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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보자기를 든 할머니. 오래된 장옥만큼이나 정겨운 장날의 모
습을 곳곳에서 만난다. |
ⓒ 김창헌 기자 |
“아이고 환장허겄네.”
좌판도 제대로 못 차렸는데 손님들이 몰렸다.
“언능 기(게) 폴아. 폴 거여, 말 거여.” “조구(조기) 내노라는 소리가 십년은 됐겄네.” 손님들 성화가 이만저만 아니다.
혜성상회 최복순(63) 할머니는 물건을 떼러 여수까지 갔다오느라 ‘좀’ 늦었다. 그 ‘좀’에 이 사태가 났다.
단골이 많은 가게다. 곡성장에서 40년 넘게 장사를 해왔다. 아버지 때부터 꾸려 온 생선가게. 명태국 좋아하는 집인지, 갈치조림 잘 해먹는 집인지 다 안다. 뉘 집 며느리 버르장머리, 뉘 집 시엄씨 성깔까지 다 안다.
손님들이 다 이무럽다. 조기 한 궤짝 바닥에 내팽개치고 “주슴서(주우면서) 골라. 고를 것도 없이 존(좋은) 조구여.”
12년 단골이라는 한 아주머니는 미더덕 수리미(오징어) 정리를 돕는다. 아예 장사를 한다. “기가 맥힌 깔치(갈치), 검정것으로 사야제. 더 비싸도 더 맛나. 딴 것 안 가져가. 지져야지 꾸믄(구으면) 아까운 깔치여.” 검정것이란 ‘먹갈치’. “여기는 수입것이다 국산이다 다 말하고 팔아. 믿고 사. 내가 생선장수 다 됐네.”
70여 채의 오래된 슬레이트 장옥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곡성장(3·8일). 그 너머 하천부지에도 장이 성성하다.
“여가 질(제일)로 복잡한 디여. 댕길라믄 옹삭스라.” 사람들 밀려 ‘갑시다!’ 소리치는 곳이 있다. 무쇠솥에 설설 끓는 국밥이 이름나 밥때가 되면 사람들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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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것을 너믄 돼지고기가 소고기로 변해 불어.” 능이. 추어탕 오리탕에도 이것이 들어가야
개운한 맛이 난다. 잰피. 다 늙은 오이, 삐뚤어진 호박도 알아보는 눈길이 있다. “남원에서는 요
것 나왔다고 좋아라 한디, 곡성은 잘 모르고만.” 양하. |
ⓒ 김창헌 기자 |
“내야 내놓으믄 지비는 한나도 못 폴았네. 운 좋구만”
곡성장 재미는 채소전이다. 신문지나 비료포대나 책보 따위 깔아놓고 다 늙은 오이 세 개, 삐뚤어진 호박, 대접으로 파는 청량고추 같은 것을 늘어놓은 좌판들.
“내가 장사가니. 요것 해 갖고 전기세나 내제” 하는 할머니들의 고만고만한 좌판이 줄줄이 이어져 없는 게 없다. 반찬거리 입맛 다실 요기거리가 바글바글, 시장바구니 들고 나온 아주머니는 “푸져 갖고 뭘 해묵어야 헐지를 모르겄네” 한다.
곡성장은 채소전이 터주대감처럼 넓게 따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장옥 안에 있다가 하천부지 공사를 해서 새로 살림을 나온 것.
“(채소전이) 장 안에 있을 때는 보도사도 못해. 구랭이 한 마리 못 지내 댕겨. 곡성이 뭐 안 난 것 없이 많이 난게 곡성장에 채소가 싸. 압록 사람들이 채소 살라믄 곡성장 오고 생선 살라믄 구례장 가고 그려. 곡성장 채소가 싼게 장사꾼들이 여그서 고치(고추) 콩 폿(팥) 사다가 광주 남원 구례에 내고 그려. 곡성 고치가 유명하잖애.” 동막떡(59)은 깻잎 오이고추 얼가리배추 집된장을 팔고 있다.
