를 냈습니다. 회갑이 가까운 시인으로서는 왠지 시집목록이 얄팍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더 속에 더 깊은 울림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시집을 읽다보면 이 시인이 시집을 십수권 상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우려가 들 정도의 새로운 감흥이 있습니다.

사족 없이 최근 시집에서 몇 편 퍼올려봅니다.
(다만 시인을 대신해서 추려보는 작업에서 글쓴이의 의도가 개입되겠지요^^)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을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동년일행>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1977년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부터 이 짓을 해왔으니 어언 30년 세월 동안 나는 '말 줄이기' 훈련을 해온 셈이다. 묵언으로써 말을 하는 경지를 넘본 것은 아니로되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피곤하다. 일상에서도 그러하고 시에서도 그러하다. 그렇게도 말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쩌자고 국어선생 노릇을 하고 시인이 되었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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