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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
유현종 지음 / 행림출판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천편일률적이고 위정자 중심인 우리의 중고교 역사 교사서와 입시위주의 역사교육의 병폐...
일일이 열거하기 입아프고 손이 아플지경이다.
요즘 개편된 역사교과서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세대가 '동학운동'에 대해 배우고 알고 있는 한계도 그 병폐의 하나이다.
나는 5년전 '한국근현대사'라는 한 교양과목을 '외롭게' 수강한바 있다.
(취업학교가 되어버린 대학에서 약삭빠른 학생들이 이런 교양과목을 멀리하는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어떤 책에 열거된 자신이 존경하는 한 유명인 골라 그의 '전기'를 작성하는 것과,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중에 내가 가장 관심가지고 있던 영화파트의 '장 뤽 고다르'를 선택했었다)
자신의 '역사'를 쓰는 것 등의 과제를 주곤 했던,
지금은 성함도 기억할 수 없는 386세대 교수(?)는 매우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덕분에 나는 괘변의 레포트로도 A+을 받을 수 있었던 수업이었다)
그 수업은 나를 대책없이 무장해제 시키고 수업중간에 눈물을 터뜨리게 하기 일쑤였다.
동방공직 여직공의 노동운동이나, 전태일 분신사건을 비롯하여
어린 남매가 유괴당하거나, 길을 잃거나, 교통사고를 당할까 두려워
단칸방 안에 밥상을 들여놓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을 가야 했던
어느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아이들은 해가져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성냥갑을 가지고 놀다 불이 나고
부모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잠긴 방 안에서 새까맣게 재가 되어있었던 사건이다.
교수는 초등학교와 유치원 아이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린 그림들을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한시간 내내 보여주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 격렬하게 울음을 쏟기도 했다.
그리고 동학운동이 있었다.
그 수업을 통해서 새롭게 접근한 동학운동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그 결과와 의의 등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충격과 감동에 휩싸였었다.
동학운동, 아니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유현종 작가의 역사소설 <들불>은
나에게 5년전 충격과 감동을 다시 안겨주었다.
동학을 믿고 반란을 일으킨 아버지 때문에 노예로 팔려간 '여삼'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들불>은
기독교를 앞세운 서양세력과 청일의 이권다툼,
굶어죽는니 싸우다 죽겠다는 빈농들의 동학합류,
한때 여삼을 계몽시키려던 친구 곽무출의 변절과 친일,
양심있는 지식양반층의 각성과 한계,
동도장군 전봉준과 김계남, 손화중과 같은 우리 민중의 진정한 영웅들의 기개와 지혜,
대원군의 유배와 재집권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움직임 등이 역동적으로 스며든 작품이다.
무지하고 타율적이며 소극적이던 여삼이
'사람이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다'는 동학의 '인내천'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굶어죽은 여삼의 어머니나 이리저리 노리개로 팔려다니다 목을 메는 여삼의 누이의 기구한 운명은
당시 격변하는 새태 속에 여성들의 위치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태조왕건'이나 '이순신', '주몽'이 다가 아니다.
<칼의 노래>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반면, <들불>과 같은 명작은 잊혀져간다는 것이 통탄스럽다.
의식있는 방송인이나 영화인이 나서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동학운동 관련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순신'에 열기를 조장하는 여론뒤에 군부정권과 독재정권, '힘의 논리'를 지지하는 흑심이 있음을,
오랫동안 진보지식인들이 지적하고 경계해온 바 있다.
우리는 오로지 '동학운동'과 같은 민중의 지혜와 저항, 투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일방적 흑심에 균형을 이룰 수 있을것이다.
2007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