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구판절판


대통령 퇴임 후 딱 세 번 인터뷰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모교 후배들의 인터뷰였던 것도 그런 이유('동문들은 나를 사랑해 주었고, 나도 모교를 사랑했으며 기회가 생기면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다')에서였다. 2008년 11월 봉화 집 회의실에서, 지금은 이름이 개성고등학교로 바뀐 모교 학생기자들과 했던 인터뷰는 교지 <백양> 제62호에 실렸다.-53쪽

1982년 5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변호인단에 들어갔다. 부산의 몇몇 대학생들이 1980년 광주 학살을 용인한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할 목적으로 문화원에 불을 질렀는데, 뜻하지 않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었다. 문부식, 김현장 씨에 이어 가톨릭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그들을 도와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돈명, 유현석, 홍성우, 황인철 등 서울의 유명한 인권변호사들이 모두 부산으로 왔다. 신부와 수녀, 가톨릭 신도들이 법원 마등을 빽빽이 채우고 찬송과 기도를 했다. 나는 아주 작은 역할밖에 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서울과 다른 지역의 인권변호사들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조영래 변호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법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정법회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모태가 되었다.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변론을 맡았다는 이유로 1년 반 동안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생활법률상담을 그만두어야 했다.-81쪽

1987년 6월 18일, 부산 지역 시위가 절정을 이루었던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 국민운동본부가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했던 이날, 성난 부산 시민들이 서면로터리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범내골까지 진출했다. 드넓은 도로를 꽉 메운 수십만 시민들의 행진은 해운대의 거센 파도 같았다. 운동노선을 두고 다투었던 모든 정파들이 그 물결에 녹아들었다. 나도 거기 있었다. 이날 밤 부산 시위는 그 규모와 격렬함에서 서울 시위를 능가했다. 최루탄이 다 떨어져 경찰이 더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다. AFKN에서 주한미군과 군속의 외출을 금지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밤에 군 병력이 투입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했다. <어머니>라는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걸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들과 함께 이 거대한 민심의 폭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자부심에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부산에는 지금도 이날의 시위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시민이 많다-91쪽

1980년대의 수많은 민중가요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노래가 특히 좋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이 노래 첫 구절 '사람 사는 세상'을 꿈으로 삼았으며 1988년 13대 총선 선거구호로 썼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때도 종종 이 노래를 불렀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아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92쪽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문송면 군의 죽음과 '원진레이온 사건'이다. 1988년 여름 서울 양평동 온도계 제조공장에서 일하던 문송면 군이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수은중독에 걸렸다. 중독 판정을 받고 석 달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겨우 열 다섯이었다. 같은 시기에 원진레이온 사건이 일어났다. 원진레이온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던 회사로, 일본에서 중고 기계를 들여와 비스코스 인견사를 생산했다. 그런데 제조 공정에서 나오는 이황화수소가 문제였다. 환기 시설이 없는 작업장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이 신체가 마비되는 병에 걸렸다. 피해자 가족들이 협의회를 만들어 피해배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단체들이 그들을 도왔다. 88서울올림픽을 코앞에 둔 시기였지만, 우리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산업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102쪽

우리는 회사(원진레이온)를 추궁해 직업병임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합의서를 받아 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거기서 휠체어에 앉은 사지마비 환자를 만났다. 어린 딸이 곁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안면 근육이 전부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중략).. "우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그 아버지의 일그러지고 굳어 버린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주즈륵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중략).. (1988년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야!"-103쪽

그런데 이 두 차례 재선거(1989년 4월 동해 국회의원 재선거, 8월 영등포구 을구 재선거)에서 이회창 대법관이 큰 인기를 얻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었던 그는 동해시 재선거 때 민정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과 야 3당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총재에게 불법선거운동 자제 요청 서한을 보냈다. 영등포구 을 재선거 때는 후보 전원을 불법선거운동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불법타락선거에 진저리가 난 국민들이 이렇게 단호한 조처를 한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회창 씨가 국무총리를 거쳐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이른바 '차떼기 불법선거자금'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113쪽

