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우타노 쇼고, 권남희 역,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비채, 2012.

Utano Shogo, [HARU KARA NATSU, YAGATE FUYU], 2011.

  우타노 쇼고의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일본소설을 즐기며 느끼는 감정 중의 하나는 바로 치밀한 심리 묘사로 얻게 되는 마음의 공감이다. 어떤 사건이나 갈등의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현실감 있는 심리 서술은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하고 본성에 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은 남자보다는 여자에 관한 심리였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재인, 2008.)와 미나토 가나에의 [소녀](은행나무, 2010.), [왕복서간](비채, 2012.), [경우](비채, 2013)... 등이다. 서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남성의 마음 심리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마치 거울로 내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1985년 10월 5일생."(p.11)

  네 경우도 그래. 신분증을 보기 전까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딸애와 동갑이란 걸 알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지 않더군. 작년에도 1985년생 누군가가 물건을 훔치다가 잡혔는데, 역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돌려보냈어... 면허증을 보고 깜짝 놀랐어. 10월 5일이었지? 딸아이는 5월 10일이야. 월과 일의 숫자가 바뀐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뭔가 특별하게 느꼈어.(p.80)

  히라타 마코토는 벤쿄도 요시우라 가미마치점의 보안 책임자이다. 그는 근무 중에 매장에서 빵과 주먹밥을 훔친 초라한 몰골의 여자를 만나는데, 우연히도 죽은 딸과 생년이 일치한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는데... 거부감으로 서로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다.

  가슴속에서 말이 넘쳐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했다간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을 알기에 히라타는 꾹 참았다.(p.50)

  역설적이지만, 그걸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거운 짐이었던 에리코의 존재였다.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남겨진 아내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켜준다는 것이 곧 의지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p.132)

  그러나 슬픔은 없었다. 후회, 안타까움, 상실감, 원통함, 아픔, 절망...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감정이라면 허무였다. 히라타의 마음은 어둡고, 깊고, 무겁고, 빛이 닿지 않는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p.154)

  한때는 도쿄 본사에서 임원 승진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전도유망했던 남자는 딸아이의 뺑소니 사망 사고 이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행복한 가정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아내는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남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슬퍼하고 싶어도 슬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싶어도 좌절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내는 결국...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히라타 마코토와 스에나가 마스미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다.(p.287)

  딸을 잃은 상실감,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 육체의 질병...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가족의 해체와 모든 것을 잃게 된 남자는 평생을 가난과 핍박으로 처절하게 살아온 여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운명의 잔혹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호의는 오해를 불러오고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

  이전에 읽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여자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작가의 부정적인 여성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중년의 남자와 딸과 같은 여자의 인연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하나둘 가진 것을 잃어가는 남자의 심리 상태 묘사는 다른 어떤 소설과 비교하여도 단연 최고이다. 평범한 남자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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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우타노 쇼고 지음, 한희선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우타노 쇼고, 한희선 역,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블루엘리펀트, 2012.

Utano Shogo, [YAMORI], 2003.

  우타노 쇼고의 매력...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왜 그토록 우타노 쇼고에 열광하는지 인제야 조금씩 그 이유를 알아 가고 있다. 신 본격 미스터리의 선두 주자로 그가 만드는 트릭은 끊임없는 호기심의 유발로 가독성을 높이고, 전혀 허술하지 않은 마지막 반전은 작품의 중독성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는 집을 소재로 하는 5개의 단편 모음이다. 가장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인 집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기묘한 사건... 과연 밀실 트릭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

  인형사의 집

  집 지키는 사람

  즐거운 나의 집

  산골 마을

  거주지 불명

  작품에 등장하는 5개의 집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꾸민, 외부와 동떨어진 산골 마을의,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집이다. 때로는 몽환적으로 신비감 있게 그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철저히 현실에 기반을 두어 묘사된다. 각각의 단편은 집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범상치 않은 캐릭터와 매우 특이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한순간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만든 인형과 사랑에 빠진 남자, 철거를 앞둔 집을 끝까지 지키려는 아내, 치매로 오로지 과거의 기억에만 의존하는 노인, 오지를 여행하는 관능 소설가, 새로 이사한 집에서 아내를 괴롭히는 기묘한 일들...

