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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첫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3년 5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글, 오하시 아유미 그림, 권남희 역,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비채, 2013.
Murakami Haruki, Ohashi Ayumi, [MURAKAMI RAJIO], 2001.
하루키의 신드롬은 계속되는 것일까? 일본에서 [1Q84] 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그의 소설에 예약이 몰리면서 초판만 50만 부를 찍었다고 하니, 그의 팬이 아닌 나로서도 문득 관심이 생긴다. 이러한 때를 맞추어 국내에서는 이미 나온 작품을 리뉴얼하거나 이전의 작품을 새로 번역하는 센스를 보이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이다.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의 첫 번째로,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비채, 2012.)가 두 번째이고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비채, 2013.)는 세 번째이다.
다만, 젊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는 만큼 나름대로 한 가지 정해둔 것은, 안이한 단정 같은 것만은 피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당연히 다들 알고 있을 테니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야' 하는 전제를 포함한 문장은 쓰지 않도록 하자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강요하는 글도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하자고.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은 것도 있고, 어떤 때는 옳은 것이 다른 때는 옳지 않기도 하니까요.(p.210)
무라카미 라디오는 잡지 <앙앙>(anan)에 매주 한 편씩 연재한 에세이 일 년분을 모은 것이다. 스무 살 전후의 젊은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라서, 이것을 고려한 작가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오하시 아유미의 감각적인 동판화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가슴을 파고드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동판을 파내어 새긴 예쁜 그림은 매우 잘 어울린다. 글을 쓰는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다른 작가의 만남은 매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이것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는 것이 어쩌면 감미로운 동화 같다는 생각이다.
슈트 이야기 / 영양가 있는 음악 / 리스토란테의 밤 / 불에 태우기 / 네코야마 씨는 어디로 가는가? / 장어 / 로도스 섬 상공에서 / 당근 / 가키피 문제, 뿌리가 깊다 / 뛰기 전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오블래디 오블라다 / 파스타나 삶아! / 사과의 마음 / 긴피라 뮤직 / 고양이의 자살 / 스키야키가 좋아 / 김밥과 야구장 / 삼십 년 전에 일어난 일 / 세상은 중고 레코드 가게 / 코트 속의 강아지 / 버지니아 울프는 무서웠다 /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도넛 / 판화 / 상당히 문제가 있다 / 성가신 비행기 / 크로켓과의 밀월 / 가르치는 게 서툴다 / 앗, 안 돼! / 사람들은 왜 지라시 스시를 좋아하는가 / 원시적 광경 / 넓은 들판 아래서 / 작은 과자빵 이야기 / 트랜지스터 라디오 / 하늘 위의 블러디 메리 / 새하얀 거짓말 / 이상한 동물원 / 이걸로 됐어 / 원주율 아저씨 / 센트럴파크의 매 /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 식당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 장수하는 것도 말이지 / 골동품 가게 기담 / 싸움을 하지 않는다 / 버드나무여, 나를 위해 울어주렴 / 체중계 / 골프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 길만 있으면 /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작년에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를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글 속에 배어있는 하루키의 삶이었다. 채소 중심으로 식사하고, 수동 기어로 운전을 즐기며, 자바 현에서 개최하는 풀마라톤에 가끔 참가한다는... 이것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여, 목록을 작성하고 따라 하기도 했었다. 이 책을 펼치면서 가장 기대한 것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국내 번역은 순서가 바뀌어서) 그의 또 다른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 년 동안에 글쓰기의 패턴이 달라진 것일까? 여기에서는 그의 습관이나 좋아하는 생활방식보다는 과거의 경험과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유독 첫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요전에 옷장을 정리하다가 내가 슈트를 다섯 벌이나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빔 벤더스의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았다. 여느 특별한 밤에, 어느 특별한 여성과 아오야마의 어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일반적으로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아주 이상한(쓸 데 없는) 일에 연연하는 인종이라 정의해도 좋을지 모른다. 전에 어딘가에서 아주 어려운 일을 가리켜 '고양이에게 손! 을 가르치는 것만큼 어렵다'라고 썼더니, "아뇨, 우리 고양이는 '손!'할 줄 압니다"하는 메일이 상당히 많이 왔다. 친구에게 빌린 번쩍거리는 검은색 대형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참에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입구 기둥에 쾅 박고, '아, 큰일났다. 어쩌지!'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뜨니 새벽 3시 42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옛날 노래의 가사들은 오래되다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세상에는 영구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 이블 크니블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전문 스턴트맨이 있다. 나는 1960년대에 십대였던 고로 비틀스의 데뷔부터 해산까지를 동시대에 체험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살 때 운전면허를 땄다. 존 어빙이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영화 <사이더 하우스>를 보러 갔다. 