가을 채소전에는 새로 생겨난 전(煎)이 여럿이다. 밤전이 크고 단감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대추 무화과가 탐스럽다. 모양새나 양으로 보나 하나하나 손수 따온 것들. 한 할머니는 “무화과가 잘 나가네. 우리집 무화과가 더 큰디, 나도 갖고 올건디…. 내야 내놓으믄 지비는 한나(하나)도 못 폴았네. 운 좋구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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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왔는가.” 채소전에서 만난 웃음. |
ⓒ 김창헌 기자 |
오곡면 봉조리에서 온 할머니는 ‘최고밤’ ‘고급밤’만을 팔고 있다. 재미난 호객 행위로 주위 할머니들을 웃게 만든다. “내야(내것)만 최고밤. 쩌 밤은 못난이밤. 산에서 주숴(주워) 온 내야만 고급밤. 알밤은 널친(떨어진) 놈이 맛있어. 내야가 널친 밤.” 멧돼지 너구리 다 먹기 전에 부지런히 가서 주워 온 알밤이다. “내 밤 못 사믄 밤잠 못 자.”
밤이 잘 나간다. 막 따온 햇밤들. 알이 통통하다. 만지작거리다 “담아주쇼” 하게 된다. 한 할아버지는 알밤 펼쳐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 아무 말 없이 담배 태우고 있다. “보믄 알아…. 알아서 가져가.” 그 말이 맞았다. 점심때 되자 밤 싸온 보자기를 홀가분하게 털고 담배 한대 태우고 있다.
시방 채소전 사람들은 너나 나나 도시락이다. 자장면 값도 오르고 비료값도 올랐다. 시장 식당밥도 2500원에서 3000원으로 올랐다. 식당밥 먹던 사람들도 도시락으로 돌렸다. “장사하는 사람들이라 차비라도 빼야겄다는 생각이 먼저 들제. 식당 언니 서운해한게 한번썩은 묵어줘야 한디….” 옥과에서 온 전춘연(58)씨.
어디서 “박 떨어졌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둥근 박 하나가 좌판에서 떨어져 굴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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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봐라! 햇빛을 가리고 흘러내리는 땀을 막는 방법도 여러 가지. |
ⓒ 김창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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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옥에 자리한 3천 원하는 백반집. |
ⓒ 김창헌 기자 |
나락이 많이 죽은 해 많이 나는 고마운 버섯, 능어리
눈길 끄는 것들이 있다. 가을이라야 낯을 내미는 것들이다.
별스럽게 생긴 능어리(능이버섯)는 나온 양이 적지 않다. 봉조리2구 정옥자(53)씨는 “곡성장 아니믄 나오가니” 한다.
‘일 능이, 이 표고, 삼 송이’라고도 하고 ‘일 능이, 이 송이, 삼 표고’, ‘일 능이, 이 석이, 삼 송이, 사 표고’라고도 한다. 이러나 저러나 능이는 일등이다. 버섯 가운데 제일. 값이 만만치 않다. 손님도 “아따 좋소! 비싸지라 잉” 하고 지나간다. 신문지 반쪽에 올려놓은 능이 값이 십만 원. 1㎏에 5만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올해는 날씨가 가물어 갖고 능어리가 크지도 않고 많이 안 났어. 비가 자근자근 와야 몽신몽신 나거든. 근게 이것이 나락이 많이 죽은 해에 많이 나고, 나락이 잘 되는 해에는 없고 그려.”
태풍에 농사 망친 해, 능이는 어느 해보다 많이 나와 애들 차비도 학비도 마련해 준다. 밀린 비료값, 농약값도 대주는 버섯이다.
“딱 9월 한 달간 능어리가 나. 많이 난 해는 이백(200만 원)도 되고 삼백도 돼. 돈 나갈 일은 많고 농사는 안 되고 갑갑해 죽겄다가 그 돈 쥐어지믄 한시름 놓제. 근디 올해같이 안 나믄 백도 안 되야.”
능어리밭 발견했을 때는 반갑고 고마워서 가슴이 애릴 정도다. “몬당(정상) 7∼8부 능선 북풍받이에서 능어리가 나. 한 포기씩 있기도 하고 어떤 데는 줄로 조르르 나 있기도 하고. 요 몬차(먼저)는 작년에 난 디도 가보고 능선 너머로도 갔는디 하나가 없네. 해 떨어진게 내려온디 뫼똥 가상에 쪼르르르 보여. 시상에 시상에 내 생각고 니가 있었구나 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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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것이 장사가니. 전기세나 낼라고 하는 것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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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대장간은 장터의 휴식공간이기도 하다. |
ⓒ 김창헌 기자 |
능이는 한약 냄새가 난다. 그러나 먹다 보면 그 맛과 냄새에 빠져든다. “독해. 비올 때 따믄 살이 까져 불어. 묵는 디는 지장없어. 한약보다 더 좋은 게 능어리여. 애 낳고 속배 아픈 데 이만한 것이 없제. 청양고추 넣고 능이로 돼지고기 호박찌개 하믄 그렇게 맛있어. 돼지고기 맛이 소고기 맛으로 변해 불어.”
