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우타노 쇼고, 권남희 역,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비채, 2012.

Utano Shogo, [HARU KARA NATSU, YAGATE FUYU], 2011.

  우타노 쇼고의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일본소설을 즐기며 느끼는 감정 중의 하나는 바로 치밀한 심리 묘사로 얻게 되는 마음의 공감이다. 어떤 사건이나 갈등의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현실감 있는 심리 서술은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하고 본성에 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은 남자보다는 여자에 관한 심리였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사쿠라바 가즈키의 [내 남자](재인, 2008.)와 미나토 가나에의 [소녀](은행나무, 2010.), [왕복서간](비채, 2012.), [경우](비채, 2013)... 등이다. 서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는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남성의 마음 심리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마치 거울로 내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1985년 10월 5일생."(p.11)

  네 경우도 그래. 신분증을 보기 전까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딸애와 동갑이란 걸 알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지 않더군. 작년에도 1985년생 누군가가 물건을 훔치다가 잡혔는데, 역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돌려보냈어... 면허증을 보고 깜짝 놀랐어. 10월 5일이었지? 딸아이는 5월 10일이야. 월과 일의 숫자가 바뀐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뭔가 특별하게 느꼈어.(p.80)

  히라타 마코토는 벤쿄도 요시우라 가미마치점의 보안 책임자이다. 그는 근무 중에 매장에서 빵과 주먹밥을 훔친 초라한 몰골의 여자를 만나는데, 우연히도 죽은 딸과 생년이 일치한다. 이것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되는데... 거부감으로 서로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다.

  가슴속에서 말이 넘쳐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마디라도 했다간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을 알기에 히라타는 꾹 참았다.(p.50)

  역설적이지만, 그걸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무거운 짐이었던 에리코의 존재였다. 자신이 여기서 쓰러지면 남겨진 아내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켜준다는 것이 곧 의지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p.132)

  그러나 슬픔은 없었다. 후회, 안타까움, 상실감, 원통함, 아픔, 절망...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감정이라면 허무였다. 히라타의 마음은 어둡고, 깊고, 무겁고, 빛이 닿지 않는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p.154)

  한때는 도쿄 본사에서 임원 승진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전도유망했던 남자는 딸아이의 뺑소니 사망 사고 이후에 모든 것이 뒤바뀐다. 행복한 가정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아내는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남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슬퍼하고 싶어도 슬퍼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싶어도 좌절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내는 결국...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히라타 마코토와 스에나가 마스미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다.(p.287)

  딸을 잃은 상실감,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 육체의 질병...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가족의 해체와 모든 것을 잃게 된 남자는 평생을 가난과 핍박으로 처절하게 살아온 여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운명의 잔혹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호의는 오해를 불러오고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

  이전에 읽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여자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져 작가의 부정적인 여성관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중년의 남자와 딸과 같은 여자의 인연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하나둘 가진 것을 잃어가는 남자의 심리 상태 묘사는 다른 어떤 소설과 비교하여도 단연 최고이다. 평범한 남자의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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