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전화 보험판매 최영미씨
입력: 2007년 12월 03일 18:24:50
 
최영미씨(26·가명)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여상을 갔어요. 부모님들이 여상을 권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선택했어요. 집안이 어려웠으니까요.”


아버지는 실직하고 어머니는 공장을 다닐 때였다. 학교를 졸업한 뒤 레코드 가게에서 점원을 하며 돈을 모았다. 오전 9시에 나가 오후 8시까지 일했다. 월급은 60만원. 동네 도서관에서 혼자 수능 공부를 했다. “경리일과 은행일이 싫었어요.”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고려대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스물한살 때였다. 등록금은 마련했지만 입학금은 학자금 융자를 받아야 했다. 다음 학기 등록금도 마련해야 했다. 결국 휴학하고, 이마트에서 1년 동안 일했다. 주차 도우미와 관리 총무도 했다. “한 달에 80만원을 받았는데 60만원을 저축했어요. 대학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요.”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 2003년 2학년으로 복학했다. 그러나 급등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었고, 끝내 학업을 포기했다. “영화 분야에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돈 버는 게 더 급했어요.” 돈 벌이가 쉽지 않았다.

최씨는 다시 비정규직을 전전하게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 회사 사무직으로 들어가 매달 74만원을 받았다. 5자매 중 막내였지만 버는 돈 대부분을 집안 살림에 보탰다. 명문대 ‘중퇴’라고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력서상 김씨는 ‘고졸’. “그들(대졸자)과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어요. 고졸 출신을 다른 사람 취급했어요.” 커피와 잔심부름도 해야 했다. 커피를 탈 때면 여상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차 대접 법을 배우던 악몽이 떠오르곤 했다. 이 회사는 6개월 뒤 부도가 난다.

세달가량을 쉬다가 전자파 차폐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기본급 84만원, 잔업 수당을 합치면 110만원을 벌었다. 저축할 여유가 생긴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우중충할 때 공장문을 나서 퇴근할 때면 대학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해지곤 했다”고 한다.

공장일은 쉽지 않았다. “같은 검사 일을 하는 상급자가 심하게 괴롭혔어요. 젊은 여자애라서 마음에 안 든 건지 ‘일을 못한다’ ‘예의가 없다’고 매일 구박했죠. 못 참고 싸우다 나왔어요.”

그래서 간 곳이 과천의 화훼 집하장. 지난해 10월이었다. 카운터도 보고 관리일도 맡았다. 기본급은 110만원. 최씨는 “지금까지 다닌 곳 중에 가장 좋은 직장이었다”고 말했다. 그것도 지난 6월로 끝이었다. 해고. 사내 연애가 이유였다. 그는 “사내 연애를 핑계로 댔지만, 비수기니까 그냥 자른 것”이라고 말했다.

별 수 없었다. 최씨는 지난 8월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뮤지컬 배우라고 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하고 싶다. “그러나 둘 다 물 건너 갔어요. 뮤지컬 배우를 하려고 갔더니 지원금을 50만원 주는 대신 알바 같은 걸 못하게 했어요. 그 돈만 받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소망과 꿈의 성취에 대해 “노력만으로 안 된다”면서 “집안 환경이 중요한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최씨는 보험 일을 계속 해야 한다. 싫고, 스트레스 많이 받지만 딱히 다른 일을 할 게 없다. 최씨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대선 후보 유세차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29일 신당의 정동영 후보 유세차가 와 있었다. “전화를 한창 돌리고 있는데 시끄럽게 해 짜증만 났어요. 며칠 전에는 이명박 후보 유세차가 와 무릎팍 도사 노래를 얼마나 크게 틀던지….”

최씨는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진실해 보이고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찍었어요. 그런데 실망했어요. 똑같은 정치인이었어요. 정치인들은 우리들의 문제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최씨의 비정규직 이력이 쌓이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도 멀어져 갔다.

〈강병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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