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그리고 햅쌀이 나올 때까지는 그야말로 집 안에 쌀 한 톨이 없었다. 어쩌다 제사나 생일날만 빠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쌀들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쌀이 얼굴을 내밀 때는 늘 조신하게 몸을 숨기던 보리가 이제는 당당히 주인노릇을 할 바로 그때인 것이다. 아침에는 주로 감자를 넣은 보리밥을 해 먹었다. 그래야 부드러운 감자 힘을 받아 푸실한 보리밥을 목구멍에 넘길 수가 있었으므로. 보리밥에 감자 대신 돈부를 넣어 먹기도 하였다. 포근포근한 붉은 돈부가 점점이 박힌 보리밥. 그럴 때 아직 목구멍이 여물지 않은 어린애들은 보리는 다 밀쳐두고 돈부만 골라 먹기 십상이었다. -46쪽
엄마들은 떫은 감들을 뜨듯한 소금물이 든 항아리에 쟁인다. 그것이 이름하여 우린 감. 며칠이 지나면 그 푸르고 떫기만 하던 감들이 노랗게, 짭잘달콤하게, 우린 감 특유의 향기를 내뿜게 되는 것인바, 소금물에 우려져서 떫은맛은 싹 가시고 단맛만 남은 그 아삭한 우린 감을 포식한 덕분에 필히 겪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변비였다. 운동회 당일 내 동생이 측간에서 엄마를 부르며 징징 울어대던 이유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울 엄마 대젓가락 하나 들고 측간으로 달려가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린 감이 빚어낸 조홧속 때문이었던 것이다. 먹을 때는 좋고 '쌀' 때는 괴로운, 이름하여 우린 감의 공포.-54쪽
집이랄 것도 없는 아버지의 거처에서 나는 열흘을 살았다. 새벽이면 아버지는 연탄불에 시래깃국을 끓여놓고 일을 나갔다. 나는 하루 종일 햇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 먹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밤이면 아버지가 또 용접 일을 하느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래깃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시래기 된장국은 데우고 또 데워서 거의 달여질 정도가 되어서 짜디짰다. 짜디짠 시래기 된장국에 만 밥은 그렇게 그해 겨우내 아버지의 유일한 일용할 양식이었다. -129쪽
어느 해 겨울 아침에는 눈밭에 고춧물 벌겋게 든 고들빼기김치가 엎어져 있었다. 필시 부모 몰래, 오빠 몰래, 동생들 몰래 살짝 퍼가지고 나온 것이었을 텐데. 전날 밤, 눈밭에 미끄러져 아까운 고들빼기김치를 달팍 엎어버린 큰애기는 누구였을까. 남순이였을까, 이순이였을까, 연순이였을까. 그런데 왜 우리 동네 큰애기들은 죄다 순이였을까. 그 순이들은 지금쯤 모다들 할머니들이 되었겠다. 우리 순이 고모, 우리 순이 이모, 우리 순이 언니들은.-209쪽
해는 햇무리에 가려 허여멀건하고 저녁때가 다 됐는데도 풀밭의 성에가 녹지 않는 그렇게 추운 동짓달의 장날. 엄마는 행까치에 꼭꼭 싼 돈을 쥐고 장옥들 한가운데쯤에 있는 단팥죽집으로 나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딱주(더덕) 깨는 아낙네'들과 어미들을 따라 나온 아이들이 단팥죽을 먹는다. 단팥죽을 먹는 손등과 뺨이 단팥죽 빛깔이다. 단팥죽집을 온통 채운 허연 김이 싸여 단팥죽 먹는 여인들과 아이들 모습은 바로 옆사람도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여인들은 아이들이 새알을 다 먹고 배가 둥둥같이 부른 다음에야 붉은 단팥죽 국물을 후루룩 마신다. 그날의 풍경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일도 그 여인들은 홀쭉한 허리에 베보자기를 차거나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으로 딱주를 캐러 갈 것이다.-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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