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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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는 부드러운 면포를 잘라서 기저귀를 만들어왔다. 아내는 기저귀마다 빨래집게를 물렸다. 빨랬줄에서 기저귀들이 바람에 길게 나부꼈고, 가을빛이 기저귀 위에서 출렁거렸다. 바람은 북동풍이어서 기저귀들은 섬의 남쪽 바다를 향해 펄럭거렸다. 손바닥만한 아기 바지도 한 뻠 가랑이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항로표지>)-117쪽

당시의 평균 자연수명이 몇살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삼십여 년쯤 살다 죽은 여자의 뼈가 젊은 뼈인지 늙은 뼈인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섭양이 부족한 생애에서 강도 높은 노동에 종사했다'는 설명도 그 뼈 토막을 들여다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뼈는 기원화의 생애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전하지 못했다. 박물관 유리상자 속에서 깔때기를 활짝 벌린 그 골반뼈는 다만 푸르스름한 석회질의 결일 뿐이었다. 대학신문은 박물관장의 기고문에 깔때기 모양의 골반뼈 사진을 곁들였고 그 위에 '기원화, 본교 박물관에 피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렇게 해서, 골반뼈로 남은 AD6세기 여자의 이름은 기원화가 되었다. 진부한 이름이었다.(<뼈>)-163쪽

- 가족들 이외에는 암을 알리지 마십시오. 암환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면 신변을 정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워낙 많은 환자들을 봐서 하는 말입니다.
의사가 메모지를 꺼내서 주의사항을 적어주었다. 술 담배 섹스를 끊고 잠을 많이 잘 것,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산책을 할 것, 청국장을 많이 먹을 것, 고등어 꽁치 방어 같은 등 푸른 새애선을 많이 먹을 것... 나는 여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자궁유방검진실 앞 복도를 지나서 병원을 나왔다.(<강산무진>)-318쪽

남은 담배 몇 개비가 지나간 모든 담배를 환기시키기도 하는 것인지, 간암 판정을 받고 돌아와서 생애의 마지막 담배를 피울 때 어째서 오십 년 전 유년의 길바닥에 나뒹굴던 담뱃갑 색깔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강산무진>)-320쪽

산소에서 돌아온 날 저녁에 아들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의 요점은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주식과 아파트를 처분한 돈을 모두 가지고 LA로 와서 미국의 요양시설에 입원하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직계가족을 초청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미국의 요양시설은 정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환경도 좋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보다 비용도 싸다고 아들은 셜명했다. 또 하루 오십 달러 정도면 한국인 간병부를 고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류를 갖추어 초청수속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내가 빨리 결정해줄 것을 아들은 요구하고 있었다.(<강산무진>)-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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