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출판시장에 지각변동의 조짐이 보인다. 진원지는 프랑스인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출판시장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앞으로 그 움직임과 여파가 어디에 어떻게 미칠지에 대해 벌써부터 세계 출판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2월 6일, 프랑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셰트 리브르(Hachette Livre) 출판그룹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인 아르노 누리(Arnuad Nourry)는 미국 출판시장에서 6%를 점유하고 있는 타임워너 계열 출판그룹인 타임워너 북그룹(Time Warner Book Group) 인수합병을 공식 선언했다. 인수액은 5억3750만달러(약 5000억원). 이로써 아셰트 리브르는 랜덤하우스와 스콜라스틱을 각각 4, 5위로 밀어내고 피어슨과 맥그로힐 출판그룹에 이어 매출규모 세계 3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타임워너 북그룹은 그간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빌 게이츠의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그리고 최근 대형 베스트셀러인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냈고, 2005년에만 69개 타이틀의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그룹으로 연 매출규모 세계 21위에 랭크됐다.
타임워너 북그룹은 세계적으로 온라인 출판시장의 붐이 일던 수년 전 아메리카온라인(AOL)과의 전격적인 합병으로 온라인 시장에서의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나, 기대와 달리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결국 AOL과 결별했다. 이어 타임워너 북그룹은 매각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간 대형 출판그룹으로부터 몇 차례의 입질이 있었으나 선뜻 사겠다는 곳이 나서질 않아 그냥 몇 해를 보내다가 이번에 임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타임워너 북그룹의 회장 데이비드 영(David Young)은 앞으로 아셰트 리브르 미국(Hachette Livre USA)의 ‘좌장’을 계속 맡을 예정이며, 아셰트 리브르의 회장에게 모든 업무를 보고하게 됐다. 타임워너 북그룹의 직원 800여명은 부서장에서 일반 실무담당자까지 본인이 이동을 원하지 않는 한 인원변동은 없다. 하지만 그룹 사무실은 현재 뉴욕 맨해튼에 있는 ‘타임 앤 라이프’ 빌딩에서 나와 다른 곳에 둥지를 틀 가능성이 높고 회사 이름도 새롭게 모색 중이라고 알려졌다.
아셰트 리브르는 파이야르, 그라세, 스톡 등 다수의 유명출판사를 거느린 프랑스 최대 규모의 출판그룹으로 각종 잡지와 유통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미디어그룹 라가르데르(Lagardere) 산하에 있다. 또 아셰트 리브르 그룹은 프랑스 외에도 스페인의 아나야(Anaya) 그룹, 영국의 호더 헤드라인(Hodder Headline) 그룹 등 거대 출판사를 폭넓게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거대 출판사를 본격적으로 경영한 적은 없다. 다만 1988년 4억5000만달러에 그롤리어(Grolier) 출판그룹을 사들였다가 2000년 스콜라스틱에 팔아넘긴 경험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출판시장에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타임워너 북그룹을 사들이기 전에 미국 최대 출판그룹 중 하나인 사이먼 앤 슈스터(Simon & Schuster)에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수액이 10억달러 수준으로 오르자 분석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포기했다. 이후 거래 조건의 부담이 덜하면서 미국 출판시장에서 견실한 실적을 유지해 오고 있는 출판사를 물색하다가 이번에 전격적으로 타임워너 북그룹을 사들인 것이다.
2004년 영국 출판사인 호더 헤드라인 그룹을 4억달러에 사들인 것에 이어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에 100여명의 직원이 일하는 지사까지 두고 있는 타임워너 북그룹을 사들인 아셰트 리브르의 목적은 유럽권역을 넘어 세계 출판시장으로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있다. 그 교두보가 바로 영어권은 물론 세계 출판시장의 관문으로 불리는 미국 시장으로의 진출이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그들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다. 아셰트 리브르 미국의 회장인 데이비드 영이 인수합병 합의 회견문에서도 밝혔듯이 향후 2년 안에 미국의 유력한 출판사를 몇 개 더 인수하겠다는 계획 또한 내놓고 있어 몸집 불리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 출판시장은 갈수록 거대화되고 있다. 이제 국경도 언어도 경계가 되지 않는다. 세계인이 모두 독자이고, 세계 시장이 전부 출판 영업의 장이다. 한국 출판시장에도 랜덤중앙처럼 이미 해외 출판사의 자본이 유입됐고, 그런 출판사와의 경쟁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웅진씽크빅이나 위즈덤하우스 등 몇몇 한국 출판사도 점차 대형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개성과 특징을 갖추지 못한 소규모 출판사는 점차 그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검고 두툼한 뿔테 안경을 쓴 편집자들이 난로 주위에 모여 기획회의를 하던 소규모 출판사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풍경을 발견하기는 정말 힘들다.
<이구용 출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