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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리처드 브라우티건, 김성곤 역, [미국의 송어낚시], 비채, 2013.
Richard Brautigan, [TROUT FISHING IN AMERICA], 1967.
고전이 주는 즐거움과 난해함...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제목의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목가적 생태소설이다. 산업과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송어낚시와 연관된 47개의 단편은 풍자와 해학으로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지금은 최대한 환경을 고려하여 개발의 조화를 맞추려고 하지만, 과거 5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젊은 반항아들은 이 소설에 담긴 강렬한 반체제 정신과 기계주의와 물질주의의 비판 그리고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함에 매료되어 마치 성서처럼 이 책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작가 자신은 실제 여행을 근거로 써나간 이 소설에서 브라우티건은 아메리칸 드림과 서구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수많은 홈리스들, 술주정뱅이로 전락한 좌절한 화가들, 제대로 못 먹어서 탈장에 걸린 어린아이, 쿨에이드 주스를 아끼느라 물을 타 희석시켜 마시는 아이, 그리고 불구가 되어 휠체어를 탄 베트남전 상이용사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러한 빈자들과 사회적 실패자들을 전혀 구원하지 못하는 교회, FBI를 미행시켜 불온사상을 감시하는 정부, 그리고 한때 송어가 뛰놀았던 하천을 환경오염과 독극물 방류로 죽어가게 만든 기계문명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p.13-14)
어쩌면 시대의 아이콘으로, 공허함에 허덕이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은 이 책은 실제로 미국의 진보주의와 생태주의에 끼친 영향은 실제로 엄청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는 우리의 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곳곳에 커다란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내 소설 속에서 송어는 사람으로, 장소로, 때로는 펜으로 변하는 등 일정한 모양이 없는 프로테우스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일 수도 있다. 사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 이를테면 유년기의 꿈 같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고 탐색해야 한다._리처드 브라우티건(p.21)
소설 안에는 수많은 송어낚시의 풍경이 그려진다. 하지만 문제는 충실한 번역을 앞에 두고도 책을 읽는 내내 상징과 은유의 난해함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말대로 짤막한 단편 안의 송어는 때로는 사람으로, 어느 장소로, 어떤 물건으로 등장하여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목가적 희망을 잘 대변하고 있다. 독자에 관한 배려일까? 번역자인 김성곤 교수는 책 후반에 문학적 해설과 보충설명을 수록하였는데, 실제로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미국의 송어낚시>의 표지에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배고픈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든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샌드위치를 나누어주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어느 날 오후, 내 친구가 샌드위치 포장을 열고 보니 거기에는 시금치 잎 하나만 달랑 들어 있었다. 그것뿐이었다.(p.24-25)
그러자 두 화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신병원은 얼마나 따뜻한지에 대해, 그리고 그곳에 있는 텔레비전, 부드러운 침대와 깨끗한 이불, 으깬 감자 위에 부은 햄버거 그레이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여자 환자와의 댄스, 깨끗한 옷, 안전 면도기, 그리고 아름다운 젊은 간호 실습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 그렇다. 정신병원에는 미래가 있었다. 거기서 보내는 겨울은 결코 완전한 손해가 아니었다.(p.52)
이제 그 늙은이는 죽고 없다. 헤이만 하천은 엉터리 개척자였던 찰스 헤이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곳은 가난하고 추하고 끔찍해서 사람들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 1876년 그는 쓸모없는 언덕 하나를 간척해 작은 하천가에 움막을 지었다. 나중에 그 하천은 헤이만 하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그가 죽던 해 송어들은 헤이만 하천에 올라오지 않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노인이 죽었다면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송어들은 생각했다.
... 헤이만 씨가 죽은 지 20년 후, 산림청 사람들이 그 근처 하천에 송어들을 풀어놓았다.
"여기다가도 좀 풀어놓지."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그러지 뭐."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들은 깡통에 가득 담긴 송어들을 풀어놓았는데, 송어들은 물에 닿자마자 허연 배를 뒤집고 하천 위에 죽어 떠 있었다.(p.71-73)
인간의 필요를 표현한다면, 나는 언제나 '마요네즈'로 끝나는 책을 쓰고 싶었다.(p.246)
목가적이고 생태학적인 메시지의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마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함축적이고 번득이는 재치가 넘친다. 파격적인 표현력으로 은유와 상징의 교과서라는 느낌도 들었고... 난해함이라는 장애물을 잘 극복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