능이는 머리에 쓰고 다녀도 될 정도로 큰 것도 있지만 음식으로 해 먹기에는 주먹만한 것들이 뭉쳐 있는 것이 좋다. 가지에 ‘수염(잔 털)’이 나 있는 것보다 손으로 만졌을 때 단단한 것이 좋다. 수염 난 능이는 늙은 능이다.
“우리는 잰피 있어야 추어탕 오리탕을 낄여”
나룻배로 강 건너 장에 나온 이들은 섬진강변 호곡마을 사람들. 나루터 건너로 줄 끄집는 줄배 타고 건너다니는데, 시방 그 줄이 끊어졌다. ‘작질’로, 긴 대나무로 물 속 짚어가며 물을 건너왔다.
호곡마을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팔고 있는 것은 잰피. 대야에 신문지 위에 스뎅(스테인레스 스틸) 밥그릇에 작고 붉은 열매가 예쁘기만 하다.
신백동(76) 할머니가 잰피 열매 하나를 건넨다. “한번 깨물어 묵어 봐.” 무슨 맛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얼른 뱉어내고 말았다. 입안이 얼얼하다. 할머니는 “참말로 맛있는 거여” 한다.
“우리는 요것 있어야 추어탕 오리탕을 낄여(끓여). 잰피 없으믄 안 묵고 말어. 요것 들어가야 향이 팍 남시롱 얼큰하니 맛나. 안 들어가믄 기심심허니 개운한 맛이 없어. 배추짐치 무시 싱건지 겉절이 담글 때도 요것 넣야 맛이 나제, 안 들가믄 심심해서 못 묵어. 요것을 꾸준히 여 먹으믄 회충이 없어. 호곡 사람들은 당아 회충약 안묵고 살어.”
잰피와 비슷하게 생긴 산초는 껍질을 버리고 열매를 먹지만 잰피는 열매를 버리고 껍질을 갈아서 먹는다. “이것을 널어 노믄 까만 씨가 톡톡 터져 나와. 딱 말려놨다가 새복 꼼꼼(깜깜)할 직에 다시 내놔. 이슬에 촉촉할 때, 아침에 비비믄 (안 빠지던 열매가) 딱 빠져 불어. 껍데기만 해 묵을 수 있제.”
잰피는 “큰 공들여서 따온 것”. 앞산에는 없고 깊은 산에 들어가야 있다. “야차운 산에 없어. 요놈 따러 가다보믄 멧돼지도 있고 산삼도 있고 다 있어. 같이 댕겨야제 무솨서(무서워서) 혼자 못 댕겨.”
잰피는 겨울에 홑옷을 입어도 추위를 모르게 된다고 할 정도로 약용으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곡성장에는 산호처럼 생긴 싸리버섯과 영지버섯도 많다. 영지버섯은 매화나무에서 난 것인지 참나무, 감나무에서 난 것인지 따진다. 자두나무에서 난 영지를 가장 높게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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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바닥에서 술 한잔 걸치는 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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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도매라 싸요. 깎을 것도 없어요.” 추석 대목 곡성장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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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항거, 가장 늦게까지 엽전 사용한 장
대장간에 든다. 16살 때부터 장사를 해오고 있는 임금택(65)씨. 장선리 문철호(77) 할아버지가 마실 나와 있다.
“장이 원래는 지금의 매일시장 자리에 있었제. 쫍아 갖고 이쪽으로 나왔어. 조순희씨가 국회의원 할 땐게 50년대 중반에 이쪽으로 왔을 거여.”
“소전도 크고 돼아지전도 크고. 남원 금지면 주생면, 남원 대강면 사람들도 오고, 곡성 4개면 전북 3개면 사람들이 장보러 왔제. 시방도 오고. 금지면 사람들이 생강 들고 많이 왔제. 걸어댕길 땐게 아침에 왔다가 해름참에 가는디 신작로에 주막집이 쌨어. 한잔씩 먹고 가는 거제. 안 글믄 못 들어가.”