부산 사람들은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마치 자식 입학시험 응원하듯 김영삼 민자당 총재를 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라이벌 김대중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 대변인이 뛰어들었으니 선거가 잘될 리 없었다.
4년 전(1988년)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했던 허삼수 후보가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김영삼 총재님을 모시고 부산 발전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겠다"고 했다. 4년 전 그를 '반란군 총잡이'로 규정하고 "국회가 아니고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던 민자당 김영삼 총재는 지원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 씨는 충직한 군인입니다. 뽑아 주시면 중히 쓰겠습니다. 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려면 허삼수 씨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주십시오."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 나에게는 김영삼 총재를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다.-123쪽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김영삼 총재가 감행한 (1990년) 3당합당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내 또래 부산 친구들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였다. 민주화 투쟁의 영웅이었으며 정치적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3당합당 이전까지 이룩한 업적만 보면 김대중 대통령과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가 독재정권의 핍박을 덜 받은 것은 공산주의자나 용공분자라고 뒤집어씌울 수 없을 만큼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125쪽

선거에서 졌다. 1992년 14대 총선에 이어 두번째 낙선이었다. 문정수 후보가 51%, 내가 37%였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지역등권론을 반대했다. 선거전을 치르는 중이라 자세한 내용을 몰랐지만 아무튼 지역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다. 일단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선거에 지고 서울에 올라오니 당에서 내가 지역등권론에 반대한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화백이 그렸던 만평이 기억난다. 서울에서 김대중 이사장이 지원사격을 하면서 "지원사격 받았나?" 하고 묻는다.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이 대답한다. "내가 맞았다. 오버!"-136쪽

김대중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38만여 표 차 박빙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정치에 입문해서 10년 동안 겪었던 고생과 방황과 좌절을 다 보상받은 것 같았다.-146쪽

광주 염주종합체육관에서 실시한 경선에는 선거인단 1,572명이 참가했다. 투표율이 무려 81%였다. 광주 전남의 대표 정치인이던 한화갑 후보를 3위로 밀어내고 득표율 37.9%, 595표를 얻어 1등을 했다. 2위인 이인제 후보보다 104표를 더 받았다. 부산 출신 원외 정치인 노무현이 민주 진영의 심장 광주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압승을 거둔 것이다. 스탠드에서 가슴을 졸였던 지지자들이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민주당 국민경선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이인제 대세론'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만든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기회주의자를 용납하기는 하지만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184쪽

기나긴 논란 끝에 미국 방문 문제를 정리했다. "갈 일이 있으면 간다. 일이 없어도 한가하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바쁜데 일도 없으면서 사진 찍으러 가지는 않겠다." 갈 일도 없고 바쁘기도 해서 결국 미국을 가지 않은 채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미국 앞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일수록 더 그랬다. 어떤 불이익이 잇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가 미국에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것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근거 없는 불안감.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것에 휘둘려 일도 없이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는 것은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방문은 대통령 선거 후로 미루었다.-187쪽

(대통령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2002년 12월 18일을 지난 12월 19일) 새벽 5시 30분 민주당 기자실에서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기자회견문을 읽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인지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을 다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다가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는 제목으로 1면을 시커멓게 깔아 놓은 <조선일보>를 보았다. 내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런데 그 시각 수많은 지지자들이 동네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남의 집 현관에 놓인 <조선일보>를 몰래 치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몰랐다.-201쪽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출구조사 이야기를 들으니 오전 투표에 졌지만 오후 3시 이후에 역전시켰다고 했다. 오전에는 명륜동 우리 집 골목이 텅 비어 있었다. 기자들과 방송차는 모두 가회동 이회창 후보 집 골목에 가 있었다. 오후가 되자 방송차들이 모두 우리 집 골목으로 옮겨 왔다. 온종일 집에 있었던 아내는 창문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면서 우리가 이겼음을 알았다고 했다. 그날 오후 젊은이들이 서로 투표를 독려하느라 휴대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 발송 건수가 폭증했다고 들었다. 그들이 기적을 만들었다. 기적 같은 승리였기에 감격도 그만큼 컸다. 그것은 결코 당연한 승리가 아니었다. 일회적인 승리, 의외의 승리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도 나의 당선도, 모두 이례적이고 특수한 조건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건이었다.(15대 38만여 표차, 16대 50만여 표차)-202쪽

