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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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쿠이 도쿠로, 이기웅 역, [후회와 진실의 빛], 비채, 2012. 

Nukui Dokuro, [KOKAI TO SHINJITSU NO IRO], 2009.

제23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인생에는 연습이 없으므로 하루하루가 결승전이고 승부처이고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인생은 항상 더 나은 삶을 바라보고 욕망에 사로잡혀 살기에 후회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학교 다닐 때에 조금만 더 공부했더라면, 첫사랑에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진로를 선택할 때에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을까? 누쿠이 도쿠로의 [후회와 진실의 빛]은 연쇄 살인을 해결해가는 형사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은 경찰 조직-연쇄 살인-트릭과 반전을 통하여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미스터리 구조 속에 '후회'라는 인간 내면의 심리와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는 여성. 잘려 나간 집게손가락. 난도질한 칼. 여성을 덮쳤으리라. 격렬한 통증. 목숨을 빼앗긴다는 원통함. 그런 느낌들이 마치 자기한테 일어난 일인 양 온몸을 휩쓸었다.(p.10)

 

  살인사건 조사에 중요한 요소는 현장, 감별, 유류품 이 세 가지다. '현장'은 탐문에 의한 수사, '감별'은 피해자와 관련된 데이터 수집, '유류품'은 증거물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를 담당하는 각각의 팀 외에,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조사하는 역할로 '특명'이 존재한다. 수사본부에 투입된 인원은 이 네 가지 임무에 배당된다.(p.59)

 

  어느 겨울밤, 도쿄의 한적한 곳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순찰하던 관할 파출소 경찰에 의해 전신이 난자되어 피범벅으로 쓰러진 여성이 발견된다. 기동수사대는 현장 주변을 탐문하고, 사건의 심각성으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어 경시청 수사1과 형사들이 투입된다. 세부적인 분담으로 시신의 부검과 유류품에 대한 정밀 감식이 이루어지고, 피해자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수집된다. 특이한 사항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절단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선 맨 처음에는 '단지(斷指) 살인마'라는 정통적인 이름이 제안됐다. 그러나 '단지'라는 말에 실린 목가적인 울림 때문에 얼빠지게 들린다는 댓글이 다수 달리며 각하되었다. 이후로도 '도쿄 난도질 살인마 잭'이라든가 '인체 절단 살인마', '토막 살인마' 등의 이름이 게시판을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어느 것이나 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다가 하나, 시선을 끄는 게시물이 있었다... 그 이름은 '손가락 수집가(蒐集家)'였다. '수집'에 '收集'이 아니라 구태여 '蒐集'이라는 글자를 가져다 쓴 점에서도 세련된 센스가 느껴졌다.(p.213)

 

  감상의 즐거움을 맛본 이후로는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이 더는 허명이 아니게 되었다. 이름 따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을 지어 준 이에게 지금은 감사했다.

  이제 이렇게 되고 나니 역시 더 갖고 싶었다. 겨우 세 개만으로는 수집이라 하기 힘들다.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손가락 세 개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손길을 쉬어서는 안 된다.(p.402)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또다시 손가락이 절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언론은 낌새를 알아채고 수사 공개를 요청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중에 희생자와 관련된 유력 정치인은 압력을 행사한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는 사건의 글이 게시되고, 심지어 '손가락 수집가'라는 호칭과 함께 다음 범행이 예고된다.

 

  작품은 '경찰소설'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주민 신고가 들어오면, 관할 파출소로 연락되어 경관이 순찰한다. 사건이나 범행이 발견되면 현장은 즉시 통제되고, 기수대가 신속히 투입되어 목격자를 확보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몇몇 관리관은 현장을 점검하고 그들의 판단으로 수사본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특별'이나 '합동'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특별수사본부는 경시청 수사1과에서 나온 형사와 기수대 또는 관할 경찰서 형사가 2인 1조로 편성되어 세부적인 분담이 이루어지고, 각각의 임무를 통해서 수집된 단서는 수사회의를 통해서 하나로 조합된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수사의 방향을 수정하고, 추리하는 이러한 과정이 매우 세밀하여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를 잃고, 불구가 된 아들을 안고 망연자실해 있던 와타비키를 구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도 언젠가는 늙는다. 이제는 다이키를 쉽게 안아 주지도 못한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우미의 힘을 빌려야 하리라. 다이키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이 낡은 집도 뜯어고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

