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누쿠이 도쿠로, 이기웅 역, [후회와 진실의 빛], 비채, 2012. 

Nukui Dokuro, [KOKAI TO SHINJITSU NO IRO], 2009.

제23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인생에는 연습이 없으므로 하루하루가 결승전이고 승부처이고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아니, 어쩌면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인생은 항상 더 나은 삶을 바라보고 욕망에 사로잡혀 살기에 후회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학교 다닐 때에 조금만 더 공부했더라면, 첫사랑에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진로를 선택할 때에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을까? 누쿠이 도쿠로의 [후회와 진실의 빛]은 연쇄 살인을 해결해가는 형사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설은 경찰 조직-연쇄 살인-트릭과 반전을 통하여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미스터리 구조 속에 '후회'라는 인간 내면의 심리와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는 여성. 잘려 나간 집게손가락. 난도질한 칼. 여성을 덮쳤으리라. 격렬한 통증. 목숨을 빼앗긴다는 원통함. 그런 느낌들이 마치 자기한테 일어난 일인 양 온몸을 휩쓸었다.(p.10)

 

  살인사건 조사에 중요한 요소는 현장, 감별, 유류품 이 세 가지다. '현장'은 탐문에 의한 수사, '감별'은 피해자와 관련된 데이터 수집, '유류품'은 증거물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를 담당하는 각각의 팀 외에,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안을 조사하는 역할로 '특명'이 존재한다. 수사본부에 투입된 인원은 이 네 가지 임무에 배당된다.(p.59)

 

  어느 겨울밤, 도쿄의 한적한 곳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순찰하던 관할 파출소 경찰에 의해 전신이 난자되어 피범벅으로 쓰러진 여성이 발견된다. 기동수사대는 현장 주변을 탐문하고, 사건의 심각성으로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되어 경시청 수사1과 형사들이 투입된다. 세부적인 분담으로 시신의 부검과 유류품에 대한 정밀 감식이 이루어지고, 피해자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수집된다. 특이한 사항은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절단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선 맨 처음에는 '단지(斷指) 살인마'라는 정통적인 이름이 제안됐다. 그러나 '단지'라는 말에 실린 목가적인 울림 때문에 얼빠지게 들린다는 댓글이 다수 달리며 각하되었다. 이후로도 '도쿄 난도질 살인마 잭'이라든가 '인체 절단 살인마', '토막 살인마' 등의 이름이 게시판을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어느 것이나 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러다가 하나, 시선을 끄는 게시물이 있었다... 그 이름은 '손가락 수집가(蒐集家)'였다. '수집'에 '收集'이 아니라 구태여 '蒐集'이라는 글자를 가져다 쓴 점에서도 세련된 센스가 느껴졌다.(p.213)

 

  감상의 즐거움을 맛본 이후로는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이 더는 허명이 아니게 되었다. 이름 따라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을 지어 준 이에게 지금은 감사했다.

  이제 이렇게 되고 나니 역시 더 갖고 싶었다. 겨우 세 개만으로는 수집이라 하기 힘들다. '손가락 수집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손가락 세 개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손길을 쉬어서는 안 된다.(p.402)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또다시 손가락이 절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언론은 낌새를 알아채고 수사 공개를 요청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중에 희생자와 관련된 유력 정치인은 압력을 행사한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공간에서는 사건의 글이 게시되고, 심지어 '손가락 수집가'라는 호칭과 함께 다음 범행이 예고된다.

 

  작품은 '경찰소설'의 표본이라고 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주민 신고가 들어오면, 관할 파출소로 연락되어 경관이 순찰한다. 사건이나 범행이 발견되면 현장은 즉시 통제되고, 기수대가 신속히 투입되어 목격자를 확보하고 주변을 탐문한다. 몇몇 관리관은 현장을 점검하고 그들의 판단으로 수사본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특별'이나 '합동'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특별수사본부는 경시청 수사1과에서 나온 형사와 기수대 또는 관할 경찰서 형사가 2인 1조로 편성되어 세부적인 분담이 이루어지고, 각각의 임무를 통해서 수집된 단서는 수사회의를 통해서 하나로 조합된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수사의 방향을 수정하고, 추리하는 이러한 과정이 매우 세밀하여 오히려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를 잃고, 불구가 된 아들을 안고 망연자실해 있던 와타비키를 구해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도 언젠가는 늙는다. 이제는 다이키를 쉽게 안아 주지도 못한다. 가까운 시일 내에 도우미의 힘을 빌려야 하리라. 다이키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이 낡은 집도 뜯어고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다.

  출세하고 싶다. 와타비키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는 추태도 마다하지 않고 출세를 갈망했다.(p.53)

 

  어떡하다가 이런 관계가 되어 버린 걸까. 지금까지 수없이 되뇌어 온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사이조는 결혼한 후로 가능한 한 아키호의 바람을 이뤄 주려고 노력해 왔다. 물론 매일 일찍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들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아키호는 남편이 집에 있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출세, 안정적인 수입, 그리고 남 보기에 부러워할 만한 근사한 남편. 아키호가 사이조에게 바란 것은 이 세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결혼 당시부터 아키호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을 이어 가는 사이 어느샌가 아키호의 바람은 그 세 가지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이조와의 결혼 자체가 아키호를 바꿔 버린 원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수없이 고민해도 아키호와의 결혼은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러, 사이조는 우울해졌다. 그 유일한 결론을 애써 외면하며 지속해 온 6년간의 결혼생활.(p.341-342)

 

 

 

  이전에 읽었던 경찰소설... 이혼한 삼십 대 초반의 기동수사대 여성과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은 중년의 베테랑 남성 수사관이 한 조로 편성되어 활약하는 노나미 아사의 [얼어붙은 송곳니](시공사, 2007.), 한때는 잘나가는 경시청 형사였으나 아내를 잃고 가족을 돌보기 위해 지역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형사를 다룬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문](예담, 2009.) 등과 마찬가지로... 누쿠이 도쿠로의 글에서도 경찰이라는 직업의 특수성, 과중한 업무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현실, 부서 간의 경쟁과 반목, 진급과 출세를 위한 야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경찰의 사명과 사건 해결의 본질, 그리고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은 인생을 작가는 어둡고 무거운 필치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스피드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약간의 아쉬움이, 세밀한 전개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커다란 만족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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