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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좋은 날 -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전망 없는 밤을 위한 명랑독서기
이다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이다혜, [책읽기 좋은날], 책읽는수요일, 2012.
여느 취미와는 다르게 독서는 어린 시절의 습관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학업이나 직업의 이유를 제외하고, 어른이 되어 어느 날 문득 책을 읽어야 하겠다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하고, 꾸준히 책을 구매한 사람이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좋아하고 열심히 읽는다고 하지만... 이제 겨우 책장을 채워가는 재미를 아는 수준이고,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라 하더라도 책을 읽는 즐거움에는 비교할 수 없다는 정도이다. 나도 언젠가는 독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 막힘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당신, 살아있나요?
긍정이 뒤통수 칠 때
매끄러운 사회생활을 위하여
슬픈 날에는 슬픈 음악을
누군가 내 삶에 끼어들었으면
오늘 밤도 분홍분홍해
[책읽기 좋은날]은 영화 잡지 [씨네21]과 장르문화 전문지 [판타스틱]에서 기자로 활동한 이다혜의 독서 기록이다. 북칼럼리스트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기자의 글을 읽으며, 역시 세상은 넓고 알려지지 않은 은둔 고수가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6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책 속에는 기자가 읽은 수많은 책... 만화, 고전, 세계문학, 장르소설, 인문, 실용서... 등이 빼곡히 모여 있다. 글을 쓴 이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어왔고, 항상 넘쳐나는 책장을 고민하며, 그럼에도 새로 출간하는 책은 꼭 사야만 하는... 어쩌면 글 읽기 중독자의 책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어릴 적 가르침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세상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악행으로 가득하다. 책은 판도라의 상자 같아서, 그 안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책을 읽는 독법에는 정답이 없다. 어디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답이 없듯이 그 책을 어떻게 해석할지에도 답은 없다.(p.393-394)
소개에는 "123권의 책과 즐거운 상상"이라고 하는데, 책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정갈하고 맛깔나게 써서 마치 잘 차려진 한정식을 대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무리 세고, 또 세어도 111개의 리뷰와 2권을 소개하는 7개의 리뷰로 모두 118권의 책이 나오는데... 왜 123권이라고 하는지 미스터리하다. 아무튼, 123권이면 어떻고 118권이면 어떠랴... 책을 사랑하고 책에 중독되어 책과 함께 살아가는 고수의 글을 통해서 책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현대의 독자는 그런 의미에서 불운하다. 작품을 작품으로 만나기 전에, 차고 넘치는 말의 홍수 속에서 그 작품에 대한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포함해 각종 리뷰나 평론들을 요행히 피한다 해도, 책 표지의 홍보문구에, 길거리 광고판에 노출되는 일마저 피할 도리는 없다(아예 눈을 감고 아무 책이나 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우리는 실망할 혹은 감동할 준비를 하고 작품을 만난다. [오후의 죽음]에 나오는 문장을 빌리면 "우리가 속된 의미로 썼던 말들이 모두 짜릿함을 잃어버렸습니다."(p.28-29)
부끄럽게도 목록에서 내가 읽은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과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뿐이다. 설마 했던 우려가 마지막 장을 넘길 때에 현실이 되어버리다니...ㅜㅜ 그럼에도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수많은 책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글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은 다음과 같다.
- [노인과 바다]는 단 8주 만에 쓰인 소설
- [내 농장은 28번가에 있다]는 도심에서 식용 가축을 길러 잡아먹기
-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노동과 계급, 삶의 질에 얽힌 문제
- [잠자는 미녀]는 여체의 아름다움과 성에 대한 집착
- [굿바이, 스바루]는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예찬
- [가격 파괴의 저주]는 소비를 통한 경제 성장 구조를 비판
- [개로 길러진 아이]는 부모의 잘못된 양육
- [나가사키]는 내 집에 몰래 숨어 사는 낯선 이와의 동거
- [손바닥 소설]은 모티브를 제공하는 짤막한 단편 모음
- [왜 우리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까]는 독일에서 거짓말 없는 40일의 실험
- [유모아 극장]은 1960년대 말에 상상한 1990년대 세상
- [작가가 작가에게]는 소설을 쓰는 (따라 할 수 없는) 77가지 전략
- [황홀한 글감옥]은 조정래의 문학론, 작품론, 인생론
-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는 대기만성형 예술가들
- [침대 밑에 사는 여자]는 호텔 메이드의 발칙한 행동
-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네 자매의 기묘한 동거
- [옆 무덤의 남자]는 스웨덴 국민 스무 명당 한 명이 읽은 특이한 연애 소설
- [쌍두의 악마],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 ([미스틱 리버], [무죄추정], [레드 드래곤])은 장르소설에 관한 기대감
글을 쓰는 일을 글로 배우는 게 일견 옳게 보이지만, 아이고 신이시여, 작법 책을 읽고 "나도 이제 작가"라는 공상에 빠진다는 것은 권투를 책으로 배운 다음 타이슨과 같은 링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한쪽 귀를 물어뜯긴 다음에야, 귀 한쪽이 없다고 해서 모두 고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될 뿐이다. 서머싯 몸이 그랬다. 글쓰기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그래도, 그래도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고 싶은가?(p.220-221)
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조정래).(p.241)
세계문학전집 1백 권, 한국문학전집 1백 권, 중단편소설집 1백 권, 시집 1백 권, 기타 역사사회학서적 1백 권을 읽지 않고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조언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글에 대한 헌신 없이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조정래는 이 책을 통해 그 자신이 헌신하고 노력해온 삶을 보여준다.(p.242)
매우 흥미로운 책과 독서를 통한 재미있는 기록을 읽으며, 한층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다. [책읽기 좋은날]은 책꽂이가 아니라, 한동안 내 책상 위에 머무르게 될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빠뜨리거나 무심코 건너뛴 부분은 없지 않은가? 라는 우려에서... 그리고 나의 책 읽기와 독서 기록의 좋은 지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