  출세하고 싶다. 와타비키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추태도 마다하지 않고 출세를 갈망했다.(p.53)

 

  어떡하다가 이런 관계가 되어 버린 걸까. 지금까지 수없이 되뇌어 온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사이조는 결혼한 후로 가능한 한 아키호의 바람을 이뤄 주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매일 일찍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키호는 남편이 집에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출세, 안정적인 수입, 그리고 남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근사한 남편. 아키호가 사이조에게 바란 것은 이 세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결혼 당시부터 아키호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을 이어 가는 사이 어느샌가 아키호의 바람은 그 세 가지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이조와의 결혼 자체가 아키호를 바꿔 버린 원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수없이 고민해도 아키호와의 결혼은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러, 사이조는 우울해졌다. 그 유일한 결론을 애써 외면하며 지속해 온 6년간의 결혼생활.(p.341-342)

 

 

 

  이전에 읽었던 경찰소설... 이혼한 삼십 대 초반의 기동수사대 여성과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은 중년의 베테랑 남성 수사관이 한 조로 편성되어 활약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시공사, 2007.), 한때는 잘나가는 경시청 형사였으나 아내를 잃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형사를 다룬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예담, 2009.) 등과 마찬가지로... 누쿠이 도쿠로의 글에서도 경찰이라는 직업의 특수성, 과중한 업무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현실, 부서 간의 경쟁과 반목, 진급과 출세를 위한 야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사명과 사건 해결의 본질,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은 인생을 작가는 어둡고 무거운 필치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스피드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 세밀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커다란 만족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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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아라키 노부요시, 사진을 말하다 1
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백창흠 옮김 / 포토넷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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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노부요시, 백창흠 역,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 PHOTONET, 2012. 

Araki Nobuyoshi, [TENSAI ARAKI SHASHIN NO HOUHOU by Nobuyoshi Araki], 2001.

 

  어린 시절의 꿈은 미술을 하고 싶었다. 전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판화의 까끌까끌한 질감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한 번의 작업으로 여러 장을 찍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물론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사진의 취미'이다. 더구나 환경이 디지털로 변화하여 약간의 조작만으로 다양한 연출을 할 수 있어서 흠뻑 빠져들었다. 아마추어의 열정은 카메라에 대한 애정으로 나타났고, 빛 좋은 날씨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진 감상이라는 고상한 습관을 갖게 했다. 그리고 기기적인 조작과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일반적으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촬영의 기본(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기 위해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아마도 열의 아홉은 바바라 런던, 짐 스톤, 존 업튼이 공저한 [사진학 강의(제9판)](포토스페이스, 2008.)을 이야기할 것이다. 사진의 메커니즘과 표현에서의 응용기법, 사진의 평가와 시각적인 인식의 방법, 현대 사진의 감상... 등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이 집약된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사진의 구성과 표현에서 가장 도움을 받은 책은 한겨레 신문사 곽윤섭 기자의 [이제는 테마다](동녘, 2010.)이다. 수많은 생활 사진가를 만나며 사진에 대한 비평과 조언을 해온 기자는 선, 면, 대비, 패턴, 프레임, 부분과 전체, 공감각, 오감, 상징, 색, 일상, 추상... 등을 통해 사진의 테마를 말하고 있다.

 

 

 

 

 

  한 가지 테마를 주제로 하는 사진은... 1982년부터 '제주도'를 테마로 하여 셔터를 누르고, 1985년 섬으로 내려가 2002년에 갤러리 두모악을 만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故김영갑 사진가의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2003. http://www.dumoak.co.kr/), '가족의 일상'을 테마로 사진을 모은 모리 유지의 [다카페 일기①, ②](북스코프, 2009. http://www.dacafe.cc/), 그리고 '점프'를 테마로 하는 인터넷 공중 부양 소녀(http://yowayowacamera.com/)... 이러한 흥미로운 촬영은 나의 사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고, '테마'와 '패턴'이라는 의미를 깊이 각인시켰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눈부신 형광 분홍색의 표지로 시선을 끄는,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이라는 야릇(?)한 제목을 가진 또 하나의 사진 책... 아라키 노부요시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성과 감정의 사이에서... 일본의 에로티시즘을 찍는 사진가이다. 그가 말하는 사진의 세계는 어떠한 곳일까?

