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항쟁 27주년 기념행사 전야제가 열리고 있던 17일 저녁 광주 금남로 인근의 한 커피숍.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69)가 절친한 사이인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들어섰다. 구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었다는 와다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7년 전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도 도청 앞 광장에 몰려나와 젊은 세대들에게 기억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그때 열기가 지금도 느껴지는 듯합니다.” 와다 교수는 광주의 경험이 한국의 민주화로 이어졌고, 이제는 그 성취가 아시아 민주주의와 평화로까지 이어질 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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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다 하루끼 교수는 17일 광주 금남로 한 커피숍에서 가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광주항쟁을 통해 경험한 민주화, 인권에 관한 생각을 아시아에 펴뜨려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광주/김영민기자 | 80년 5월 광주는 와다 하루키 개인에게 무엇인가. “나는 70년대부터 일본에서 김대중·김지하씨 구명운동을 하며 한국 민주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 전공이 소련사였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한국과 친하지 않았다. 1년간 소련 생활 후 79년 10월23일 일본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대중씨 등이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에 대해 무척 기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듬해 5월17일 전두환의 쿠데타가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됐다. 광주 소식을 들은 것은 5월20일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쿠데타군에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 내 동지들과 함께 지식인 15명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5월27일 ‘자유 광주’는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5월 광주를 지켜본 소감을 ‘자유 광주’라는 주제로 ‘세카이(世界)’ 7월호에 썼다. 그걸 계기로 한국 관련 논문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의 연구는 한국 현대사로 본격 전환됐다. 5월 광주는 내 공부의 물줄기를 바꿨다.”
-27년이 지나서 5월의 광주에 온 느낌은.
“위험 인물로 찍혀 한국 입국을 계속 거절당하다 90년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 연구를 하려 해도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기에 사실 한국의 맨 얼굴이 무척 궁금했었다. 광주는 이번이 두번째다. 지금은 80년 당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고들 한다. 지금 젊은 분들에겐 그때 당시의 열정이 없지 않을까 예상도 했다. 하지만 오늘 거리를 거닐며 5·18 행사 전야제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 도청 앞 광장에는 그 당시 일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은 분들이 많이 참여하셨더라. 그렇게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민중가요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봤던 당시 광주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5월 광주’ 내 학문 물줄기 바꿔-
-광주 이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평가한다면.
“민주화라는 것은 노태우 정권이 직선제를 수용할 때까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피 흘리며 싸워온 결과였다.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민주화가 무르익어 왔다고 본다. 나는 그것이 ‘민주 혁명’이었다고 부르고 싶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최근 10여년간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흐름 속에 뉴라이트 열풍 같은 현상도 일어났다. 많은 진보·개혁세력들의 노력과 고민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형태는 훌륭하게 갖춰졌다. 그러나 그 틀 안에서 내용이라는 것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생각할 때가 됐다. 사실 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지 않나. 12월 대선 때에도 이 점이 가장 큰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지금 한국 정치를 이끄는 분들이 이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분들은 민주주의의 틀을 다시 짜는데 좀더 집중해야 한다.”
-광주에서 태동한 인권의 가치가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흘러넘칠 수 있으리라고 보나.
“아시아 국가에서는 각각의 민주화운동이 존재해 왔다. 필리핀의 혁명, 타이·미얀마의 민주화 운동 등.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것이 한국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 네크워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 경험해온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해온 행동들을 아시아 네트워크를 통해 각국에 퍼뜨리는 것이 한국의 책임임을 알아야 한다. 단 그 방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라는 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거다.”
-한국사회는 그간 먹고사는 문제에 치중하느라 그랬는지 아시아에 대한 기여를 제대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한국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로서 힘든 시기를 겪었고, 뒤늦은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급속도로 경험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여러 측면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렇다고 거만해 하거나 뽐내서는 안된다. 아시아를 향한 한국의 역할은, 한국의 경험을 아시아의 어려운 국가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또 설득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네트워크를 통한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한국은, 북한을 먼저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나라에 앞서 한국의 경험을 북한에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북한 상황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하고, 북한의 성공을 바탕으로 아시아에 눈길을 돌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 마침 56년간 막혀있던 남북한 철로가 뚫렸다. 한반도의 화해 분위기를 어떻게 보나.
