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대외개방은 인정, 연대로 양극화 메우자
[사회개혁위기 대안모델을 찾는다] ⑤ 신진보주의 국가론
한겨레 한승동 기자
» 신진보주의 국가론은 2005년 7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의 의뢰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2007년 1월에는 체계를 다듬어 <한반도경제론>이란 단행본으로 묶어내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2003년 6월19일 참여정부 들어 첫 정책기획위원회 회의 모습으로, 기사에서 다룬 논의가 있기 이전 시점이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신진보주의는 명칭 자체가 기존의 진보주의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신’이란 수식어로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진보주의와 대비되는 보수주의나 역시 기존 보수주의에 거리를 두려는 신보수주의와도 다를 것이다. 신진보주의가 우리 사회 담론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이후의 일이다.

그 출발점은 정부가 발주한 연구 프로젝트였다. 지난해 6월에 나온 계간 <동향과 전망>(한국사회과학연구소·박영률출판사) 여름호(67호)와 올해 1월에 출간된 <한반도경제론>(창비)에 따르면, 2005년 7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개방화에 대한 대안 연구를 위해 모인 다양한 전공의 ‘동아시아-한반도경제연구회’(나중에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로 확대개편) 소속 학자들에게 국가전략(참여정부 핵심담론) 연구를 의뢰했다. 넉 달 동안 13명의 학자들이 거의 매주 모여 “한국의 정치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현실에 부합하는 국가전략의 비전에 관한 공동연구”를 수행했고 그 결과는 그해 말 정책기획위원회에 제출됐다.

연구자들은 당시 “새로이 추구하는 경제이념의 기초를 ‘신진보주의’라 명명”했다. 신진보주의는 그 뒤 포괄적인 발전모델, 한반도 발전전략 구상으로 심화, 확장돼갔다.

‘혁신’은 성장 동력으로 ‘연대’는 공동체적 가치로
양자 충돌은 수평적 네트워크 ‘개방’으로 조정
궁극적 지향은 ‘개방형 남북통합 민족경제국가’

민주화 이후 민주개혁 진영의 위기는?=<동향과 전망> 67호에 ‘신진보주의 발전모델과 민주적 발전국가의 모색’을 쓴 조형제 울산대(사회학), 정건화 한신대(경제학) 교수와 이정협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원(경제지리학)에 따르면 신진보주의는 보수주의의 반대편에 위치하면서 진보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들은 진보주의 세력이 민주화를 쟁취했고 분배, 복지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제기해 일정 정도 관철시키는 성과도 올렸다고 본다. 하지만 냉전체제 붕괴, 국민국가의 약화, 환경파괴 등 다원화하고 복합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를 대체할 대안 찾기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또다른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멤버인 전병유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병진 창원대 교수(국제관계학과),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어중국학과)는 <한반도경제론>에서 민주개혁진영의 위기는 정책상 위기를 넘어 담론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현재 한국사회 담론과 제도적 규칙에서 헤게모니를 쥔 쪽은 보수주의적 정치담론과 지배질서다. 과거 박정희식 발전주의 모델의 온존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결합되어 미국 중심주의, 시장 중심주의, 성장주의, 경제주의, 기업주의, 갈등없는 통합, 엘리트 주의 담론이 지배하는 질서가 성립되었다. 민주개혁 정부는 단순히 정책의 구상과 집행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런 보수주의적 담론구조 극복에 실패한 것이다.” 이들은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소수 재벌 및 외국기업들 헤게모니에 종속된 ‘기업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고 우려한다.

» 이정협 / 조형제 / 정건화 교수
대안 담론의 체계=이런 신자유주의·보수주의적 질서에 맞서는 대안적 담론의 핵심으로 이들은 “역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공공성(dynamic republic)이 작동하는 사회경제 질서” 창출을 들고 있다. ‘역동적 공공성’은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 식으로 표현하면 “성장과 분배를 아우르는 진보적 이념”이다. “기존의 진보가 연대를 강조하면서 발전담론을 경시하고 연대와 대척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진보도 연대뿐만 아니라 성장전략도 강조하면서 둘의 관계를 경쟁 혹은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지 말 것을 제안하는 것이 신진보주의가 아닌가 한다.” 이를 신진보주의가 ‘중심가치’로 내세우고 있는 ‘개방, 혁신, 연대’를 활용해 얘기한다면 “혁신과 연대의 가치가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가 된다. 이는 기존의 진보주의와 다른 부분이다.