 

  맨몸으로, 몸으로 찍어야 합니다. '사진 찍으러 왔습니다'가 아니라 거리에 녹아들었다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염탐꾼이 되든가,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일부러 드러내든가,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중간한 모습은 좋지 않습니다. 낚시하러 가는 차림의 조끼, 특히 주머니가 여러 개 여기저기 달려 있는 조끼를 입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 차림으론 사진을 못 찍습니다!(웃음) 긴자 거리에서 찍을 때와 신주쿠 거리에서 찍을 때는 복장을 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15-16)

 

  나쁜 사진이 나온다는 건 결국 찍는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습이 부족한 거지요. 그만큼 사진에는 자기 자신이 속속들이 드러납니다. 정말 사진을 하다 보면 자기가 탄로 나니까 두렵기도 합니다.(p.19)

 

  사진을 하는 사람은 촬영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우스갯소리로 수전증을 막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정된 자세는 셔터 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고, 그만큼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천재 사진가의 조언은 어깨의 자유로움만이 아니라, 몸의 자유로움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사진을 위해 사진가가 배경에 흡수될 것인지, 아니면 튀어나올 것인지... 그리고 사진의 결과는 카메라 때문이 아니라, 사진가 때문인 것을 알려준다.

 

  사진은 일종의 인터뷰입니다. 인터뷰라는 것이 상대로부터 무엇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사진은 인터뷰와 똑같습니다. 표현이 아닌 표출. 그러니까 상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p.37)

 

  (방적공장에서) 처음엔 어째서 자신을 찍는 걸까 의아해하던 공장 노동자가, 자기 사진이 걸린 사진전을 보고는 "마에스트로!"하고 외쳤어요. '어쩌면 내가 이렇게 멋있었나?' 하며 사진을 보고 자신에게 취해버린 거지요. 나는 인간의 존엄을 찍는 거예요.(p.131)

 

  그래서 역시 사진가는 마지막에는 포트레이트로 가는 거예요. 애써 여자의 알몸을 찍었지만, 마지막에는 얼굴만 찍는 거죠. 밀착인화를 보면 그래요. 밀착을 보면 거기가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해서 찰칵 하고 넓적다리를 벌리게 하고 한가운데를 말이죠. 하지만 그 뒤에 보면 마지막엔 얼굴이에요. 젖가슴도 등장하고 음모도 있어요. 그렇지만 마지막은 얼굴인 거에요.(p.129)

 

  가장 관심을 두고 읽은 부분은 '포트레이트'(인물)이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찍기 위해 사진을 시작한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며 어느 순간부터 모델 촬영을 가거나, 꽃을 찍거나, 사물을 찍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꽃은 불평하지 않는다." 때문이다. 인물 촬영은 가장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사진과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라서...;; 예전에는 무조건 카메라의 성능을 과시하며 쨍한 사진을 찍었는데, 제대로 드러난 얼굴의 잡티 때문에 거북해하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괴짜 사진론은 더 나아가 인터뷰를 하듯이 장점을 끌어내는 촬영을 조언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찍으라고 조언하고, 모델을 제대로 알고 얼굴 촬영하기를 조언한다.

 

  예를 들면, 라이카는 소리도 렌즈도 대상에 스며들어가는 느낌이에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대상이 침투해오는 것 같은 카메라입니다. 이른바 명기(名機)지요.(p.43)

 

  인생이라든가 행복을 찍기에는 역시 라이카가 적합해요. 상냥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사람에 대한 건, 결국 자애라는 말로 통할 텐데 라이카가 그 '애지중지'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 렌즈고 셔터 소리이고 스타일이죠. 전에도 얘기했지만 라이카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스며들어가요.(p.53)

 

  그리고 모든 사진가의 로망인 라이카 예찬...

