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단순한 한 건의 파병이 한국 자본주의를 제국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절차적으로 이 사건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미 내부적으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 한국 경제가 절실히 해외 시장과 해외 자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의미이다. 두번째 의미는, 조금 더 우울한데, ㅎ나국이 전쟁에 참가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과거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대단히 민주적이며 절차적으로 하자 없이, 그야말로 '국민들이 원해서' - 그것도 '경제적인 이유'로 원하기 때문에 - 행해진다는 점이다.-71쪽
유럽 역사에서 최빈국의 예를 들 때 언제나 등장하는 나라가 스위스였는데, 이 특별한 나라를 특징짓는 상징이 '용병'이다. 지금도 바티칸의 용병은 '스위스 용병'인데, 그들이 18세기 후반까지 계속해서 용병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같은 넓은 옥토를 가진 것도 아니고, 국토의 70% 가까이가 알프스 산악지대인데다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간도 1년 중 6개월밖에 안 되는 곳이 가난할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런 공간에서 산업혁명 같은 것이 일어날 리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가혹하게 수탈을 당하던 이 지역에서 아버지들이 용병으로 나가 부쳐준 돈으로 가족들이 근근이 먹고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41쪽
이 가난은 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되었는데, <사운드 오브 뮤직>을 비롯해서 많은 영화와 소설은 나치의 핍박을 피해 유대인과 사상범 들이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로 안전하게 탈출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스위스는 당시 식량이 없었기 때문에 난민들의 입국을 가혹할 정도로 제한 했었다.-계속쪽
스위스와 스웨덴 혹은 덴마크와 같이 작지만 튼튼한 국가경제 모델들은 언제나 분석가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최근 이런 나라들이 예전에 비해 경제가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지만,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자마자 바로 1000만 원대 대학등록금 시대를 열어젖힌 한국에서 국민소득 4만 달러임에도 50만 원도 안 되는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니는 나라의 얘기는 마치 신기루 같다. 그걸 프랑스는 '68혁명'으로 아주 어렵게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격렬한 사회적 갈등을 겪지 않은 스위스나 스웨덴 혹은 노르웨이, 아니면 한국보다 소득 수준은 낮아도 사실상 무상교육을 구현한 핀란드와 같은 나라의 이야기가 어찌 황홀하지 않겠는가.-144쪽
지난 50년간 한국에서 석유 소비가 줄어들었던 해는 딱 한 해, 바로 1998년 IMF 경제위기 때이다. 그리고 3년 후, 경제가 다시 회복되면서 2001년에 최초의 경차였던 티코가 단종되었고, 2002년에 아토스가 단종되었다. 일본은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지나면서 800cc 경차가 국민차가 되었고, 4만 달러를 바라보는 유럽 국가들은 최근 600cc 도시용 승용차 개발에 국민경제의 승부를 걸려고 하는 중이다. 반면 한국은 2만 달러를 막 넘은 시점에서 십대들의 승용차 구매 90%가 200cc급 이상이다. 미국을 제외하면 승용차 크기가 두번째로 큰 나라 한국, 승용차 평균 크기가 2000cc인 위대하고 훌륭하신 나라! 이대로 1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망한다!-203쪽
순수한 기업과 산업의 논리만으로 볼 때 전쟁은 '자국 영토 내에서 벌어지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떼돈 버는 장사라고 많은 기업인들은 생각한다. 허술하게 대충대충 만들어도 꼬박꼬박 대금을 지급하는 바보 같은 소비자는 국방소비자인 정부밖에 없는데, 이를 교과서에서는 '모놉소니monopsony', 즉 '수요독점'으 폐해라고 부른다.-208쪽
(check)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소크라테스 1'과 '소크라테스 2'로 전환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에라스무스'로 통합된 유럽 대학생 교환 프로그램.-244쪽
(나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가지 모델이다. 프랑스의 68혁명처럼 결국 중,고등학생들이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나면서 바뀌든지, 아니면 스위스나 스웨덴처럼 어른들이 알아서 바꾸어주든지, 좌파든 우파든, 십대들에 대한 문화적 해방과 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그들을 육체적으로 더 버틸 수 없는 이 가혹한 공간에서 최소한 숨이라도 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21세기 한국은 십대들의 물리적 반란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이를 마련하지 못하면, 언젠가 지금의 십대들에 의해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극우파든, 길거리에 끌려나와 사죄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국의 교육 파시즘, 너무 끝까지 왔고, 갈 데까지 가버렸다.-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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