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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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등단이 늦었던 작가, 그러나 그 '나이듬'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외려 마당에 놓인 절구에 빗물이 고이듯 그 늦음은 아무렇지도 않듯이 깊이있는 작품활동을 일생동안 계속해오신 박선생.

작품 중에 보이는 컷 하나. 너무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치 생을 건너듯 보이는 모습. 그 발걸음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음력 설까지 쇠었으니 이제 확실하게 한 살을 더 먹었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니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한다. 재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내가 쓰고 살던 집과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하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 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잃어버린 여행가방, 63)

 

그래도 잘 살아냈다....

 

얼마전 쉰 살이 넘은 따님이 산문집을 냈다는 소식이 있다. 박선생의 삶은 내 기억 속엔, 고등학교때 읽었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당시 정우사)에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지혜가 줄곧 유지되고 있다.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으나... 이 세상을 위해 그간 채워왔던 지혜를 더 나누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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