 

  [천재 아라키의 괴짜 사진론]은 어느 천재의 허세나 괴팍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진솔함과 담백함으로 대화하는 글이다. 사진의 '테마'와 '패턴'보다는 아라키의 '섬세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고, 사진가의 '열정'보다는 카메라와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물아일체'의 모습이 보였다. 일본 에로티시즘의 대표자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전혀 야하지 않게 들렸고... 유럽에서 일만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전시하고, 썩은 필름을 인화하여 자연이 만들어준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을 통해 부유함과 여유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한 가지는 그래도 사진과 관련된 책인데, 중질지 이상으로 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미색지에 수록된 사진은 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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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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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글, 오하시 아유미 그림, 권남희 역,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Murakami Haruki, Ohashi Ayumi, [OOKINA KABU, MUZUKASHII ABOKADO_MURAKAMI RADIO2], 2011.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대다수 이등병이 그렇듯이 세상과 분리된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 하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억압된 시기였다. 부대 내 창고를 정리하다가 선반과 벽 사이의 틈에 뭔가가 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권의 책, 표지는 낡아서 제목을 알아볼 수 없는... 혹시, 야설(?)인가? 누군가가 숨겨놓은 야한 소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만큼 자극이 필요했고, 욕망의 분출을 원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니 뚜렷하게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라고 쓰여 있었다. 절망과 허무로 가득한 20대 군인의 마음에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는 어떠한 감동이나 여운이 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원래의 위치에 책을 꽂았다. 그리고 잠시의 망상을 잊고 고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하루키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채 5분이 못되어 끝이 났다.

 

 

  두 번째로 만난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였다. 하지만 첫인상의 실망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메마른 정서 때문일까? 한 마디로 작품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후로는 골수 신봉자가 나타나 어떠한 예찬을 해도, [1Q84]가 돌풍을 일으키며 서점가를 점령해도... 취향의 차이로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일부러 외면했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의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2012 서울국제도서전을 기회로 [잡문집]과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에세이 두 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동안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는 것을 목표로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p.6-7)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삼 년에 걸쳐 [1Q84]를 탈고한 후에, 에세이에 대한 관심으로 <앙앙>(anan)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분을 모은 것이다.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라는 느낌으로 소설가가 쓰는 52개의 에세이는 오하시 아유미가 만들어낸 감상적인 동판화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채소의 기분 / 햄버거 / 로마 시에 감사해야 해 / 파티는 괴로워 / 체형에 대해 / 에세이는 어려워 / 의사 없는 국경회 / 호텔의 금붕어 / 앵거 매니지먼트 / 시저스 샐러드 / 이른바 미트 굿바이 / 올림픽은 시시하다? /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 궁극의 조깅코스 / 꿈을 꿀 필요가 없다 / 편지를 쓸 수 없다 / 오피스 아워 / 생각 없는 난쟁이 / 여어, 어둠, 나의 옛 친구 / 서른 살이 넘은 녀석들 / 오키프의 파인애플 / 마치 표범처럼 / 이제 그만둬버릴까 /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 택시 지붕이라든가 / 딱 좋다 / 신문이란 무엇? /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 달밤의 여우 /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합니까? / 타인의 섹스를 비웃을 수 없다 / 책을 좋아했다 / 휴대전화라든가 병따개라든가 / 캐러멜마키아토 톨 /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법 / 바다표범의 키스 / 장어집 고양이 / 유리집에 사는 사람은 / 그리스의 유령 / 일 인분의 굴튀김 / 자유롭고 고독하고, 실용적이지 않다 / 커다란 순무 / 이쪽 문으로 들어와서 / 아보카도는 어렵다 / 슈트를 입어야지 / 뛰어난 두뇌 / <스키타이 조곡>을 아십니까? / 결투와 버찌 / 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고양이 / 남성작가와 여성작가 / 준 문 송 / 베네치아의 고이즈미 교쿄

 

