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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내 운명 - 번역이 좋아 번역가로 살아가는 6人6色
이종인 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번역은 내 운명(즐거운상상, 2006.3.3 )
1)
강주헌 – 1957년 서울생, 외대 불어과(석/박사), 프랑스 브장송대 수학(언어학 박사), 외대/건대 수학, 현재 전문번역가,
<문화란 무엇인가 1/2>,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내 인생을 바꾼 스무 살 여행> 등
번역은 쉬어야 한다! 내용은 어렵더라도 읽어 내려갈 수는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촘스키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책에 적용시킨다. 전문 용어는 최대한 살리더라도 누구나 읽어 낼 수 있게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약하면 어려운 책도 쉽게 번역하자는 것이다. 전공자들이야 원서를 읽으면 될 것이 아닌가. 책을 번역하는 목적, 더구나 출판의 목적은 ‘대중화’에 있으니까 말이다. 출판을 뜻하는 ‘publishing’의 어원이 ‘public’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17)
2001년 11월 강주헌 해외저작권을 중계하는 에이전시 설립
코엘료의 <연금술사>가 미국에서는 10년 전, 1995년에 첫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34)
번역 강좌라면 번역을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고, 다리 역할은 부수적인 차원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에 있던 번역가 친구가 한겨레문화센터 편을 드는 것이 아닌가!
“기존 번역 학원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초보 번역가들을 등쳐먹는다고 욕했잖아.”
에잇, 친구가 배신하다니! 결국 한겨레 문화센터에 번역 강좌가 개설되었다.(37)
2)
권남희 - 1966년생, 중앙대 일어과,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사임당아씨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 유머작가, <창이 있는 서점에서> <러브레터> <질투의 향기> <토토의 새로운 세상>..
그런데 그 후로 난 참치를 먹지 않는다. 왠지 참치를 먹으면 그때가 생각나서 눈물난다. 배터지게 잘 먹고 이런 말 해서 참치업계 종사자들에게 몹시 미안하지만, 눈물 젖은 참치를 먹어보지 않은 자는 돌을 던지지 말라고.(65)
번역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까페(68)
아마존 재팬 같은 일본 사이트를 찾아,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좋은 책들을 골라 보라. 검토서를 작성해서, 출판사에 보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71)
일이 없는 동안에는 차라리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책을 읽어 국어실력을 키워라. 번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음 번역은 매끄러워져 있을 것이다.(72)
3)
김춘미 – 이대 영문과, 외대 일본어과(석사), 고대 국문과(박사). 고대 일문과 교수. 한국 일본학회 회장
<해변의 카프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밤의 원숭이>(이상 무라카미 하루키),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등
우선 번역이 원문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번역이 원문의 분위기, 정서를 잘 전달하고 있을 것. 원작의 리듬, 호흡, 문체적 특징 등은 작가의 문학 세계의 내실이므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리듬을 중시하는 편이다. 그래서 원작가의 호흡과 문체의 리듬을 가장 중요시한다. 세 번째로 번역된 텍스트가 그 나라의 문학 작품으로도 매력적인 읽을거리가 되어야 한다. 먼저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며 동시에 번역된 언어로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위의 기준으로 심사한 결과, 황석영 선생의 <오래된 정원>을 번역한 아오야키 유코 씨에게 대상이 돌아갔다.(104)
번역이란 뭔가를 진지하게 배우려는 작업이라고 한 하루키의 얘기에서 번역이 새로운 문체의 획득, 다시 말해 새로운 자아(주체)의 획득에 모종의 역할을 했을 거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소설가가 번역을 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나름의 문체 창출을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문학 형성기부터 작가란 자기만의 문체를 확립하기 위해 고심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119)
4)
송병선 – 외대 스페인어과 졸업, 콜럼비아 하베리아나 대학(박사), 울산대 스페인 중남미학과 교수, <거미여인의 키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등
번역은 단지 복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문화적으로 확장하면, 문화의 지배국인 유럽과 미국은 위대한 독창성의 출발점이지만, 그들의 것을 수용하는 국가들은 ‘번역’이며 ‘복사’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피지배 국가들은 메트로폴리스의 텍스트들을 마구 먹어치워 주인의 복제품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직역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역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한쪽 발을 직역에, 다른 한쪽 발을 의역에 놓고 작업하는 번역가이다. 이 말은 외국 작품을 우리에게 맞게 완전히 동화시키는 작업보다는, 문화적 차이를 보존하면서 외국적인 요소들에 어느 정도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이다.
…(중략)..