신진보주의에서 연대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적 가치 실현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개방과 경쟁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잔여적인 가치가 아니라 사회발전의 기본원리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다. 혁신은 사회를 정체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부단히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성장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회발전, 경제성장을 추진해가는 원리이자 동력, 그리고 개혁의 추진력이다. 혁신은 경쟁을 부르기 마련이고, 경쟁은 불평등과 독점을 불러 연대의 기반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크다. 이 혁신과 연대의 충돌을 완화하는 가치가 개방이다.




신진보주의에서 개방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자신의 폐쇄된 구조에 매몰되지 않고 열린 자세로 타자와 협력해가는 방법론적 원리다. 이는 모든 것을 내부화하여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기존 발전모델의 한계, 예컨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이나 중앙집권적 위계의 발전국가 등 한국사회 주요 행위자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닌 문제들을 혁파하고 수평적 네트워크를 실현한다. 그리하여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를 완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는 분권과 지방화를 실현하며, 거버넌스를 형성해 구성원들의 참여와 복지를 증진시킴으로써 혁신과 연대 효과를 낳는다. 개방은 또 문을 여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대외 개방, 세계화, 시장확대로 이어지는 이 부분도 기존 진보주의와는 다르다.

신진보주의 발전모델은 이 ‘개방, 혁신, 연대’를 한국 사회의 중장기적 발전을 지속하기 위한 중심가치로 삼고 이를 대외관계, 국내경제, 고용복지 등 각 영역의 국가 하위시스템에 적용한다. 이로써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토대로 한 개방형 남북한 통합 민족경제, 동북아시아 지역 네트워크형 복합공동체(한반도-동아시아경제)를 창출한다.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되게 만드는 틀,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이 ‘민주적 발전국가’다. 민주적 발전국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정당정치 강화 차원을 넘어 ‘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한데, 그 핵심은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연관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 대의제 민주주의의 결함을 시정하고 보완하는 결사체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와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통해 사회집단들을 공적인 의사결정 영역에 참여시킨다. 이는 생산성 연합과 분배 연합을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다.

안병진은 노 정권과 여당은 보수주의적 공동체 자유주의 비전에 가깝고, 민주노동당은 실패한 북한에 온정주의적이고 시장의 혁신적 기능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본다며 21세기적 진보라 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광범위한 사회혁신과 공공성이 양립하는 공화주의적 모색이 필요하다고 봤다. 양재진은 민주적 발전국가를 위해서는 의석배분을 정당투표 지지율대로 하고 지역구 투표는 당선자 순위 정하기 의미만 갖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했다.

» 신진보주의 모델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계와 보완할 점
신우파와 다른 점 뭔가

혁신과 연대 양립하려면 구체적 정책으로 나와야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동향과 전망〉 67호 좌담에서 이 담론을 두고 “신우파(뉴라이트)에서도 개방·혁신· 연대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이라고 주장할 것 같다”며 신진보주의 중심가치인 개방·혁신·연대를 도대체 ‘신진보’라 부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시했다. 심지어 연대의 가치까지도 강조하는 신우파인데, 개방·혁신·연대 세 가지가 모두 진보와 진보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엔 너무 미흡하다, 변별력이 약하다는 지적이었다.

신진보주의 모델 입안자의 한 사람인 정건화 교수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신진보와 신우파 간에 가장 크게 다른 점이 ‘국가의 역할’이라며 신우파 주장처럼 국가의 역할을 시장이 대체하기 어렵고, 성장 잠재력을 유지하고 장차 통일을 감당해야 할 우리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이 밖에 신진보주의의 ‘성장’ ‘발전’ ‘혁신’ ‘경쟁’은 신보수주의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학)는 연대와 발전은 상충되는 개념이라며 연구팀이 지향하는 발전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아 궁극적인 지향점, 국가 개념, 국가 역할 등을 상정하는데 혼돈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 ‘혁신과 연대가 양립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연구팀의 생각과 개방이 그 양자의 충돌을 완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좀더 정교한 이론화 작업과 함께 실천 가능한 구체적 정책으로 다듬어져야 설득력이 커질 것이다. 김양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원(경제학)은 신진보주의와 진보주의의 차별성이 확연하지 않다면서도 개방의 가치를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했으나 “현실에서 이 세가지(개방·혁신·연대)가 동시에 작동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역시 현실정책들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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