  글을 통해서 하루키의 삶을 따라가 보면...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한다. 채소 중심으로 식사한다. 사소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걸린다. 수동기어로 운전을 즐긴다. 행사와 스피치와 파티가 가장 고역이다. 자바 현에서 개최하는 풀마라톤에 가끔 참가한다.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하지만,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 의미 없는 말장난이나 별거 아닌 시시한 발상을 글로 쓰길 좋아한다. 독창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서비스는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앵거 매니지먼트를 한다. 외국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싶은 경우, 시저스 샐러드를 주문한다. 신뢰하지만 신용하지 않는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오른손잡이여서 왼손잡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은 잘 모른다. 유진 코스 외에 가장 좋아하는 조깅코스는 교토의 가모가와 강변길이다.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편지를 쓰자 라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일기도 쓰지 못한다. 창작에서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필요하지 않은 한 쓴 책을 다시 읽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쯤 사소한 자설(自設)을 지니고 산다. 서른 살이 넘어 달라진 거라면 소설가가 되어 생활을 일신한 것이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린다. 파인애플을 보면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생각난다. 야구에 끝없이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야구를 보고 스포츠 뉴스를 체크하고 틈이 나면 진구 구장에 가 완두콩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신다. 인생, 앞날은 알 수 없다. 서른 살 때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고 작가로 데뷔했다. 바다 수영이 좋아서 한 해에 한 번은 철인3종경기에 나간다. 책에 사인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이따금 사인회를 한다.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북리뷰>를 읽기 위해 일요판을 사러 간다.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질이다. 열세 살 때부터 LP판을 모으고 있다. 여름에 덴마크의 뮌 섬에서 마리안느 아주머니가 기획하는 문학제에 참가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오랫동안 불편했다. 한 권 한 권에 애착이 있고, 전력을 다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불만인 곳이나 미숙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슬란드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어서 기회가 있으면 또 가고 싶다. 십 대 시절에는 무엇보다 책을 좋아했다. 중고교 시절 동안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 살에 작가라고 불리게 된 뒤로는 뭔가에 홀린 듯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캐러멜마키아토는 아직 마셔본 적이 없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바 같은 것을 칠 년 정도 경영했다. 아오야마 '바 라디오'의 블러디 메리는 역시 마셔볼 가치가 있다. 바다표범 오일은 무척 비리다. 좋아하는 가게는 대체로 머잖아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죄다 스타벅스 천지다. 사전에 실려 있는 예문이나 속담 외우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게 있으면 옆에 있는 종이에 재깍재깍 메모해둔다. 남의 번역을 읽다 보면 직업병인지 오역이 신경 쓰인다. 어느 장소에서 '여긴 안 좋은걸'하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부부끼리 음식 취향이 다른 것은 아주 귀찮은 일이다. 십오 년째 이 인승의 수동 기어 오픈카를 타고 있다. 독자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아보카도는 어렵다. 자유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슈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다. 세상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할 대단한 사람이 있다. <스키타이 조곡> 음반을 가지고 있다. 푸슈킨의 단편을 읽은 뒤로 버찌는 완전히 좋아하는 과일이다. 젊은 시절에 누가 말려도 넘어야 할 벽이 있으면 꼭 기세 좋게 시비조로 덤벼들었다. 일본 서점의 소설 코너에 가면 '남성작가'와 '여성작가'로 구분된 경우가 많다. 인생에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p.219)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키의 잔잔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인생을 살아오며 경험으로 깨달은 교훈이 있고, 작가로서 글쓰기의 고충과 내면의 고백이 있으며, 번득이는 재치로 웃음을 주고, 감동적인 서술로 눈물을 짜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소박함으로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글과 어울리는 동판화는 여운으로 남아 마음에 새겨진다.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이전의 소화불량이 말끔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며 불연 듯 일어난 몇 가지 충동... 하나는 하루키의 삶을 따라 해보고 싶은 충동, 다른 하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필사해 보고 싶은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몰아친다.

  나도 이제 슬슬 나이를 먹는 것일까?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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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할런 코벤, 하현길 역, [용서할 수 없는], 비채, 2012. 