“‘자유 광주’에서 시작한 민주 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대북정책의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약속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비록 부분적인 개통이긴 하지만 역사적인 성과다. 햇볕정책 이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음이 확인됐다. 설사 한나라당이 집권하더라도 이제 대북정책은 돌이킬 수 없다. 6자회담은 문(門)과 같다. 그 문을 열면 방 안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그런 문이다. 그런 미래의 모습이 그려져야 한다. 지금 그런 분위기가 어느 정도 연출되고 있지 않나 한다.”
-‘한국 진보 위기’ 대선 화두둬야-
-동아시아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동아시아 지역만큼 전쟁투성이인 지역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1894년(청일전쟁 시작)부터 1975년(베트남전쟁 종전)까지 80년간 부단히 전쟁을 계속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은 단순히 평화롭다는 말로는 만족할 수 없다. 화해하지 않으면 공생할 수 없다. 가해자는 사죄하고 희생자의 슬픔과 아픔은 치유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과정에 ‘두 개의 코리아’(남북한)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본다. 우선 한국은 지난 30년간 노력으로 민주혁명을 이룬 역량을 갖고 있다. 또한 한국은 북한을 설득하고 이끌어 내는 열쇠를 갖고 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북한을 끌어들이고 안나오면 불러들여서 아시아 평화로까지 이어지도록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동아시아 공동의 집’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시는데.
“95년 ‘창작과 비평’에 ‘동북아 공동의 집과 한반도’라는 제목의 글에서 비롯됐다. 그때는 학자 개인적인 발상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정치적으로도 그 때가 무르익었다고 본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담에서 장기적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동북아 공동의 집’은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기능할 수도 있고, 동시에 북핵문제 공동대응이 동북아 공동의 집 형성에 기여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 공동의 안보, 공동의 성장, 공동의 환경보호, 공동의 복지를 추구할 때가 됐다.”
-‘동아시아 공동의 집’에서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
“6자회담에는 미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고, ASEAN+3에는 미국이 빠져 있다. 미국은 사실상 ‘동북아 공동의 집’에 들어와 있지만, 동아시아 공동의 집에는 들어오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미국이 빠져있는 상태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무언가를 도모하기보다는 미국을 끼워서 함께 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한다.”
-일본의 역할은.
“일본은 납치 문제의 함정에 빠져버린 상태여서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우경화도 강화되고 있어 동아시아 평화에 협력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일본의 지위가 있긴 하지만 일본 정부는 어떤 역할도 못할 것이라고 본다.”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도 일본 시민사회에서 일·북 수교운동을 벌이고 있고, 예전부터 남한의 시민사회와 교류를 해오고 있는데 번번이 느끼는 점은 일본 사람들은 아직 한국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는 거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 먹는 것에 대해 애정을 많이 갖고 있다든지 등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주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일본 이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간격을 좁히는 데서 시작했으면 한다.”
〈광주|손제민기자〉
-와다 후루키?-
와다예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성으로 평가받는다.
오사카 태생으로 1960년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한 뒤 66년부터 강단에 섰다. 전공은 소련사 및 북한 현대사. 공산권에 대한 연구, 반전, 인권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성과는 군사정권 시절의 한국에서 한때 판매금지되는 등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 민중과 연대해 민주화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특히 70~80년대에는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김대중, 김지하씨 등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98년 정년 퇴임한 뒤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통칭 아시아여성기금) ‘북·일 국교촉진 국민협회’ 활동을 통해 일본의 전후 보상 문제, 민간차원의 북·일관계 정상화에 일조하고 있다. 저서로는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조선전쟁 전사(全史)’ ‘일본, 한국, 북한-동북아’ 등이 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