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가면 모든 게 넓다. 그리고 땅은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냄새를 맡게 하며,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늘 숨기고 있다. 걱정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포마저 감추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밖의 광활함만이 아니다. 우리 안의 텅 빈 공간은 더욱 헤아릴 길이 없다.-22쪽
나중에라도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느끼기 위해, 나는 방치되고 버려진 상태의 극한점까지 자발적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하면 나 역시 점점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을 겪고 나면 삶은 더욱 큰 선물처럼 여겨진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걸맞게 다시 태어난 존재이기 위해 나는 계속 극한을 향해 걸어간다. 설령 밖에서 보면 그 한계에 끝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나는 또다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에 서 있었다. -43쪽
우리 인간들은 늘 이동해야만 하는가? 아니면 가능한 한 장소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가? 드디어 침낭 속에 누워 이 밤에 두 번째로 잠들려고 애쓸 때 이런 의문이 들었다. 빌뇌스의 팔텐 농장 농부들이 다섯 또는 여섯 세대 전부터 머물렀던 것처럼 살아야 하나? 늘 자기들의 농장에서? 아니면 다른 게 더 나을까? 이곳 고비 사막에서처럼? 고비 사막에서는 유목민 가족들이 씨족별로 함께 생활하며, 초원에서 초원으로 계속 이동한다. 유목민들은 21세기인데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수천 년 전부터 해 온 생활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들은 부질없다. 우리들 모두 나름대로의 사회화의 영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길을 좇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막에서도 마찬가지다.-61쪽
내 방식대로 여행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진부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자식들이 대학 공부를 마칠 때쯤이면, 내가 여든 살이나 아흔 살까지 구경할 수 있는 것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인류의 의사소통이 갈수록 빨라지는 것처럼 여행도 점점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은 육체적인 움직임과 점점 더 무관해질 것이다. 오늘날만 해도 지구의 거의 모든 구석을 실제로 걷지 않고도 방문할 수 있다. 혼자 방치되거나 위험하거나 무척 힘이 드는 여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수록 피하고 있다. 스스로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온갖 위험 가능성을 대비해 보험도 들 수 있는 세상이다.-123쪽
기력이 바닥났을 때가 어떤지 나는 알고 있다. 또다시 녹초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 오르막길이 끝없이 뻗어 있었다. 여행 때문에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실망은 어쩌면 지나친 자신감과 연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것을 매번 다시 배워야 했다. 지나친 자신감은 좌절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모든 좌절은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너무 먼 구간을 걸었을 뿐이다.-220쪽
유목민들은 어디서나 배제되고 있다. 아무도 유목민들을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몽골에서조차 유목민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몽골인들은 오히려 유목민들과 그들의 생활 방식을 부끄러워한다. 원시적이고 시대에 뒤져서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몽골 사회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나는 유목민들과 함께 있을 때 안전했다. 오히려 도시에서 살 때는 그렇지 못하다. 고비 사막을 돌아다닐 때 나는 행운에 기댄 적이 없다. 우리 모두 사막에서 독자적으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존재이기에, 수도 없이 많이 느끼는 두려움과 싸워 행복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함께 나누는 법을 가르쳤다. 공감은 결국 불안을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나누면 모두가 행복해진다.-23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