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함 - 4킬로미터 아래 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내게 오는 우편물들을 보관해놓는데 한 달에 한두 번 들르면 관리사무소 직원은 나무상자 안을 뒤적여 내 이름을 확인한 후 몇 통의 우편물들을 책상 위에 꺼내 놓는다. 전기요금 고지서, 종묘상회 신품종 추천서, 장작보일러 회사의 홍보물, 원주시민회관에서 언제 효도잔치 노래공연을 한다는 포스터... 이런 것들을 한 장씩 꺼내 읽으면서 산길을 되짚어 올라온다. 내 삶에 눈길을 주는 것들의 목록을 떠올려 본다. -62쪽
눈 맞으며 나무 하기 - 화전을 하다 떠나간 사람들이 일구었던 산비탈에는 잣나무가 빽빽하다. 수령이 이십 년쯤 된 제법 굵은 나무들과 그 나무들이 떨어낸 씨앗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끼어있는 이 숲은 고요하다. 누렇게 떨어진 잣나무의 침엽들은 그 위를 지나가는 발자국의 소음을 빨아들이고 양탄자처럼 푹신한 감촉을 전해준다. 딱딱 부러지는 삭정이 소리와 죽은 나무의 밑동을 베어내는 톱질 소리가 깊은 고요를 더욱 깊게 한다. 흐릿하던 오후의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려온다. 바람 없는 허공에서 내려오는 눈송이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한다. 단 하나의 움직임도 없는 잣나무 숲을 느리게 돌아다니며 땔감을 하고 있는 한 마리 짐승의 구부린 등뼈 위로 소리 없이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이런 날은 춥지 않다.-117쪽
밤비 소리를 듣다 - 잠시 눈을 붙이려던 초저녁잠을 내쳐 자고 후두둑거리는 지붕의 빗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세 시다. 다시 잠들기에는 너무 많은 잠을 잤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노란 빛깔의 종이 등 불빛이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고 있다. 지붕의 빗소리가 사라지고 마당 위쪽 창고의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이파리가 무성한 밤나무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마당의 땅바닥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고요한 귀는 여러 가지의 빗소리를 건너다니며 듣고 있다. 나를 두드리는 빗방울들에게 나는 무슨 소리로 화답하며 지나왔을까. 빗속에 흔들리며 울리는 처마의 풍경소리가 상여를 끌고 가는 요령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새벽, 내가 만들어내는 내 생의 소리를 들어줄 이는 누구인가?-134쪽
찻상에 새겨 넣은 절대고독 -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살면서 고독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 아닌가. 고독감을 몸부림치며 피해갈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고독감에 도취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마주쳐야 하는 인간 내면의 진실일 뿐이다. 사실 고독감이나 외로움에 지나치게 빠지면 산 생활을 하기 어렵다. 야생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되도록 명랑한 내면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명랑한 내면이 가을 낙엽과 겨울의 시린 북풍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다.-192쪽
우정의 장조림 - 두꺼운 솜이불 하나를 덮고 나란히 누워 학창시절 이야기며 소식이 끊긴 몇몇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의 옅은 코골음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새벽녘 선잠 결에 옆을 보니 그의 자리가 비어있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방문을 연다. 원두막지붕에 하얗게 눈이 덮였다. 주방이 있는 방문을 열자 그가 싱크대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찬물 한 바가지를 옆에다 떠놓고 손을 담그며 간장에 끓인 돼지고기를 찢고 있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밑반찬으로 장조림 한번 해주고 싶어서." 간이 맞나 보라며 찢어놓은 고기 한 점을 내 입에 넣어준다.-19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