  피그말리온은 세상의 여자라는 여자에게는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고 저 여자고 아름다운 얼굴이나 노랫소리와는 정반대로, 제멋대로 오만하고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헤프게 웃어대는 여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매일 묵묵히 일했습니다. 그는 제법 기술 좋은 조각가였습니다.(p.9)

  그는 태어날 때부터 여자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를 혐오하게 된 것은 모친을 잃고 나서부터였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새어머니는 짐승이었다. 여자가 아니라 암컷이었다. 그것을 몸으로 알게 된 그는 마침내 세상의 여자라는 여자는 모두 추접스러운 생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p.11-12)

  어머니는 여자 혼자의 몸으로 나를 키웠다. 낮에는 공사현장의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봉투 붙이기 부업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자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에게는 자주 맞았다. 시험에서 사십 점을 맞았다, 글씨를 못 쓴다, 젓가락을 잡는 방법이 이상하다, 급식 주머니를 들고 오지 않았다, 구두를 흙으로 더럽혔다, 목욕을 오래 한다, 감기에 걸렸다 -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맞았다. 어머니는 나날의 생활에 너무 지쳐서 그 스트레스를 딸한테 풀었다. 나는 어머니의 고생을 알기 때문에 내가 맞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냥 맞았다.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살았다(p.145)

  그 여자는 마치코라고 한다. 마치코는 그를 '시게보'라 부른다. 때로는 '썩을 놈의 노인네'라고, 더 심할 때에는 '빌어먹을 놈'이라고 내뱉는다. 그리고 '빌어먹을 놈'이라 부를 때에는 항상 그를 발로 찬다. 그는 머리를 맞고 뺨을 꼬집히고 손가락을 꺾인다. 목이 졸려 기절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마치코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왜 때리는지 물어도 마치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저항을 해보아도 마치코는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고, 오히려 증오에 가득 차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p.158)

  여태까지 경찰은 어느 정도는 가즈야를 애 취급하고 있었다. 참고인 조사나 취조 때에도 엄하게 추궁하지 않는 여성 수사원에게 맡겼다.

  그러나 결국 남성 베테랑 수사원이 나서게 되었다. 열다섯 살 소년은 겉보기보다 훨씬 교활하고 악랄했다.(p.358)

  '프로버빌리티의 범죄'라는 것이다. 'Probability'란 '있을 법한 것'이라는 의미로 수학이나 철학적으로는 '확률' '개연성'으로 번역된다.(p.374)

  독창적이고 기발한 트릭은 특유의 유머와 위트의 옷을 입고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적인 재미와는 별개로 곳곳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여성관'은 읽는 이를 조금 불편하게 한다. 여자는 악하고, 혐오의 대상이며, 무능하고,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서술한다.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살인이라는 파렴치한 범죄가 일어나지만, 그것을 저지른 초라한 인간의 뒤에는 하나같이 여자가 있다.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

  우연히 만난 한 권의 책으로([납치당하고 싶은 여자], 블루엘리펀트, 2014.) 우타노 쇼고와 신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단순히 하나의 트릭과 반전이 아니라 여기에 또 하나의 뒷이야기를 첨가하는 점층적 이중구조는 오락성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풍성하게 한다. 앞으로의 독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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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당하고 싶은 여자
우타노 쇼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우타노 쇼고, 민경욱 역,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 블루엘리펀트, 2014. 

Utano Shogo, [SARAWARETAIONNA], 1992. 2006.

 

  신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 기막힌 트릭, 숨은 복선과 놀라운 반전, 개성 있는 캐릭터, 여기에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이 첨가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 작가와 독자의 팽팽한 신경전과 두뇌 싸움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다. 사회 부조리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본격 미스터리를 경험하지 못해서인지 우타노 쇼고의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는 상당한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했다.

 

  "저를 납치하고 남편에게 협박 전화를 걸어줬으면 좋겠어요."(p.7)

 

  최근에 '밀실 살인 시리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타노 쇼고는 일본 미스터리를 즐겨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 작품은 1988년 [긴 집의 살인]으로 데뷔한 이후, 1992년에 발표한 그의 초기작이다.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한 여자의 바람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강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납치 미스터리의 경우 범행의 동기 이외에 '납치'와 '감금'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해야 하고, 범행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경찰의 삼엄한 감시 안에서 '몸값'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납치를 주저했던 또 다른 이유는 납치범들이 남긴 교훈, 즉 '몸값 탈취가 목적인 납치의 경우 성공한 예가 거의 없다'라는 것 때문이었다. 소문에는 이 같은 납치가 2차 세계대전 뒤 2백 건 정도 발생했으며, 특히 1970년대 이후로는 매해 열 건 가까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몸값을 손에 넣기도 전에 체포되고 몸값 탈취에 성공한 소수의 사람도 결국 나중에 체포됐다고 한다.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쾌하다.

