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출판사를 찾아서 (1)]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세상을 연다
‘또 하나의 문화’와 페미니즘
여성 3명이 이끌어가는 여성전문출판사… "남녀차별 아닌 차이 인정하는 사회 됐으면"

▲ '또 하나의 문화' 유승희 사장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홍익대 방향으로 가다 골목길로 접어들어 꼬불꼬불 찾아가니 다가구 주택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싱크대가 눈에 띈다. 한편에는 설거지를 끝낸 그릇이 수북이 쌓여있다. 설거지통 밑에는 냉장고, 가스불 위엔 국그릇이 보인다. 그 옆엔 전기밥솥이다. ‘여기 출판사 맞아?’ 의아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정쩡하게 있자니 “이쪽으로 앉으라”며 자리를 안내한다. 주방 식탁이었다. 집주인, 아니 사장 유승희(44)씨는 맨발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초경파티’ ‘우리 몸 우리 자신’ 등의 서적 홍보 포스터가 아니라면 이곳이 출판사란 사실을 알 수 없을 만큼 가정적이었다.

페미니즘 전문출판사 ‘또 하나의 문화’. 여성운동의 산실답게 가정집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탈식민지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등 여성에 관한 책 60여종을 발간한 경력 20년의 중견 전문출판사다.

“사무실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유 사장이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희가 하는 일에는 가정적인 분위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계속 주택을 빌려 사무실로 사용해왔어요. 일반 사무실보다는 아무래도 관리가 쉽고, 신발을 벗고 일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요. 점심을 직접 지어먹으니까 단란해서 좋고요. 관리비가 적게 드는 이점도 있으니까요.”

‘또 하나의 문화’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모두 3명. 사장인 유승희씨, 홍보를 맡고 있는 김효진씨, 영업을 맡고 있는 고진숙씨가 그들이다.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답게 식구들은 모두 여성이다. 복층으로 된 가정집 2층엔 ‘언니 네트워크’라는 젊은 페미니스트 운동단체가 자리하고 있다.

“여성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구조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의도적으로 남자를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들로 식구가 이뤄지게 됐네요. 하지만 남성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자주 좀 찾아주셨으면 좋겠는데….”

‘또 하나의 문화’는 “처음엔 단순한 소모임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성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보다 많은 사람과 나눠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안희옥, 고정희, 조혜정, 조옥라, 정진경 등의 동인들이 참여했지요. 저마다 조금씩 종자돈을 내서 일종의 대동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600만원을 마련했어요. 딱 한 권밖에는 낼 수 없는 자금이었어요. 그 돈으로 1985년 발간한 첫 책이 ‘주부, 그 막힘과 트임’이었습니다.”

유 사장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엔 안희옥씨가 출판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는 프리랜서 동인으로 가톨릭 사회운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죠. 처음 낸 책이었지만 ‘주부, 그 막힘과 트임’의 반응이 괜찮아서 3판까지 찍게 됐어요. 그러니까 책 두 권을 더 낼 수 있는 돈이 생긴 거죠. 그걸 밑천 삼아 ‘새로 쓰는 사랑 이야기’와 ‘새로 쓰는 성 이야기’ 이렇게 두 권을 더 냈어요. 이 책들의 반응 역시 괜찮아서…,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계속하게 된 겁니다.”

“기획 출판에 큰 의미 안둬”

출판사업을 하다 보면 ‘베스트셀러를 내고 싶다’는 욕망을 배제할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동안 ‘또 하나의 문화’에서 낸 책들을 살펴보면 대중적 인기를 겨냥하고 낸 것으로 보이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출판세월 20년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 4만부(탈식민지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라니 상업성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저희는 나름대로 ‘책을 쉽게 내지 말자’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어요. 시장성이 높은 것을 기획하고, 타이밍에 맞춰 책을 내고, 그 책을 홍보해서 매출을 올리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솔직히 ‘한방’에 대한 유혹이 전혀 없진 않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대중서보다는 꼭 필요한 책을 내자는 것이 확고한 저희 생각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연매출액은 1억7000만원 규모. 인건비와 유지비 종이값 등 제반 비용을 제외하면 새 출판물을 내면서 회사를 꾸려가기에 빠듯한 매출이다. 유 사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은 사회가 전반적으로 다 어려우니까, 저희는 당분간 현상유지에 주력하려 합니다. 경제사정이 지금보다 더 안좋아져서 현상유지도 어렵게 된다면…, 글쎄요, 동인들하고 상의해봐야겠지만, 그럴 경우엔 우선 비용부터 좀 더 줄여야겠지요. 지금도 비용을 최소로 줄인 상태이긴 하지만….”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유 사장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싱글. “1993년부터 ‘또 하나의 문화’에서 출판을 맡았다”는 그에게 “결혼과 출산의 경험이 없는 입장에서, 임신·육아·이혼·성(性) 등에 관한 책을 낸다는 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하진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를 낳아본 사람만 육아에 관한 책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종합하기엔 오히려 객관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의 경험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여성에 관한 이론적·학술적 교감을 갖는 월례논단을 기획하고 있어요. 12월엔 여성과 관련된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또 하나의 문화’가 관심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여성의 건강문제. 이번에 새로 낸 ‘우리 몸 우리 자신’이란 책은 그들의 관심이 집약된 결과다. “책은 여성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보스턴의 여성운동단체들이 낸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30년간 해를 거듭하며 변해온 의료시스템과 여성의 건강에 관한 제반사항을 정리한 일종의 백과사전이지요. 회원으로 있는 자원활동 여성들이 4년 동안 번역한 것을 수차례 고치고 수정해 완성했습니다. 미국의 통계에 우리 통계를 덧붙이고 장애인과 동성애 같은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추가했습니다.”

유 사장은 “의료시스템은 아직까지 공급자 중심으로 돼 있는 것이 많다”며 출산을 사례로 들었다. “누워서 아이를 낳으면 무척 힘이 듭니다. 산모를 눕게 한 것은 아이를 받는 의사를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이지요. 저희는 이와 같은 생활 속의 문제부터 하나씩, 차츰차츰 개선해보려고 합니다.”

‘생활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그들의 생각은 음식쓰레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지렁이를 키워 음식쓰레기를 분해,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는 노란색 비닐봉투를 사용하지 않아요. 음식쓰레기를 지렁이가 있는 화분에 버리면 자기들이 알아서 깨끗하게 분해해주거든요. 음식을 많이 남기지도 않지만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유 사장은 “사회변화는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작은 것부터 하나씩, 차츰차츰 바꿔가는 것이 ‘또 하나의 문화’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출판사업과 함께 어린이 청소년 교육, 다음 세대 여성운동을 이끌어갈 후배 육성 등 장기사업도 함께 펼쳐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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