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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글, 오하시 아유미 그림, 권남희 역,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Murakami Haruki, Ohashi Ayumi, [OOKINA KABU, MUZUKASHII ABOKADO_MURAKAMI RADIO2], 2011.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대다수 이등병이 그렇듯이 세상과 분리된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 하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억압된 시기였다. 부대 내 창고를 정리하다가 선반과 벽 사이의 틈에 뭔가가 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권의 책, 표지는 낡아서 제목을 알아볼 수 없는... 혹시, 야설(?)인가? 누군가가 숨겨놓은 야한 소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만큼 자극이 필요했고, 욕망의 분출을 원했다. 하지만 첫 장을 넘기니 뚜렷하게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라고 쓰여 있었다. 절망과 허무로 가득한 20대 군인의 마음에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는 어떠한 감동이나 여운이 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원래의 위치에 책을 꽂았다. 그리고 잠시의 망상을 잊고 고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하루키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채 5분이 못되어 끝이 났다.

두 번째로 만난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였다. 하지만 첫인상의 실망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메마른 정서 때문일까? 한 마디로 작품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후로는 골수 신봉자가 나타나 어떠한 예찬을 해도, [1Q84]가 돌풍을 일으키며 서점가를 점령해도... 취향의 차이로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일부러 외면했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의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2012 서울국제도서전을 기회로 [잡문집]과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의 에세이 두 권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동안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는 것을 목표로 책을 펼쳐 들었다.

나의 본업은 소설가요, 내가 쓰는 에세이는 기본적으로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하는 사람도 많으니 물론 적당히 쓸 수는 없죠. 일단 우롱차를 만들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만들겠다는 것은 글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뭐, 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깨 힘 빼고 비교적 편안하게 이 일련의 글을 썼습니다. 어깨 힘 빼고 편안하게 읽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p.6-7)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삼 년에 걸쳐 [1Q84]를 탈고한 후에, 에세이에 대한 관심으로 <앙앙>(anan)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던 '무라카미 라디오' 한 해분을 모은 것이다.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라는 느낌으로 소설가가 쓰는 52개의 에세이는 오하시 아유미가 만들어낸 감상적인 동판화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채소의 기분 / 햄버거 / 로마 시에 감사해야 해 / 파티는 괴로워 / 체형에 대해 / 에세이는 어려워 / 의사 없는 국경회 / 호텔의 금붕어 / 앵거 매니지먼트 / 시저스 샐러드 / 이른바 미트 굿바이 / 올림픽은 시시하다? /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 궁극의 조깅코스 / 꿈을 꿀 필요가 없다 / 편지를 쓸 수 없다 / 오피스 아워 / 생각 없는 난쟁이 / 여어, 어둠, 나의 옛 친구 / 서른 살이 넘은 녀석들 / 오키프의 파인애플 / 마치 표범처럼 / 이제 그만둬버릴까 /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 / 택시 지붕이라든가 / 딱 좋다 / 신문이란 무엇? /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 달밤의 여우 /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합니까? / 타인의 섹스를 비웃을 수 없다 / 책을 좋아했다 / 휴대전화라든가 병따개라든가 / 캐러멜마키아토 톨 /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법 / 바다표범의 키스 / 장어집 고양이 / 유리집에 사는 사람은 / 그리스의 유령 / 일 인분의 굴튀김 / 자유롭고 고독하고, 실용적이지 않다 / 커다란 순무 / 이쪽 문으로 들어와서 / 아보카도는 어렵다 / 슈트를 입어야지 / 뛰어난 두뇌 / <스키타이 조곡>을 아십니까? / 결투와 버찌 / 까마귀에게 도전하는 새끼고양이 / 남성작가와 여성작가 / 준 문 송 / 베네치아의 고이즈미 교쿄