다시 <돈키호테>로 돌아가자. 이 작품의 신부는 원본을 우선시하는 죄를 범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그것을 해체한다. 우리는 이 작품의 저자가 믿을 수 없는 무어인인 시데 아메테 베넨헬리인지, 아니면 세르반테스인지, 그것도 아니면 익명의 번역가인지 알지 못한다.(135)
내가 옮긴 작품들도 나의 관점을 보여주는 재창조물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나의 머리와 경험에서 나온 산물, 그러니까 내가 전적으로 친권을 가진 친자식들은 아니지만, 고통 끝에 탄생시킨 나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소중하게 여긴다. ‘눈에 보이는’ 번역과 내 관점에 의한 번역을 통해 나는 내가 소개하고 번역하는 작품이 단순히 ‘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에 반항한다. 이런 번역은 불가피하게 반역을 통한 또 다른 산물을 창조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반역자이자 창조자인 말린체이다.(135~136)
우리나라에 <독서의 역사>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 출신의 번역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렇게 번역가를 찬양한다. “번역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세밀한 독서방법이다.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우리는 해석한다. 번역가는 원문에 담긴 모든 불완전함을 보고, 모든 논리의 부족과 실수, 그리고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대목들을 본다. 번역가의 눈은 무자비하고 타협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을 번역가보다 더 자세하게 읽는 독자는 없다는 망구엘의 지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138)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 문학을 이끌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현대문학은 단순히 제3세계 문학이라는 ‘주변문학’으로만 간주되던 실정이었다.(141)
나는 내 수정본이 결정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본이란 ‘화석’과 같은 죽은 존재라고 여긴다. 번역에서 결정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번역은 영원히 살아 있다. 번역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가능한 한 여러 번 번역되어야 한다. 번역은 변화이며 움직임이다. 더 이상 가야할 장소 없이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을 때 문학은 죽어버리기 때문이다.(148)
내가 보기에는 더욱 급한 일이 지금 살아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번역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40여 권의 책을 번역했지만, 내가 번역한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은 없다. 단지 4만 부에서 5만 부 정도가 팔린 준 베스트셀러가 몇 권 있을 뿐이다. 나는 대부분 인세로 계약하기 때문에 번역서를 출판할 때마다 베스트셀러를 꿈꾼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이것은 정말로 ‘꿈’이엇다. 그 꿈이 망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꿈을 꾸며 행복해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행복한 번역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번역을 통해 많은 출판계 사람들을 알계 되었고, 어떤 경우는 흉허물 없는 우정까지 나누기 때문이다. 번역이란 세계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은 내 고통과 노력의 산물인 번역물만큼 소중하니까.(159)
5)
이종인 - 1954년생, 고대 영문과, 브리태니커 편집국장, 성대 전문번역가 겸임교수,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만약에> <고대 그리스의 역사> <성의 페르소나> <영어의 탄생> 등
인세는 책이 많이 팔릴수록 번역가에게 유리하고, 척박한 출판 환경에서 문화사업의 보람으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출판 경영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방식이다.(170)
(출판사) 대부분 책이 출판된 그 다음달에 (인세를) 주는 게 표준 절차인 듯하다. 문제는 그 책이 언제 나오는가이다.(172)
만약 어떤 책이 확실히 출판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안다면, 나는 아무리 번역료를 많이 주어도 계약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173)
에세이난 소설 같은 타이틀은 공경희씨가, 추리 설이나 애정 소설은 선배 번역가 이창식 씨가 많이 담당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럼 나는 어느 장르인가? 나의 고민은 특정한 장르 없이 ‘텍스트가 어려운 것일수록 이 아무개에게’라는 동의할 수 없는 낭설이 출판계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176)
<리더쉽 리터러시>(세종서적, 1999년)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인 스토리를 24회나 되풀이해야 하는 것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텍스트가 따분하다고 생각할 경우 과연 잘 된 번역이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책을 만났을 때 번역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180)
번역타이틀을 앞에 놓은 번역가의 심리는 텅빈 스크린, 맑은 연못, 비어 있는 계곡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193)
딱ㄸ가한 문장을 그녀가 부드럽게 고쳐놓은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바르고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하여 무명을 비단으로 만들어 놓은 그녀의 솜씨 때문에 번역을 할 때마다 미성 씨의 쉬운 문장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195)
장인의 명성은 그가 만들어내는 물건에 달린 것이지, 그의 이력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항상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치열한 정신으로 매달려야 한다.(197)
그런데 이(..) 글의 아름다움이 번역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이 글은 황신혜라는 여배우의 외모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번역하고 잇다. 즉 황신혜에 대하여 저자 특유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 모든 번역은 텍스트에 대하 논평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 논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200)
이렇게 볼 때 번역이 원작보다 못하다는 얘기는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원작이라는 것도 이미 리얼리티(실제 : 보다 구체적으로 위에서 예를 든 황신혜나 경정산)로부터 한 단계 떨어져 있으므로, 원작과 번역이 서로 리얼리티를 다투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바로 이런 근거에서 번역은 제2의 창작 혹은 아름다움의 창조가 되는 것이다.(205)
잘 된 번역서에는 우리말 특유의 아름다움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번역과정에서 외국어(원서의 언어)와의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우리말의 결정체인 번역서, 거기에는 황신혜 못지 않은 한국어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있다.(206)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라는 장편 소설의 맨 처음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사유로 불행하다.” 나는 톨스토이의 행복한 가정이 2인3각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12)
6)
최정수 : 70년생, 연대 불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연금술사> <오, 자히르> <숨쉬어> <꼬마 니콜라의 쉬는 시간> <빈센트와 반 고흐> 등
번역가는 해당 국가에서 그 책의 최초의 독자이다. 그 책을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정확하고 성실하게 소개하는 것, 그것은 번역가의 영광이지만, 앞으로 그 책을 읽게 될 이름 모를 수많은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할 일이다.(229)
사실, 파울로 코엘료는 엄청한 대중적 인기에 비해 평단으로부터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잘 차려내지만, 문체나 문학성,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빈약하다는, 이른바 ‘깊이는 없고, 글 솜씨만 좋은 마케팅의 귀재’라는 것이 대다수 평론가들의 입장이었다.(235)
하지만 이 일은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그리고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아주 크고 다채로운 세계이다. 내 세계의 지평을 조금 넓혀보고 싶은 사람, 또 하나의 세계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해 봐도 좋은 일 아닐까?(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