  일반 범죄는 그 범죄 행위가 완료된 시점에서 경찰이 움직인다. 예를 들어 살인의 경우, 사체를 발견한 제3자가 경찰에 신고해야 수사가 시작된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제3자가 사체를 발견하지 못하면 경찰은 나서지 않는다. 횡령의 경우 역시 회사 돈을 1억을 쓰든 1백억을 쓰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면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몸값 탈취가 목적인 납치는 그 성격상 범죄가 진행되는 도중에 경찰이 등장한다. 범인 스스로가 자신의 범죄를 전화나 문서를 통해 제3자에게 밝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경찰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경찰에게 정중하게 예고장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범죄가 성공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경찰에게 어드밴티지를 주면서 범죄를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괴도 루팡이나 니주멘소 정도일 것이다.(p.82-83)

 

  작가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내용을 전개한다. 어느 날, 함께 점심을 먹고 계산하는 사이에 아내는 사라진다. 그날 오후 늦게 한 통의 협박 전화가 걸려 오는데, 아내의 목숨을 담보로 3천만 엔을 요구한다. 경찰은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하지만, 범인은 음성사서함의 메시지 녹음을 이용하는 등 한 걸음 앞서서 움직인다.

  다른 편에서는, 심부름센터를 찾아온 미모의 여인은 "저를 납치해주세요"라는 다소 황당한 의뢰를 한다. 이것을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가는데...

 

  신 본격 미스터리를 이끌어 가는 작가답게 소설은 전반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만족할만한 재미를 준다. 납치를 계획하고 몸값을 받아내는 장면은 당시로써는 최고의 통신 기술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트릭으로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단순한 납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은 얽히고설켜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 내는 점층적 이중 구조로 되어 있고, 주인공은 함정에 빠져서 이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캐릭터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여성에 관한 차별적인 태도가 살짝 아쉽지만, 수려한 번역과 함께 빠른 사건 진행은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게 한다.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에는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번 번역을 통해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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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어른이 되었다
컬린 토머스 지음, 김소정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컬린 토머스, 김소정 역, [나는 한국에서 어른이 되었다], 북스코프, 2008. 

Cullen Thomas, [BROTHER ONE CELL by Cullen Thomas], 2007.

 

  감옥과 문학의 연관성... 감옥은 어떠한 작가적 영감을 주는 곳인가? [나는 한국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미국 청년의 조금 특별한(?) 한국 방문기이다. 아니 한국의 감옥 체험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1990년대 중반에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과 한국의 교도소에서 3년 6개월의 수감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비록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낯선 외국인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과 더구나 감옥이라는 생소한 곳에서의 생활은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며 다가왔다.

 

  감옥을 소재로 한 문학이 나를 굴복시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 것은 그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 경험을 적은 글이건 감옥 문학 속에는 똑같은 반향이 담겨 있다. 조지 잭슨의 편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30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담은 만델라의 회상록, 앙리 샤리엘의 [빠삐용], 브라이언 키넌의 [악의 요람], 굴락에 관한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회상... 이 모두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동방에서 돌아온 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 마르코 폴로는 감방의 갈라진 틈으로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이 겼었던 경험담을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이런 글들을 읽는 동안 나도 내 경험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들에게서 진정한 형제애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중에는 내가 읽은 모든 것 가운데 최고에 속하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p.312-313)

 

  컬린 토머스는 1970년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빙햄튼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스물두 살이던 1993년 영어 강사로 한국에 왔다. 흔히 말하는 학원가의 외국인 강사로 일하다가 1994년 필리핀 여행을 한다. 그는 외국인 친구들이 마약을 몰래 들여와 한몫 챙기는 것을 보고 여행 중에 해시시를 구매하여 우편으로 발송한다. 서울의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으려다가 잠복하는 형사에게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수용된다. 서울 구치소를 거쳐 의정부 교도소와 대전 교도소에서 형을 살게 되는데...

