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21 - 가자미식해를 아십니까?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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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우리들 아지트였던 계단꼭대기 단칸방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1미터도 안되는 좁다란 복도 왼켠으로 화장실, 친구와 동생이 같이 쓰는 방, 다섯살배기 아이와 함께 내외가 쓰는 방, 회사에 다니는 노총각의 방, 그리고 협소한 거실을 두고 주인아저씨네 방이 있고, 그 옆에 친구 어머님과 누님 두 분이 함께 쓰는 방으로 구성된 집이었습니다. 복도의 오른켠은 낮은 블록담 너머로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집. 비가 오면 신발을 쪽마루에 얹어두고 비닐을 덮어놓아야 했던 집.

친구 어머님께서는 일찍 홀로 되셔서 4남매를 어엿하게 성장시킨 자랑스러운 분이었습니다. 함경도 태생이신 어머님은 가끔 우리들에게 원산 명사십리의 경관과 함경도 특유의 문화나 생활습관들을 알려주셨지요. 친구들 가운데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라 우리는 늘 몇 개의 라면을 사들고, 찬 밥과 김치보시기를 비워버리곤 했습니다. 그릇을 비우고 설겆이를 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나 오뻥(!)을 하다보면 또 누군가 라면봉지를 들고 들어왔고, 그러나 어머니의 김치독은 항상 빈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집에 가지 않고 친구의 방에서 뒹굴던 우리들에게 다들 건너오라고 하시면서 마련해주신 밥상에는 생전 못보던 음식이 놓여있었습니다. 항상 고향이 자랑스러우셨던 어머니께서 식해 먹을 줄 아느냐고 물었고, "누가 밥 먹을 때 식혜를 먹어요?" 하는 우리들에게 막 지은 뜨거운 밥, 김장김치와 함께 내놓으신 가자미식해. 그 맛이란!(그 다음부터 어머니께서는 철모르는 우리들을 위해 더 많이, 더 자주 식해를 담그셨지요) 

맛있게 식해를 먹는 우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돌아가신 친구 어머님의 모습이 그립군요.  

갖가지 음식마다 담긴 각각의 사연들을 이미 100화 이상, 그것도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스토리로 그려내신 허화백님의 <식객> 21권에서 다시 가자미식해를, 그리고 어머님을, 또한 친구들과의 옛기억을 흐뭇한 마음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내일 아침이면 몇 군데 전화를 넣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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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8-0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뒤, 최인호의 <머저리 클럽>을 읽었고, 지금은 황석영의 <개밥바리기별>을 읽고... 무더위를 '추억모드'로 잊으려는 것보다는 창문밖 세상 한 귀퉁이가 70년대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