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섬고개 친구들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8년 8월
절판


엄마가 말을 마치자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엄마는 퉁퉁 부은 눈을 손바닥으로 비비고 나서는 계면쩍게 웃었다.
"내가 어린 아들 잠도 못 자게 신세타령을 했네. 미안하다."
나는 뭉클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쑥스러운 걸 참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오늘은 엄마 옆에서 자도 돼?"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든 한나를 벽 쪽으로 슬쩍 밀어내고 엄마 옆에 누웠다. 그리고 말없이 엄마 허리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61쪽

"강선경, 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선생님의 성난 모습에 술렁대던 아이들이 모두 몸을 웅크리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겁이 난 나는 눈을 내리떠 보며 반 아이들을 살폈다. 어느 누구도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선경아, 무슨 일이야? 그동안 선생님이 선경이를 잘못 봤니? 이렇게 너보다 약한 애랑 몸싸움을 하다니!"
선생님의 말에 눈앞이 흐려졌다. 선생님한테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 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교실 밖으로 뛰어나왔다.-70쪽

"기러믄, 태욱이네 미용실 골목이래 다 헐렸간?"
"응."
할머니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근데 할머니, 우리 동네도 철거한다는 말이 돈다는데."
"기런 말이야 벌써부터 있었디."
"그럼 어떻해."
"걱덩 말라우. 내래 그 집 헐라고 하므는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니까니."
"그럼 나도 할머니랑 같이 싸울게."
할머니가 눈가가 자글자글해지도록 웃어 주었다. 나는 얼른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품은 언제나 푸근하고 따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할머니한테 기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104쪽

"아버지. 내가 선생님 돼서 월급 모으면 아빠 땅 사 드릴게요. 아빠 오늘 월남 얘기해 준 거 되게 좋았어요. 나중에 또 해 주세요."
아버지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다.
"내가 지금 괴물이랑 싸우고 있거든. 이 괴물도 언젠가는 힘이 빠지고 늙겠지. 그러면 그땐 내가 이 괴물을 쳐부수고 가족에게 돌아갈 거야."
나는 아버지가 하는 말뜻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언젠가는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말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아버지는 버스가 오기 전 주춤거리며 내게 다가오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처음 안겨 보는 아버지의 품이 뜻밖에도 따뜻했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는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116쪽

"할머니한테는 내가 최고지?"
"기럼."
"아빠보다도?"
순간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할머니 눈을 피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할머니, 내가 할머니한테 다 갚아 줄게. 할머니 고생한 거, 다. 그러니까 괜히 울고 그러지마."
할머니가 주름진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내래 언제 울었간? 밥이나 먹자우."
"맞아. 나 배고파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벽을 짚고 일어나는 걸 도와 같이 주방으로 갔다.-127쪽

"다시 한 번 좋게 말할 때 들어. 일 크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그 선생님이 이 학교에서만 이십 년이야, 인마. 이보다 더한 일도 있었는데 아직 건재하다고. 너 혼자 윤똑똑이 짓 해 봤자 아무 이득 없어. 네가 이런 일을 크게 만들면 학교 전체가 시끄러워지고 너희들도 손해야. 너 생각해 봐. 너 혼자 이래 봤자 되는 일이 없어. 애(얘?)들이 네 편들어 줄 거 같아? 천만에. 솔직히 저 선생님 건드릴 수 있는 거였으면 벌써 문제가 해결됐을걸. 네가 혼자 들고 일어나 봤자 아무 소용없어. 공부 잘하고 똑똑한 놈들은 제가 당하지 않는데 나설 리 없고, 어중간한 놈들도 괜히 끼어들지 않을 거고. 태욱이 같은 놈들이야 부르대겠지만 솔직히 공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애들 편을 누가 들 거야? 하다못해 수학 선생님한테 당한 놈들 부모도 대학 입시 생각해서 함부로 안 나선다고. 까놓고 말해서 너희 부모님이 네 뒤를 봐줄 만큼 빽이 좋냐? 자칫하다간 너만 똥 밟는 거야. 너 괘씸한 거 생각하면 오늘처럼 혼자 날뛰는 거 그냥 놔두고 징계 처리 받게 해도 돼. 그렇지만 명색이 담임으로서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이미 학생주임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가서 아이들한테 -195쪽

으름장 놓고 나왔을 거라고. 괜히 너랑 태욱이한테 부화뇌동하는 놈 가만 안 둔다고."
말로는 나를 걱정해서 하는 충고라지만 담임의 말투는 거의 협박 투에 가까웠다. -이어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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