 

  오래전 선인(仙人)이 세운 나라 한국은 내게서 많은 것을 가져갔다. 실제로 무엇을 빼앗아 가지는 않았지만 맹렬한 힘으로 나를 산산이 부수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밀어붙였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국이 내게 알려주었다. 한국은 내가 얼마든지 실패할 수도 있는 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세상사에 정통한 지혜로운 어른이 아니라 고작 스물세 살짜리 미숙한 청년이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내 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에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다.(p.14)

 

  순진하고 평범한 미국의 중산층 청년은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고향에서 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는데... 자유롭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타임스 구인 광고를 통해 한국에 오기까지, 7개월간의 무료한 강사 생활, 외국인 친구들과의 대범한 일탈, 체포와 재판의 과정, 그리고 수감 생활과 그가 만난 사람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여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인들이 사회 계층을 엄격하게 따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디서 사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어떤 직장을 다니는지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 같은 사고방식은 수백 년 동안 좁은 땅에 살면서 유교라는 막강한 권력 아래 형성된 가치관이었다.(p.77)

 

  감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죄수들은 초라하고 악하고 기이한 인생 속에서 결국 패배한 자들일 거라는 내 선입견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빌리는 원칙이 분명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말과 사고방식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 빌리는 언제나 우리들의 경험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썼고 그 덕분에 우울해할 틈도 없었다. 나도 그처럼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내 상황을 받아들인 다음 당당하게 맞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p.126)

 

  "돈이 있어야 해. 돈이 없으면 힘도 가질 수 없어."

  호세의 진지한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마약을 몰래 들여온 이유도 결국은 돈 때문이며 이곳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돈 때문에 잡혀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의 목표는 돈과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제소자보다 내가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다른 제소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나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고 나는 그저 실수를 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내가 더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나는 미국의 중산층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든지 다른 삶을 택할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을 위해 범죄를 저지를 필요도 없었다. 내가 죄를 저지른 것은 순전히 내 이익과 만족을 위해서였다.(p.136-137)

 

  한국인들은 결코 밥을 혼자 먹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라면을 끓여 혼자 작업대에 앉아 먹고 있으면 그들은 의아해하면서 다가와 내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왜 혼자서 먹는지 묻곤 했다. 어쩌면 그들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른다. 한국인 재소자들은 함께 노래했고 함께 편지를 썼으며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녔다. 그들은 따뜻하게 서로를 안아주었고 서로를 다독여주었다. 서로 면도도 해주고 족집게로 다른 사람의 털을 뽑아주기도 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목욕탕에 온 사람들이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도 자주 봤고 지하쳘에 앉을 자리가 없으면 대학생 같은 젊은이가 친구의 무릎에 앉아 있는 모습도 자주 봤다. 기이하게도 한국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자란 문화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나는 어느 정도 부러움까지 느꼈다. 그것은 그들의 동지애였고, 형제애였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거대한 가족의 일원이고 전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의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을 알고 있다는 보편적인 자신감과 단체로서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기꺼이 맺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확신과 저력은 우리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 미국인들과는 달리 한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그저 같은 국가를 공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국민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런 확신은 자부심과 애국심, 배타성을 낳고 나아가 동질성의 힘, 희생정신을 보여주었다.(p.366-367)

 

  그가 만난 한국은 유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완전히 경직된 사회였다.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시하고 겉치레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나라였다. 강압적인 심문은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백인이고 미국인이기에 그나마 나은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그는 이방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가고, 다른 수감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이해하고 성장한다.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사회나 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고 싶다면 감옥 안의 사회를 살펴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국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대로 교도소를 살펴보는 이가 있다면 그 안에서 수많은 빛과 미덕, 인간애, 품위, 고통을 나누는 모습, 심지어 평화까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제가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한국 교도소는 저를 철저히 겸손하게 만들었고 새사람이 되게 해주었으며, 그리하여 더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습니다.(p.8-9)

 

  탁월한 리더십과 화려한 성공 스토리가 주목받는 시대에 한 외국인의 실패담은 그리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다른 문화와 가혹한 환경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생존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처절한 경험은 문학의 옷을 입고 진솔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겪은 3년 6개월의 시련은 한국을 좀 더 제대로 알게 해주었으며, 인간과 인생에 관한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좋은 시설의 미국 교도소보다 추위와 더위의 고통에도 한국 교도소에서의 수감이 더 좋은 기회였음을 말한다. 그의 글을 통해서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있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배타성을 어떻게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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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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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브라우티건, 김성곤 역,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2013. 

