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호의 출판전망대/
“전교 1등 하는 아이를 둔 대치동 엄마가 유명 여성잡지에 소개된 화보는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성인잡지의 센터폴드(성인잡지 가운데에 몇 장에 걸쳐 삽입되는 누드모델의 화보)보다 미성년자에게 해롭다.”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임원이었던 이현정이 <대한민국 진화론>(동아일보사)에서 던진 뼈아픈 지적이다.
하지만 대치동 엄마의 ‘성공담’은 베스트셀러다. 왜냐고? “자신의 인생이라는 창작극에서 각본, 연출, 주연을 다 맡아도 시원치 않을” 아이들을 소품처럼 밀어놓고 엄마가 직접 나서서 피나는 전투를 수행해 아이를 명문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사고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렇게 해서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나면 그래도 고생 끝이었다. 나이 18살에 어느 대학에 들어가는가에 따라 인생의 밑그림이 판정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을 팔아서라도 직장을 갖고 싶다”는 아우성이 넘치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3분의 2가 고시원에 틀어박혀 국가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세상이다 보니 이 땅의 엄마들은 더 바빠졌다. 자녀가 대학생이 된 뒤에는 함께 성적관리도 해야 하고 아르바이트, 공모전, 봉사활동, 인턴, 자격증 같은 취업 5종 세트를 갖추는 것도 도와야 한다. 자식을 ‘위장취업’시켜 줄 능력이 없는 엄마들은 취업전선에 함께 뛰어들고 결국 성공적인 결혼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야말로 이 땅의 엄마들은 “평생 애프터서비스의 총관리자”를 자처하고 있다.
요즘 나는 종종 대한민국 엄마들은 자식을 장례 치를 때까지 절대로 자식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이런 농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새 정부 정책입안자들은 한술 떠 뜬다.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하겠다거나 교육인적자원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시도단위 교육위원회의 자율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겠단다. 대학을 그저 취업을 위한 지식이나 조건을 마련하는 통과의례 장소로밖에 여기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자들의 논리가 더욱 득세할 것이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과정은 대학을 가기 위한 장기간의 입시학원 수준으로 전락해갈 것이다. 교과서로도 부족해 모든 아이들이 교양서마저 똑같은 책을 읽게 하고 그런 과정을 살펴 대학입시에 활용하겠다는 독서이력철이나 독서능력검정시험 같은 기괴한 발상이 어느새 학교현장에서는 현실화됐다.
이런 이유로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21세기 지식사회에서는 더는 획일적 가치관이 통하지 않음을 자각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근본적 능력을 갖추는 것만이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늘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당위로만 여겨지던 청소년 출판이 올해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난 5년 동안 아동출판으로 입지를 확보한 출판사들 가운데 청소년 출판에 뛰어든 곳도 늘어났다. 이제 자식에게 책을 읽혀 창의력을 키우게 하려는 부모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것만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문서는 안 된다고 한탄을 하지만, 천재들의 발상법을 다룬 <생각의 탄생>(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에코의서재) 같은 책이 10만 부 돌파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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