저녁 무렵, 새로 나온 닐 영의 CD를 틀어놓고 혼자 주방에 섰다. 마르탱 모네스티에라는 프랑스 저널리스트가 쓴 <자살백과>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스키야키를 좋아하는지? 나는 대학 신입생이 되어 열여덟 살 때 도쿄에 온 이래, 지금까지 줄곧 야쿠르트 스왈로스 팬이다. 이사를 하고 서재 같은 것이 생겨 상자째 창고에 처박아뒀던 오래된 잡지 더미를 겨우 가까이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내 취미는 오래된 LP판 컬렉션. 물론 세상에는 여러 가지 불쾌한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있겠지만, 나는 얼굴사진을 찍히는 일만큼 싫은 게 없다. 샐리 켈러만이란 여배우를 아시는지? 옛날(요즘도 하고 있으려나) 어느 전기면도기 브랜드가 아침 출근길의 샐러리맨을 붙잡아 길거리에서 면도해주는 내용의 실연(實演) 광고를 했다. 이번에는 도넛 이야기다. 드뷔시의 '판화'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서른이 되기 직전에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문득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들어 쓴 것이 공교롭게 한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에 갔다. 옛날에 나는 '크로켓'이라는 크로켓 색깔의 커다란 수고양이를 키웠다. 나쓰메 소세키가 학교 선생님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몇 가지의 소소한 행운이 연달아 찾아올 때가 있다. 나는 간사이 지방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지라시 스시라 하면, 총리가 뭐라건 UN사무총장이 뭐라건 다양한 재료를 채썰기한 다음 단촛물로 조미한 밥에 섞어놓은 컬러풀한 스시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화장실 이야기니 이런 부류의 아름답지 않은 화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지금부터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읽지 않은 편이 좋겠다. 옛날, 내가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 신주쿠 서쪽 출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컴퓨터를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컴퓨터 전원 버튼을 '톡' 누르고 화면이 셋업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아르마 코간이라는 영국의 대중가수가 있었다.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식사 전에 "음료수는 뭘 드시겠습니까?" 묻는다. 나는 거짓말하는 게 영 서툴다. 나는 동물원을 좋아해서 해외여행을 가면 곧잘 그곳 동물원을 찾는다. 자랑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무라카미 씨, 잘생겼네요" 하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보통은 5시 전후), 자주 라디오를 듣는다. 얼마 전, 이른 아침에 센트럴파크를 조깅하다가 저수지 철망 위에 앉아 있는 매 한 마리를 발견했다. 특정 상황에 꼭 머리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최근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식당차란 것 참 좋지 않은나요. 요절하는 게 좋은지, 장수하는 게 좋은지, 한쪽을 고르라고 하면 물론 조금이라도 장수하는 쪽을 강력히 바라겠지만, 문학사전을 펼쳐놓고 동서고금의 작가들의 사진을 보다보면 '너무 장수하는 것도 좀 그렇군'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가 골동품을 좋아해서 여행가는 곳마다 그 지역 앤티크숍에 들른다는 얘기는 앞에서도 쓴 것 같다. 나는 결코 온후한 성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남하고 싸워본 적은 일단 없다. 음, 버드나무를 좋아하시는지? 여러분, 체중계 좋아하세요? 하고 물으면, "그건 그냥 몸무게 재는 기계 아냐. 좋아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하는 답이 돌아올 것 같다. 타이거 우즈 씨, 여전히 강하네요, 라고 말은 하지만, 나는 골프라는 것을 태어나서 한 번도 친 적이 없고 흥미조차 가진 적이 없어서 우즈 씨의 어디가 어떻게 강한지는 전혀 모른다.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얘기를 썼는데, 그 얘기를 계속하자면 내가 골프를 하지 않는 이유 여든일곱 개쯤은 즉석에서 읊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만 들자면, ① 혼자서 할 수 없다. 타인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등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개인적인 습관과 과거의 경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조금 애매한 감이 있지만... 아무튼, 무라카미 라디오의 두 번째와 첫 번째를 읽었을 때에 내가 가졌던 감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왠지 문장 투가 하루키를 따라 하는 것 같은데...;;ㅋㅋ). 일상의 에세이는 책을 읽을 때의 기분이 크게 작용한다. 가능하면 빠르게 보다는 천천히 읽기를 권하고 싶다. 50여 편 안에는 문학이나 영화의 다양한 볼거리가 등장하지만, 특히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한때 보수 성향의 종교에 심취하여 신을 찬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악으로 여겼던 불행한 과거가 있는데, 그래서 소양의 부족으로 그가 말하는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크다.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문장이 마음에 든다.
그 외에...
"수상이 결정됐습니다" 하는 연락을 받고 오토와에 있는 출판사에 가서 담당 편집자를 만났다. 그리고 출판부장(인지 누군지)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평범한 인사였다. 그랬더니 "당신 소설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지만, 뭐 열심히 해보세요"라고 했다. 마치 실수로 입에 넣은 것을 퉤 하고 뱉어내는 듯한 어조였다. 이 인간, 부장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난 척 말할 것까진 없잖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p.104)
직업상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에게 심한 말을 듣는다. 말로 들을 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에서 기사로 맞닥뜨리기도 한다. 칭찬받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비난 쪽이 더 많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는 바보다"라든가, "무라카미는 위선자다"라든가, "무라카미는 거짓말쟁이다"라든가.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그렇게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다(기분이 좋으면 성격이상이지).(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