Richard Brautigan, [TROUT FISHING IN AMERICA], 1967.

 

  고전이 주는 즐거움과 난해함...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제목의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목가적 생태소설이다. 산업과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송어낚시와 연관된 47개의 단편은 풍자와 해학으로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지금은 최대한 환경을 고려하여 개발의 조화를 맞추려고 하지만, 과거 5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젊은 반항아들은 이 소설에 담긴 강렬한 반체제 정신과 기계주의와 물질주의의 비판 그리고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함에 매료되어 마치 성서처럼 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작가 자신은 실제 여행을 근거로 써나간 이 소설에서 브라우티건은 아메리칸 드림과 서구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수많은 홈리스들,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좌절한 화가들, 제대로 못 먹어서 탈장에 걸린 어린아이, 쿨에이드 주스를 아끼느라 물을 타 희석시켜 마시는 아이, 그리고 불구가 되어 휠체어를 탄 베트남전 상이용사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러한 빈자들과 사회적 실패자들을 전혀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 FBI를 미행시켜 불온사상을 감시하는 정부, 그리고 한때 송어가 뛰놀았던 하천을 환경오염과 독극물 방류로 죽어가게 만든 기계문명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p.13-14)

 

  어쩌면 시대의 아이콘으로, 공허함에 허덕이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은 이 책은 실제로 미국의 진보주의와 생태주의에 끼친 영향은 실제로 엄청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곳곳에 커다란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내 소설 속에서 송어는 사람으로, 장소로, 때로는 펜으로 변하는 등 일정한 모양이 없는 프로테우스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일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 이를테면 유년기의 꿈 같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고 탐색해야 한다._리처드 브라우티건(p.21)

 

  소설 안에는 수많은 송어낚시의 풍경이 그려진다. 하지만 문제는 충실한 번역을 앞에 두고도 책을 읽는 내내 상징과 은유의 난해함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말대로 짤막한 단편 안의 송어는 때로는 사람으로, 어느 장소로, 어떤 물건으로 등장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목가적 희망을 잘 대변하고 있다. 독자에 관한 배려일까? 번역자인 김성곤 교수는 책 후반에 문학적 해설과 보충설명을 수록하였는데, 실제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표지에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배고픈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샌드위치를 나누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어느 날 오후, 내 친구가 샌드위치 포장을 열고 보니 거기에는 시금치 잎 하나만 달랑 들어 있었다. 그것뿐이었다.(p.24-25)

 

  그러자 두 화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신병원은 얼마나 따뜻한지에 대해, 그리고 그곳에 있는 텔레비전, 부드러운 침대와 깨끗한 이불, 으깬 감자 위에 부은 햄버거 그레이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여자 환자와의 댄스, 깨끗한 옷, 안전 면도기, 그리고 아름다운 젊은 간호 실습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 그렇다. 정신병원에는 미래가 있었다. 거기서 보내는 겨울은 결코 완전한 손해가 아니었다.(p.52)

 

  이제 그 늙은이는 죽고 없다. 헤이만 하천은 엉터리 개척자였던 찰스 헤이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곳은 가난하고 추하고 끔찍해서 사람들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 1876년 그는 쓸모없는 언덕 하나를 간척해 작은 하천가에 움막을 지었다. 나중에 그 하천은 헤이만 하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그가 죽던 해 송어들은 헤이만 하천에 올라오지 않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노인이 죽었다면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송어들은 생각했다.

  ... 헤이만 씨가 죽은 지 20년 후, 산림청 사람들이 그 근처 하천에 송어들을 풀어놓았다.

  "여기다가도 좀 풀어놓지."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깡통에 가득 담긴 송어들을 풀어놓았는데, 송어들은 물에 닿자마자 허연 배를 뒤집고 하천 위에 죽어 떠 있었다.(p.71-73)

 

  인간의 필요를 표현한다면, 나는 언제나 '마요네즈'로 끝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p.246)

 

  목가적이고 생태학적인 메시지의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마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함축적이고 번득이는 재치가 넘친다. 파격적인 표현력으로 은유와 상징의 교과서라는 느낌도 들었고... 난해함이라는 장애물을 잘 극복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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