시장 분배가 지나치게 불균등하면 국가 정책을 통해 이것을 교정해야 한다. 조세와 복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것도 노력한 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내 잘못이 크다. 취임하자마자 국회 과반수를 가진 한나라당이 법인세 감세안을 통과시켰다. 합리적인 정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경제성장을 위해서 감세가 필요하다는 보수 담론에 속절없이 밀렸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처음부터 국회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이 빚어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시민단체들에게 호된 비판과 원망을 들었다. 법인세 인하는 대기업의 당기순이익을 키워 주었지만 설비 투자와 고용 확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국가 재정을 떼어 내 부자들에게 나누어 준 셈이다. 결국 종부세를 신설해 부동산 보유세를 올린 것 말고는 조세 정의를 실현하는 정책을 제대로 펴 보지 못했다.-216쪽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은 야당도 거부하지 않았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라는 암초를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 헌법재판소는 <경국대전> 이래의 관습을 이유로 들어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서울이 아닌 곳에 행정수도를 만드는 것은 위헌이라고 했다. 청와대와 국방부를 비롯해 행정 기능의 일부를 서울에 남기고 나머지를 연기군 일대로 옮겨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드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은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다. 보수 세력은 또 다시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가 이번에는 위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도시 이름을 세종시로 지었다. 나는 세종시를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축소 모형을 만들어 가까이 두고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재임중에는 기공식밖에 하지 못했지만 완공되면 자주 가 볼 생각이었다.-229쪽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났던 문재인 변호사가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심리에 대처했다. 국회의원 선거는 탄핵 이후 지지율이 급상승한 열린우리당이 이길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동영 의장의 소위 '노인 발언' 이후 영남의 우세 지역이 거의 다 뒤집어졌고, 수도권도 한나라당의 중진 현역 의원 지역구에서 열린우리당 신인들이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다행히 과반수는 몰라도 제1당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4월 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에 턱걸이한 152석을 얻었다.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위법 행위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대통령 탄핵을 정당화할만큼 중대한 범법 행위는 없다는 논리였다.-241쪽

내가 대통령으로 있던 대한민국은 '굴욕 외교'를 하는 나라가 아니었다.-259쪽

겨울 무논에는 떨어진 볍씨도 있지만 풀씨도 많다. 이런 것들은 물에 뜨면 새들에게 좋은 먹이가 된다. 가을걷이 끝난 논에 '올미'라는 길쭉한 다년생 풀의 알뿌리가 있는데 청둥오리와 큰기러기가 이것을 아주 좋아한다. 겨울철새들이 무논 상태에서 잡초의 씨앗과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물이 잇으면 풀이 자란다. 먹을 것을 찾아 새들이 부지런히 자맥질한다. 새들이 똥을 싸면 천연비료가 된다. 자연의 순환이 힘을 쓰면 화학비료를 쓰지 않아도 된다. 논습지는 평생을 두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였다.-315쪽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검찰,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라고 조롱했다. 노무현의 인생만이 아니라 부림사건 변론을 맡았던 이래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모욕하고 저주했다.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 그리고 대통령직 5년을 포함한 정치 20년, 그 모든 것에 침을 뱉었다. 재판이 다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로 만들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나를 도와주고 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했던 분들을 향해 말했다. 노무현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는 아니라고-330쪽

봉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해가 떠오르는 남동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출 시간이 지났지만 두터운 구름과 자욱한 아침안개 때문에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태양이 솟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다리를 곧게 펴고 섰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마을의 정겨운 산과 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평화로웠다.-335쪽

(에필로그) 2009년 5월 23일 아침 우리가 본 것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가 아니라 '꿈 많았던 청년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987년 6월항쟁은 우리 민주주의의 청춘이었다. 양김 분열과 3당합당,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거치며 모두가 중년으로 늙어 가는 동안, 그는 홀로 그 뜨거웠던 6월의 기억과 사람 사는 세상의 꿈을 가슴에 품고 씩씩하게 살았다. 잃어버린 청춘의 꿈과 기억을 시민들의 마음속에 되살려 냈기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대통령을 마친 후에도 그는, 꿈을 안고 사는 청년이었다.-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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