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절판


따라서 우리는 저자의 죽음 운운하는 게 결국에는 노자와 장자의 딜레마를 되풀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아프리카든 어디든 똑똑한 놈들의 생각은 다 비슷하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들에서 일치할 때마다 서로에게 고무되어 마치 금방이라도 대작을 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런저런 논쟁들을 하면서 우리는 동시대의 소설가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데에도 일치했다. 그와 나는 동시대의 소설들을 분류하다가 우연히 보르헤스적, 마르께스적이라는 낱말을 사용했고, 일단 그렇게 구분을 하고 나니 모든 소설들이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성석제는 보르헤스로 위장한 마르께스적 소설가이고 신경숙은 마르께스로 위장한 보르헤스적인 소설가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46쪽

장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을 나오던 그의 귓불에 장의 목소리가 는질는질 매달려 있었다. 고깃집에서 얼큰하게 취한 장은 물기 가득한 벌건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서 뭘 했냐고 물었지? 이래봬도 인민해방군 장교이지 않았갔어! 장은 북조선과 남조선이 전쟁을 하면 다시 인민군에 들어가서 북을 도와 남을 쓸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남조선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짐승도 이보단 낫지 않갔어? 보라우, 우리는 배가 고파도 사람을 그렇게 짐승 취급은 안해.-89쪽

그가 모르는 사이 일년마다 한번씩 계약이 갱신되었고 그렇게 두 해가 흘러갔고 삼년 전 그날, 해고를 통보받은 날 그는 자신의 몸에 깃든 뱀을 처음으로 보았던 것이다.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자각 때문이었을까. 그는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했다. 때로는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잔업수당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으나, 사실은 더 싼 가격에 몸을 팔아줄 숙련공이 나타날 때까지 대체물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그도 술꾼이 되어 있었다. 그의 뱀도 그의 술을 받아먹으며 몸집을 키워왔으리라.-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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