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시시각각] 출판계의 `명품관` 소동 [중앙일보]
우리 역사에서 18세기는 참 멋진 시대였다. 학문과 예술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기운이 솟구치던 문예 부흥기였다. 시대 흐름을 타고 양반에서 중인, 심지어 천민 중에서도 많은 기인(奇人).이사(異士)가 배출돼 세상을 살찌웠다. 책 장수 조신선(曺神仙)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당시 책 장수는 서쾌(書) 또는 책쾌(冊)라 불렸다. 가게에 앉아 손님을 기다린 게 아니라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팔았으니 일종의 방문판매원이자 출판 마케터였다. 책이 양반의 전유물이던 시절, 조신선은 지체 낮은 거간꾼이면서도 제자백가의 온갖 서적과 의례(義例)를 꿰고 있었다. 스스로 "책의 내용은 모르지만 어떤 책은 누가 지었고, 누가 주석을 달았으며, 몇 질 몇 책인지는 충분히 안다. 그런고로 천하의 책은 모두 내 책"이라고 자부했다. 당대 최고 책 장수의 실력에 감탄한 정약용.조희룡.조수삼 같은 쟁쟁한 지식인들이 그의 전기를 남겼다('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
조신선의 시대는 갔지만 요즘 출판계.서점가의 쟁점으로 떠오른 '명품관'소동은 책의 생산.유통에 대해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교보문고 다음가는 서점 체인으로 꼽히는 영풍문고가 몇몇 큰 출판사에 명품관이라는 이름으로 전용 매장을 '분양'하기로 결정한 것이 발단이다. 다음달 중순 영풍문고 서울 종로점에 11평 규모의 매장 공간 다섯 개를 확보해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 한 대형 출판사 5곳에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분양협상 과정에서 백화점 임대료처럼 출판사당 월 300만원씩 부담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영풍문고 관계자는 "매장 인테리어 비용과 직원 인건비 등 출판사 측 별도 부담이 커 임대료는 따로 받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돈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전용 매장을 유치해 고객을 늘림으로써 매출 확대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해명이다.
대다수 출판사는 서점 공간을 백화점처럼 분양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발한다. 서점은 기업의 영리 공간인 동시에 공공성 높은 문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달에 수십 종을 펴내는 대형 출판사로서는 신간 다수가 2~3주 만에 진열대에서 밀려나는 안타까움을 전용 매장에서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출이 많은 5개사만 골라 혜택을 주면 전국 2만4580개 출판사(2005년 9월 말 현재) 중 2만4575개사는 독자를 만날 기회를 또 빼앗기는 셈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더 크다. 한 중견 출판사 대표는 "책은 다 명품이다. 같은 제품이 하나도 없다. 서점은 다양한 독자가 다양한 책을 접하고 구입하게 도와야 하는데, 몇몇 출판사에 매장을 파는 건 말도 안 된다. 작은 출판사가 더 정성들여 전문성 높은 책을 만드는 사례도 흔하다"고 지적했다.
대형 서점 때문에 이미 많은 동네 서점이 문을 닫거나 학습참고서로 연명하는 신세가 됐다. 2003~2005년 사이에 전국의 동네서점 160곳이 없어졌지만 100평 이상 서점은 오히려 62곳이 늘었다. 이번 분양 소동 말고도 일부 대형 서점은 고객의 발걸음이 잦은 통로에 특정 출판사가 일정 기간 매대(賣臺)를 설치하는 대가로 수십만원씩 받아 챙긴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출판인회의의 이정원(도서출판 들녘 대표) 회장은 "매대 거래 병폐가 여전하다는 지적이 있어 실태를 조사 중"이라며 "매장 분양이나 매대 거래가 성행하면 자금력이 약한 군소 출판사는 설 땅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온라인 서점에서도 군소 출판사는 검색창 광고나 이벤트 비용을 대지 못해 독자의 판단을 구할 기회조차 잃는 형편이다.
한 장소에서 동서고금 지식의 결정체를 골고루 맛보고 구입하는 대형 서점의 백화점적 특성은 분명히 큰 매력이다. 그러나 출판사가 그렇듯 서점도 큰키나무와 작은키나무, 들꽃과 이끼가 어울려 공존하는 일종의 '생태계'가 유지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공산품 시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대형 서점들은 '노블레스'만 누리지 말고 '오블리주' 실천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노재현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