Harlan Coben, [CAUGHT], 2010.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용서'에 관한 메시지가 가장 강력한 것은 '성경'이다. 성경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하지만, 신의 궁극적인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대신 죗값을 치르게 하고 인류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용서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14)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1-22)

 

  이러한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영미권 스릴러는 아직 초보의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올해 읽은 두 권의 책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구조를 이루며, 똑같이 '용서'를 말하고 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즐기는 이유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독특한 캐릭터, 사건과 추리, 배신과 음모, 공포와 스릴... 그리고 반전과 복수 때문이다. 주인공이 억울함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단서의 조각을 찾아내고 한 걸음씩 나아가 마침내 진실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통쾌한 반격과 철저한 복수를 기대한다. 그런데 '용서'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복수가 빠져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두 권의 책은 리사 스코토라인의 [세이브 미](샘터, 2012.)와 할런 코벤의 [용서할 수 없는]이다. 여성 작가와 남성 작가라는 차이를 제외하고 이 두 권은 영미권 스릴러, 모성애를 기반으로 하는 여성의 파워, 매스컴과 대중의 영향력, SNS의 위력, 법정공방과 사법체계의 문제점, 배신과 음모, 반전과 대활약, 숨겨진 진실... 그리고 용서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p.6)

  "그 녀석들 말이 옳았어요. 난 끝장난 거라고요. 이제 내게 뭐가 남았죠? 예전에 아무리 좋은 걸 소유하고 있었던 간에 다 사라져버렸는데. 복수가 해준다는 게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요. 영혼을 갉아먹어버려요. 난 그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여요."(p.455)

 

  마치 지구가 헤일리를 꿀꺽 삼켜버린 것만 같았다.

  한 달이 흘렀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두 달이 지났다. 여전히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석 달이 다 되어가는 시기에 소식이 들어왔다. 마샤의 가슴속에서 커져만 가던 바윗돌이, 그녀의 숨길을 가로막고 꼬박 밤을 새게 만들었던 그 바윗돌이 결국 성장을 멈췄다.(p.19)

 

  댄 머서는 대도시 빈민가 청소년센터 농구팀 감독이다. 고아로 위탁가정에서 자라나 아이비리그의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성공 가도를 달리지는 못했다. 가족에 대한 애착으로 이혼한 부인과는 지나칠 정도로 모범적이고 낙천적이다. 선행과 베푸는 삶으로 누구나 호감이 가는 매력적인 인상이다. 그러나 그 빨간색 문을 열던 날, NTC뉴스의 현장체포 리얼 프로그램에 '소아성애자'로 방송 노출된다. 집에서는 이와 관련된 증거물이 발견되고, 하루아침에 성범죄자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그는 살해당한다.

 

  헤일리 맥웨이드는 고교 졸업반으로 여자 라크로스 선수이다. 다른 동생들과는 달리 자기 생활에 철저하며, 강박성 장애가 의심될 정도로 정리하는 생활을 한다. 그날도 침대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고, 방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라졌다.

 

  처음 2-3주 동안은 헤일리 맥웨이드의 실종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10대 소녀는 납치된 것일까? 가출한 것일까? 소위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헤일리에게 일어났음직한 상황들을 재연하는 광경이 뉴스 속보와 온갖 언론매체에 연신 등장했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아무리 선정적인 가설이라도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언론이 이 사건에 얼마나 목을 매고 달려들었는지는 신만이 아실 터였다. 매춘부로 팔려갔을 거라는 풍문부터 악마숭배의 희생자가 됐을 거라는 풍문까지 온갖 것을 다 다뤘다. 어쨌든 이 업계에서는 '무소식'이야말로 '나쁜 소식'이었다. 시청자들은 언론이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런 소식을 전하며 함께 마음 아파하는 시늉을 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어떤 게 방송돼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사람은 시청자들이었다.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건 계속 방송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관심을 끊는 순간 방송사들은 대중의 변덕스런 눈길을 사로잡을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p.51)

 

  "프린스턴 대학의 동기생이고,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던 네 사람이 1년 사이에 모두 스캔들에 휘말렸어요."(p.281)

  "댄은 죽었어요. 필 턴볼은 횡령혐의를 뒤집어쓰고 직장에서 해고됐죠. 캘빈 틸퍼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어요. 팔리 파크스도 최근에 곤경을 겪었고요."(p.403)

 

