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 소외된 삶의 현장을 찾아서
박영희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4월
품절


(몽골 탄광의 아이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 차라리 천만다행처럼 여겨졌다. 설령 할 말이 있어도 한국의 내 딸과 동갑내기인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이샤와 술드몽크의 시커먼 얼굴을 보며 나는 한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빚을 내어 몽골을 떠난, 한국에서 만난 이주노동자들이 부러울 뿐이었다.-120쪽

(부안 사람들) 40여 년을 계화 갯벌과 함께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런 의문이 생겼다. 국가가 제시하는 미래와 갯벌지킴이가 내다보는 미래가 왜 이렇게 다를까 하는... 성형수술을 할 때와 하고 나서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뜯어고치긴 했는데 그 몰골이 너무 흉해 보였다.
"방조제 완공 이후 산 너머 산이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 산 너머 어딘가에 고통 받고 죽어가는 생명들이 바로 머잖아 보게 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취재를 다녀오고 1년이 지났다. 부안 군수가 항소심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착잡한 심정이다. 그보다는 어민들의 생계가 걱정이다.-134쪽

(탄광 사람들) 그런 그에게,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를 지키며 사는 병든 남편과의 세월을 물어 무엇하랴. 차라리 12만 명에 육박했던 태백시의 인구가 현재 5만 7000명(2004년 2월 당시)으로 추락해 버린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리라. 지금 태백에서는 그곳 인구의 절반이 넘는, 옛 광부의 아내들이 병든 남편을 먹여 살리느라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런데도 없다, 일할 곳이. 탄광들이 문을 닫으면서 형편이 기울대로 기울어 버린 태백시의 현주소는 그 도시마저 진폐증에 걸린 듯하다. 날이 풀리면 발품을 팔아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 보련만 간간이 불러 주던 식당들마저 자고 나면 문을 닫아 겨울나는 일이 고통의 연속이다.-152쪽

(탄광 사람들) 광산이 합리화로 접어들 무렵 나는 소리 소문 없이 일본에 갔었다. 그들의 합리화 이후 어느 곳에도 버려진 광부는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후생복지'라고 말했다. 광부들이 열심히 탄을 캐서 추운 겨울 국민들을 따뜻하게 살도록 했으니 그들의 이후 생활을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아내마저 도망을 가 버린 김창선 씨를 만나고 나오는 발길이 천근만근이었다. 진폐에 합병증 증세가 나타나지 않아 사랑의 도시락 한 개로 세 끼니를 때우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는 연민에 앞서 화가 치밀었다. 병원에 입원한 진폐환자들과 재가 환자들을 번갈아 만나는 도중에는 어떤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기도 했다. 내 눈으로 보아 집에서 치료를 받아도 될 환자가 병원에 입원해 있고, 병원에 있어야 할 환자가 집에 있었던 것이다.
광부들을 불러들인 그곳에 광부들을 쫓아내고 카지노를 지은 정부.
그 휘황찬란한 카지노 불빛 아래 병들어 떠나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진폐환자들.
기름과 물의 관계를 우리는 '비극'이라고 말하던가. 한국 탄광 70년의 역사를 안고 그들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157쪽

(진부장 사람들)
"이 무 보래요. 이 무는 이쁜 것도 1000원이고 못생긴 것도 1000원이래요."-174쪽

(전국의 빈민촌)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기초생활수급자는 150만 가구, 의료수급자는 180만 세대.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빈곤층만도 200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비수급 빈곤층과 잠재적 빈곤층을 합하면 우리 사회는 대통령의 발언대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빈곤층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 국민의 15퍼센트가 암보다 더 무서운 생계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236쪽

(대구 지하철 참사)
"엄마 숨이 막혀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무서워요. 아빠, 살려주세요!"
그리고 며칠 뒤 취재가 시작되었다. 모든 잘못과 죄를 두 기관사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을 때라서 기관사들의 입을 여는 일이 몹시 힘들었다. 아주머니들의 영정이 놓인 장례식장을 찾아갔을 때는 참담한 광경 앞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취재를 하는 동안 김순자, 김정숙, 정영선 씨 등 세 아주머니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다. 얼마나 열심히들 살다 간 이 땅의 어머니들인가. 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초라하고 비참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저 죽음은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개죽음'이라고!-277쪽

(소록도 환우의 시 <간호야, 비가 온다>의 일부분)
가을엔 지붕에 널린 붉은 고추만 봐도 내 피눈물 같고. 낸들 아무리 고통스러웠어도 어머니 가슴만 했을까. 병든 딸 안고 죽 떠먹이며 우시던 그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질 때면 어찌 그리 뜨겁던지... 지금에야 그 눈물이 피눈물인 걸 알았제.
소록도에 와서는 지나가는 배에서 들려오는 노랫가락에 또 눈물이 나고... 사람 맘이 그렇단다, 간호야. 그나마 간호들이 없었으면 외로워서 어찌했을꼬. 간호야, 얼른 얼른 시집가서 윤기 나는 대청마루에 앉아 애기나 어르고 살아야제.-285쪽

(소록도 천사 허옥희 씨) 물론 허옥희 씨가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몇몇 간호들처럼 자신도 손가락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몽당손에 호미를 붕대로 칭칭 동여매 농사짓는 한 한센인의 마늘을 먹고 있는데, 차마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것은 그분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해서였다.
"가서보니까 알이 굵은 마늘은 저한테 다 주시고 그 환우 분은 가장 보잘것없는 마늘을 잡수고 계셨어요. 순간 어찌나 죄스럽던지요. 이런 것 하나만 보더라도 소록도 환우들과 함께하려면 간호 역할만으로는 어렵습니다. 700명에 가까운 환우들 대부분이 가족이 없기 때문에 자식이 되어 주고 손녀가 되어 주어야 해요."-294쪽

(소록도 천사 허옥희 씨)
"한 번도 소록도가 직장이라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제 집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지만. 그동안 슬프고 아팠던 기억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감사한 기억들이 더 많아요. 하지만 우리 딸 '솔'이 하고 '강산'이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시댁 식구들하고 8년을 함께 살 때는 애들한테 많이 미안했어요. 외식 한 번 못했거든요. 그 다음은 잘 모르겠네요."
그러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올해 대학에 진학한 큰딸과 소록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딸이 제 엄마를 쏙 빼닮았다는 것을. 나도 소록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엿들은 이야기지만 자매도 엄마를 닮아 봉사를 우선에 두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눙이 감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는 성경을 읽어드리고, 숟가락질이 불편한 할머니에게는 음식이 뜨거울까 봐 호호 불어가며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 드리고, 청소하는 것마저 버거우신 분들한테는 방 청소를 해 드리고, 외로운 분들한테는 말벗이 되어 드리고... 자매는 그 일을 엄마 몰래 초등학교 시절부터 해 왔다고 했다.-301쪽

(소록도 천사 허옥희 씨) 허옥희 씨 집에 잠시 들러 커피 한 잔을 나누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전을 하다 말고 친구 녀석이 이런 얘기를 했다.
"친구야! 내도 교회 집사라는 직분 땜에 쪼매 봉사 좀 한다고 생각?는데 소록도 그 집에 가 보니까네 내는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와 그란 줄 아나? 그 간호사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더라."-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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