글을 통해서 하루키의 삶을 따라가 보면... 용두사미식의 대화를 좋아한다. 채소 중심으로 식사한다. 사소한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걸린다. 수동기어로 운전을 즐긴다. 행사와 스피치와 파티가 가장 고역이다. 자바 현에서 개최하는 풀마라톤에 가끔 참가한다. 잡지에 에세이를 연재하지만, 에세이 쓰기는 어렵다. 의미 없는 말장난이나 별거 아닌 시시한 발상을 글로 쓰길 좋아한다. 독창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서비스는 마음에 오래 남는다. 앵거 매니지먼트를 한다. 외국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싶은 경우, 시저스 샐러드를 주문한다. 신뢰하지만 신용하지 않는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오른손잡이여서 왼손잡이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은 잘 모른다. 유진 코스 외에 가장 좋아하는 조깅코스는 교토의 가모가와 강변길이다.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편지를 쓰자 라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일기도 쓰지 못한다. 창작에서 가치 판단의 확고한 기준이란 것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필요하지 않은 한 쓴 책을 다시 읽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쯤 사소한 자설(自設)을 지니고 산다. 서른 살이 넘어 달라진 거라면 소설가가 되어 생활을 일신한 것이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린다. 파인애플을 보면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생각난다. 야구에 끝없이 투덜거리면서도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야구를 보고 스포츠 뉴스를 체크하고 틈이 나면 진구 구장에 가 완두콩을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신다. 인생, 앞날은 알 수 없다. 서른 살 때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고 작가로 데뷔했다. 바다 수영이 좋아서 한 해에 한 번은 철인3종경기에 나간다. 책에 사인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이따금 사인회를 한다. 자신을 절대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뉴욕타임스 북리뷰>를 읽기 위해 일요판을 사러 간다. 섹스에서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라 질이다. 열세 살 때부터 LP판을 모으고 있다. 여름에 덴마크의 뮌 섬에서 마리안느 아주머니가 기획하는 문학제에 참가한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오랫동안 불편했다. 한 권 한 권에 애착이 있고, 전력을 다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불만인 곳이나 미숙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슬란드는 아주 흥미로운 곳이어서 기회가 있으면 또 가고 싶다. 십 대 시절에는 무엇보다 책을 좋아했다. 중고교 시절 동안 나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서른 살에 작가라고 불리게 된 뒤로는 뭔가에 홀린 듯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것보다 병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캐러멜마키아토는 아직 마셔본 적이 없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바 같은 것을 칠 년 정도 경영했다. 아오야마 '바 라디오'의 블러디 메리는 역시 마셔볼 가치가 있다. 바다표범 오일은 무척 비리다. 좋아하는 가게는 대체로 머잖아 모습을 감춰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죄다 스타벅스 천지다. 사전에 실려 있는 예문이나 속담 외우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게 있으면 옆에 있는 종이에 재깍재깍 메모해둔다. 남의 번역을 읽다 보면 직업병인지 오역이 신경 쓰인다. 어느 장소에서 '여긴 안 좋은걸'하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부부끼리 음식 취향이 다른 것은 아주 귀찮은 일이다. 십오 년째 이 인승의 수동 기어 오픈카를 타고 있다. 독자를 염두에 두기 보다는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아보카도는 어렵다. 자유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슈트를 입을 기회가 거의 없다. 세상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할 대단한 사람이 있다. <스키타이 조곡> 음반을 가지고 있다. 푸슈킨의 단편을 읽은 뒤로 버찌는 완전히 좋아하는 과일이다. 젊은 시절에 누가 말려도 넘어야 할 벽이 있으면 꼭 기세 좋게 시비조로 덤벼들었다. 일본 서점의 소설 코너에 가면 '남성작가'와 '여성작가'로 구분된 경우가 많다. 인생에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음악이 있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p.219)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키의 잔잔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인생을 살아오며 경험으로 깨달은 교훈이 있고, 작가로서 글쓰기의 고충과 내면의 고백이 있으며, 번득이는 재치로 웃음을 주고, 감동적인 서술로 눈물을 짜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소박함으로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글과 어울리는 동판화는 여운으로 남아 마음에 새겨진다. 하루키의 작품에 대한 이전의 소화불량이 말끔히 치유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며 불연 듯 일어난 몇 가지 충동... 하나는 하루키의 삶을 따라 해보고 싶은 충동, 다른 하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필사해 보고 싶은 충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몰아친다.
나도 이제 슬슬 나이를 먹는 것일까?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