  웬디 타인스는 시사 프로그램의 현장 리포터로, 익명의 제보를 받고 댄 머서가 소아성애자임을 밀착 취재한다. 그녀의 보도를 통해 파렴치한 성범죄자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지만, 댄은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살해된다. 매스컴의 영향력과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웬디는 자신의 리포트에 의문을 품고 댄의 과거를 추적한다. 그리고 댄의 대학 시절에 함께 기숙사를 쓰던 네 명의 친구들은 지난 1년 사이에 모두 스캔들에 휩쓸려 곤경에 처한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은 두 가지 의문으로 진행된다. ① 살해된 댄 머서와 실종된 헤일리 맥웨이드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② 과거 기숙사 친구들은 모두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제대로 봤네요. 바로 그게 우리 사법 시스템의 아름다운 점이에요. 사법 시스템은 비틀릴 수도 있고, 뒤틀릴 수도 있어요. 나도 항상 그러고 있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예요. 하지만 사법 시스템 내에서 그렇게 한다면 옳든 그르든 어떻게든 작동이 되죠. 하지만 사법 시스템을 벗어난다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그 균형을 깨뜨렸다고 하더라도 혼란과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어요."(p.312-313)

 

  "요즘 아이들을 보면 우리 때와 똑같이 허황된 꿈을 쫓는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해라. 좋은 학점을 받아라. 대학입학 자격시험(SAT)에 대비해라. 할 수 있다면 스포츠를 하나쯤 해라. 대학들은 그러는 걸 좋아한단다. 충분한 과외활동을 해라. 가장 평판이 좋은 대학의 입학허가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다 해라. 이건 마치 네 생애의 앞부부 17년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기 위한 오디션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는 거와 다를 바 없죠."(p.351)

 

  "난 그들을 용서했어요...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그들을 증오했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남을 증오하려면 정말 많은 것들을 붙잡고 있어야 해요. 그러는 동안 정작 중요한 건 놓칠 거고요. 그렇지 않겠어요?"(p.412)

 

  [용서할 수 없는]은 할런 코벤의 명성이 절대로 과장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영미권 스릴러가 선 굵은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전개한다면, 이 책은 두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있어 마치 미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사건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는 수많은 사회 문제들... 매스컴과 대중의 영향력, SNS의 두 얼굴, 사법 시스템의 모순, 청소년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용서'라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희석하지 않고, 더욱 명확하게 부각하고 있다.

 

  웬디 타인스는 아주 혹독한 피해자이고, 매우 가혹한 가해자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것처럼...

  "당신을 용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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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숨은 골목 - 어쩌면 만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이동미 글 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이동미, [서울의 숨은 골목], 중앙북스, 2012. 

 

  사진을 좋아해서 외출할 때에는 카메라를 꼭 챙깁니다. 인터넷 사진 사이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여다보고요. 가끔은 도서관에서 사진과 연관된 책을 빌려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사진전에 가서 거장의 작품을 감상하기도 합니다. 항상 초보의 열심과 아마추어의 열정으로 사진을 즐깁니다. [서울의 숨은 골목]은 '골목'보다는 '사진'에 대한 관심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정성 들여 보정합니다. 원하는 색을 찾아 인화하고, 마음에 들면 블로그에 올립니다. 카메라 동호회나 유명 사이트에는 '그날의 사진'이라고 해서 게시된 사진의 방문, 추천, 댓글을 점수로 환산하여 일면을 장식합니다. 흔히 일면 사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일면 사진의 특징 중의 하나는 외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낯설고 조금은 신비스러운 공간을 사각의 프레임에 담아 이런저런 이야기와 함께 올리면, 사람들은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하고 감동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외국의 사진 사이트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느 외국인이 우리나라 경복궁을 촬영하여 자기 나라의 사이트에 올리면, 그것을 본 외국인들은 원더풀, 판타스틱, 나이스 샷... 을 외치며 환호합니다.

 

  나에게 익숙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익숙해서 소중한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국적인 것에는 호기심과 찬사를 보내면서, 집 앞 골목은 무덤덤할 뿐입니다. 천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500년 이상 된 도시, 서울의 숨은 골목은 어떤 모습일까요? 

