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꼬리표 ‘알바→계약직’ 돌고 돌아도 쥐꼬리 월급-
김현주씨(25)가 고교생일 때 부모는 노동일을 했다. 부모의 월수입은 200만원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는 “집안은 윤택하지도 않았지만 궁핍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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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서울 종각 집회 현장에서의 김현주씨. 홈에버 서울 상암점에 근무하다 파업에 참여한 뒤 해고당했다. 비정규직을 전전했던 그가 선 자리는 결국 이렇게 찬바람 부는 거리가 되었다. /김종목기자 |
대학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 다니는 친구나 언니들이 중도 하차했다. 대학을 포기했다. “대학 나와 좋은 직장 들어가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못 봤어요.” 결국 그의 학력은 ‘고졸’로 마침표를 찍고, 그 순간부터 지체없이 언제 끝날지 모를 ‘저임금’ ‘비정규직’ 인생이 시작되었다.
졸업 뒤 서울 동대문에 있는 상표 부착 업체에서 경리일을 했다. 고교 시절 롯데리아에서 ‘알바’를 했지만, 정식 직장은 처음이었다. 월급은 60만~70만원.
“매일 혼자 사무실에서 자장면 시켜먹고 일하는 생활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다닌 컴퓨터 학원에서 일하러 오라는 권유를 받고 옮겼지요.” 학원 등록을 권유하는 텔레마케터 일이었다. 인센티브제라서, 한 달에 50만원도 못 벌 때가 많았다.
그 이후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텔레마케터를 했다. 카드깡과 연관된 대출 업무도 했다. “카드깡 일로 200만원 넘게 벌 때도 있었지만 경찰 단속이 잦아 관뒀지요.”
2003년 스물두살. 그는 까르푸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주6일 근무.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마감 시간인 자정까지 일했다. 그는 “하루 종일 서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루 12시간 노동에 80만원을 받았다. 계산 실수를 할 때는 그만큼 월급에서 공제했다. 그럴 때는 60만원도 못 받았다.
저임금에 업무 강도가 높았지만 초과 수당이나 주말 수당은 받은 적이 없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도 몰랐다.
“20대 초반까지 근로계약서니 각종 수당이니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필요한 줄도 모르고 살았죠”.
까르푸는 직원들을 레벨 1~7로 분류했다. “오래 근무하고 근무 태도가 좋으면” 레벨을 올려준다. 레벨 7에 이르면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처음엔 직원들이 레벨을 올려달라고 싸우는 걸 보고 이해를 못했어요. 몇년간 일해도 100만원도 못 받는 것을 당연한 일인 줄 알았어요.” 노조위원장으로부터 노조 가입 권유를 받았지만, 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그런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간에 동료들과 수다 떠는 게 더 좋았다.
2006년 7월 까르푸가 한국 철수를 결정했다. 이랜드가 인수하면서 이름이 홈에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고용 승계 문제 등 근로조건도 바뀌게 되었다. 파업이 시작됐다. “(홈에버에서 파업할 때) 경찰이 회사 편을 드는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공권력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에 솔직히 충격을 받았어요.”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세상이 비정규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는 “성인이 된 뒤에 투표해본 적이 없고, 정치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권영길을 뽑으면 세상이 달라질까라는 생각을 해봐요. 아빠는 이명박이 되면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해요.” 그는 어느새 민노총 조합원이 되었다. 홈에버 동료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집회에 참여한다.
그는 “88만원 세대란 말에 공감한다”면서도 “내가 더 노력했으면 되는 건데,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고 했다. “가끔 부모님 원망도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희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내 책임이 더 크죠.” 88만원 세대를 배출한 사회에 맞서는 것과 자학하는 젊은이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꿈, 소망을 물었다. “투쟁에서 승리하고 싶어요.” 그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지금 너무 힘들어요.”
〈오동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