곡성장에 이름난 순대국밥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옛날에는 순대를 ‘피창’이라 했다. “서울에서도 피창을 묵으러 와. 젊은 사람들은 ‘똥국’이라고 하던마. 지금이사 순대국밥을 쉽게 사묵는디 우리 살 때는 비참했는게 돈깨나 있는 사람이 사 묵고 그랬어. 실가리죽도 제법 논두렁이나 짓는 사람이 묵고. 100환이믄 백반이 진수성찬일 때제. 국시 한 투가리(그릇)에 5원 할 땐가 50원 할 땐가, 그것 사묵기도 쉽지 않았제.”
생선은 여수와 순천에 가서 가져왔다. 곡성에서 여수 가는 기차가 다녔지만 차비가 비싸 장사꾼들이 걸어서 가져왔다. “17번 도로 따라 가 갖고 지게로 지고 와. 대구 생명태 철따라 지고 옴시롱 폴고, 곡성에 다 가져와 갖고는 썩어서 버려 불고 했어. 근게 가오리를 많이 가져왔제. 시방이니까 홍어라고 한디, 그때는 가오리라고 했어. 써금써금 썩은 채로 팔아도 맛이 좋은게.”
조남녀(81) 할머니는 “옛날에는 가을이면 곡성장이 ‘감장’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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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믄 알아…. 알아서 가져가.” 통통한 알밤, 호객 행위가 필요 없다. |
ⓒ 김창헌 기자 |
“곡성이 감 고장이었어. 감이 많이 나온게 사 간 사람도 많고. 내가 명산서 살았는디 하루장에 두 번을 감을 여다 폴았는게. 학독(확돌)에다 소금 넣고 감잎싹 넣고 우려갖고 폴고 논 가상에 떨어진 놈은 논바닥에 파묻어 놨다가 폴고.”
문헌으로 보면, 곡성장은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석곡장(5) 옥과장(4·8) 흥복장(1, 겸방면 원동장)과 함께 곡성장은 3일 끝나는 날짜에 서는 십일장이었다. 1830년대 쯤에 3·8일에 장이 서는 오일장으로 발전한다.
곡성장은 가장 늦게까지 조선조 엽전이 사용된 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운 화폐가 나와 엽전은 한낱 쇠붙이가 되고 마는데 곡성장에서만큼은 전라선이 개통될 무렵인 1932년까지 무려 10년 넘게 화폐 구실을 해냈다. 전국의 엽전이 곡성장에 몰려 시장경제를 이끌었다.
‘삼성삼평’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제에 의해 악의적으로 비춰진 곳 중 하나인 곡성. 곡성장의 엽전 사용은 일제의 강제적인 경제수탈에 반대하는 항일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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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소전 한쪽에 있는 팥죽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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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엄마 과일가게에 총출동해 장사를 거든 곡성중 학생들. 왼쪽부터 최동운 강성국(아들)
최종화 정영재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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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먹음직스러운 걸로 고르세요”
도로에서 장사하는 신명순(43)씨 과일가게에는 중학생들이 대거 출동해 물건을 팔고 있다. 아들 강성국(곡성중 1년)군이 친구인 최동운 최종화 정영재군을 데리고 온 것. 친한 친구 사이라 일당은 없다. 누가 제일 많이 파나 내기를 했다.
정영재군은 “재밌을 줄만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엄청 떨려요. 말 한마디가 안 나왔어요. 나 때문에 장사 안 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니 말이 나왔어요”한다.
“제일 먹음직스러운 걸로 고르세요” “드셔보시면 후회 없어요” 곧잘 호객 행위를 한다. 값을 깎아주라는 주문에 “저도 깎아주고 싶은데 과일값이 너무 올라서요” 한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인사만큼은 백점이다. 큰 목소리로 정중히 허리를 굽힌다. 사주시는 것이 감사하다.
신명순씨가 손에 쥐어주는 귤을 내려놓고 바나나를 까서 먹는다. “귤은 세 개에 2천원 하잖아요.” 오일장에서 만난 상큼한 풍경. 바글바글 곡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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