 

 

  머리에 양은 냄비를 쓰고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른 골목대장의 지시에 아이들이 달려가고 달려오는 골목, 어둠이 내려 땅바닥이 어슴푸레해질 때까지 땅따먹기를 하던 골목, 하루 종일 해를 받아 미지근해진 빨간 고무 함지에서 이웃집 아이는 목욕을 했고, 칭얼대는 아기를 업고 나온 할머니는 나지막이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까칠 밤송이가 떨어지고, 빨간 홍시가 간당거리고 나면 '옥황상제의 비듬'이라 우기던 어느 아이의 말처럼 흰 눈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골목은 집보다 큰 세상이고, 우주만큼 끝없이 재미가 솟아나는, 동경과 아쉬움, 슬픔과 '꺼리'가 넘쳐 나는 멋진 세상이었습니다.(Prologue)

 

 

  성북동 골목길 어귀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한옥, 이곳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문인이었던 만해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이다.(p.28-29)

 

 

  제기동, 그 골목 모퉁이의 한 집은 화분에 다양한 화초들을 기르고 있었다. 화초들이 엉킨 모습은 마치 울창한 숲의 정원 같다. 재개발로 인해 이사 가게 될 이 집 주인은 저 화분들이 못내 그리워질 것이다.(p.44-45)

 

 

  종로 순라길, 종로통 네거리에 있는 종루에서 종이 울린다. 스물여덟 번의 종이 울리니 이는 인정(밤 10시경)으로 사대문이 닫힌다는 뜻이다.(p.62-63)

 

 

  순라길을 걸으면 오래된 가정집들이 어깨를 걸고 있다. 겉보기엔 그저 일반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뭔가 좀 다르다. 보석 세공하는 집이다.(p.66-67)

 

 

  초동 맛골목, 충무로는 대한민국 인쇄골목의 메카이며, '영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충무로 영화인이라면 한 번 이상은 들렸을 40년 전통의 설렁탕집(p.76-79)

 

 

  사직단, 한양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해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백성의 농사가 잘되도록 제를 지냈으니 사직제는 해마다 네 차례씩 거행되었다.(p.86-87)

 

 

  역동적인 대학로 거리, 대학로에서는 연극을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p.104-105)

 

 

  비 오면 특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빈대떡과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피맛골. 그래, 피맛골이다.(p.116-117)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낭만(p.128-129)

 

 

  서래마을에 진입하면 야트막한 언덕 양편으로 고급빌라가 펼쳐지고 언덕길을 따라 와인 숍이며 빵집, 식료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그저 차를 타고 지나갔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이 길은 천천히 걸어야 한다. 땅바닥도 자세히 보아야 한다.(p.146-147)

 

 

  홍대 프리마켓,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면 홍대 앞 놀이터에서 프리마켓이 열린다.(p152-153)

 

 

 

  홍대 골목의 벽화들, 해마다 가을이면 '거미전'이 열린다. '거리미술전'의 줄임말로, 벽화는 물론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작품이 홍대 주변을 가득 메운다.(p.156-159)

 

  봄... 금호동, 성북동, 제기동 약령시장길, 면목동, 종로 순라길, 충무로, 사직단 뒷길, 대학로,

  여름... 피맛골, 신당동, 서래마을, 홍대 뒷골목, 이문동, 옥수동, 성내천, 한남동,

  가을... 회현동, 정동길, 항동 철길, 동대문, 숭인동, 가회동, 후암동,

  겨울... 중림동, 부암동, 아현동, 이화동, 공덕동, 답십리, 서대문.

 

 

  내가 태어난 면목동이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는 동네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고, 방배동에서 자라며 서래마을 자락에 땅 한 평 사놓지 않으신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으며, 동대문 짝퉁 신발과 충무로 대한극장의 기억, 대학 시절 그녀와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렸던 옥수동, 입대하기 전에 친구들과 갔던 신당동 떡볶이 골목, 연극에 미친 친구 때문에 한동안 대학로를 기웃거렸고, 카메라 때문에 헤매던 회현동, 공덕동 족발 골목에서의 회식, 그리고...

 

  [서울의 숨은 골목]은 익숙함 보다는 소중함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작가의 부지런함과 세심함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색깔별로 담아내었고, 사물의 특징과 사람의 표정을 잘 잡아내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남다른 글솜씨는 골목의 운치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역사적 배경과 지역에 대한 설명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을 찾을 수 있게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쉬움... 재개발 때문에 서울의 골목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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