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등교할 적마다 두발검사에 복장검사를 하질 않나 어떤 교장은 부임하자마자 전교생의 바지 호주머니를 꿰메도록 지시했다. 추우면 참되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다니면 단정해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우리는 교복이 일제시대에 생겨난 것도 알고 있었고, 교모를 쓰고 목까지 올라오는 높은 칼라에 학년 표지와 배지를 꽂고 금속 단추를 달고 이름표를 붙이는 복장이 십구세기 유럽 제국주의 시대의 군복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다 매주 월요일에 군대처럼 열병식으로 조회를 했다. 당연히 학생회장은 대대장이고 우리는 졸병인 셈이었다. 머리털은 죄수들같이 언제나 하얗게 속살이 보이도록 박박 깎아야했다. 어떤 애들은 괜히 모자를 찢고는 재봉실로 여러 겹 꿰매기도 하고 바짓가랑이를 나팔모양으로 늘렸다가 홀태바지로 줄이기도 했다.-49쪽
네 아버지도 어려서 만주를 여행했다고 하시든데, 거긴 땅두 넓구 나쁜 사람들두 많았으니 참 대단한 거지. 여기야 교통두 그럴듯하구 가봤자 손바닥 안이니까 다녀볼 만하겠다. 언제 떠나니?-141쪽
이런 길에서 탈락되었던 청소년기의 어느 때부터 나는 저절로 알아차렸다. 이들이 얽어내는 그물망 같은 사교가 서로 직조되어 일정한 그림으로 나타난, 이를테면 연애와 결혼, 성공과 실패, 출세와 낙오, 사랑과 야망 따위의 전형들이 결국은 한강을 둘러싼 자본주의 근대화 사회의 풍속도를 그려내고 있음을. 아니면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에까지 연결되고 그 길은 더욱 확장되고 뚜렷해질 것이었다.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 그 길은 내가 어릴 적부터 어렴풋하게, 이건 빌딩가의 대로처럼 너무도 뻔하고 획일적이라고 느껴왔던 삶으로 가게 될 확실한 도정이었다. 그러나 벗어났을 때의 공포는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185쪽
약속된 날짜에 선창으로 가서 선주와 계약을 하고 오징어잡이배를 탔다. 대위와 나는 우의와 장화와 낚시 물레 등속을 어구상점에서 세내어 배에 올랐는데 각자가 잡은 만큼 선장과 선주에게 떼어주고 나면 나머지는 제 몫이었다. 대위가 내게 오징어잡이 요령을 가르쳐주면서 말했다.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겄냐?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어.-259쪽
만선이 되어 돌아오는 새벽이면 갈매기떼가 요란하게 울면서 따라왔다. 대위와 뱃전에 나란히 서서 파랑새담배 한 대씩 물고 멀리 가물거리는 항구의 불빛을 바라보던 때, 나는 내 힘으로 살고 있다는 실감 때문에 담배연기를 길고 거세게 내뿜곤 했다. 우리 두 병이야. 대위가 회계에 얘기하고 소주 두 병을 박스에서 뽑아다 아직도 꿈틀대는 오징어 한 마리를 식칼로 쑹덩쑹덩 서너 토마그로 큼직하게 썰어서는 쟁반 위에 던져놓았다. 우리는 병째로 들고 꿀꺽이며 소주를 넘기고 오징어를 초장에 찍어 우물우물 씹었다. 그제서야 일 끝난 뒤의 나른한 피로가 기분 좋게 어깨와 장딴지로 퍼져갔다. 목마르고 굶주린 자의 식사처럼 맛있고 매순간이 소중한 그런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내가 길에 나설 때마다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260쪽
대이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좀 가만 있으라고 짜증을 냈다. 땅거미 질 무렵의 아름다운 고즈넉함을 더욱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라, 저놈 나왔네. 대위가 중얼거리자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저물어버린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개밥바라기 보이지? 비어 있는 서쪽 하늘에 지고 있는 초승달 옆에 밝은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잘 나갈 때는 샛별, 저렇게 우리처럼 쏠리고 몰릴 때면 개밥바리기. 나는 어쩐지 쓸쓸하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270쪽
도심지의 불빛들이 멀어지면서 어두운 들판이 다가왔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여정에서 문득 이제야말로 어쩌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출발점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으며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따위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 대위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니까. 기차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터널을 통화하는 중이었다.-28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