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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요 네스뵈, 문희경 역, [박쥐], 비채, 2014.
Jo Nesbo, [THE BAT](FLAGGERMUSMANNEN), 1997.
오늘날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그가 만들어낸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10권의 시리즈 중에서 첫 번째 [박쥐]를 드디어 만났다. 작가는 글을 쓸 때에 이미 다음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국내 번역의 차이로 세 번째인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와 일곱 번째인 [스노우맨](비채, 2012.)을 먼저 읽어서, 겉으로는 중년의 나이에 유능한 경감(반장)으로 수사를 지휘하는 마초적인 모습과는 달리 내면으로는 서서히 파괴돼 가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인제야 그 원인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마치 조각 맞추기에서 남겨진 빈칸의 조각을 끼워 넣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에 관한 깊은 이해로 더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박쥐] 2014년 2월 출간
② [바퀴벌레]
③ [레드브레스트] 2013년 3월 출간
④ [네메시스] 2014년 2월 출간
⑤ [악마의 별]
⑥ [리디머]
⑦ [스노우맨] 2012년 2월 출간
⑧ [레오파드] 2012년 10월 출간
⑨ [팬텀]
⑩ [폴리스]
"노르웨이 금발 아가씨들이 더 살해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여자는 싱긋 웃으며 특수 비자에 쾅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p.13)
시작은 사뭇 달랐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서쪽에 있는 눈의 도시 오슬로가 아니라 남반부의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발의 노르웨이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되어 바닷가 절벽에서 반라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양국의 공조 수사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해리 홀레는 시드니 경찰서로 파견된다. 그리고 현장의 안내 및 수행 파트너로 애버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의) 형사가 배속되는데...
"애버리진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완전히 내몰리고 애버리진의 이해관계와 문화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인 토론에서조차 소외당하고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애버리진 미술품을 집 안에 걸어두는 걸로 할 일을 다 한 줄 알죠. 게다가 우리 깜둥이들은 실업자 행렬은 물론 자살률과 범죄 문제에 빈번히 등장합니다. 만약 당신이 애버리진이라면 교도소에 들어갈 확률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나머지 인구보다 스물여섯 배나 높아요. 잘 생각해봐요, 해리 홀리."(p.25)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라고 좀 웃기는 개념이 있어요.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와서 경작지가 많지 않은 걸 보고 만든 개념이에요. 애버리진들이 감자밭에서 반나절을 지키고 서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했지요. 그런데 애버리진은 자연을 속속들이 알았어요. 어디 가면 먹을 게 나는지 알고 제철에 찾아가 풍요롭게 먹고 살았죠. 그런데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국인들이 이곳을 임자 없는 땅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이게 테라 눌리우스예요. 그리고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영국인들은 애버리진의 입장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 마음대로 새로 들어온 정착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나눠줬어요. 애초에 애버리진들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니까요."(p.138)
"여러 단계를 거쳐서 다양한 정책이 나왔어요. 저는 강제 도시화 세대에 속해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부는 과거의 정책에 변화를 줘서 원주민을 소외시키지 말고 흡수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우리의 거주지와 심지어 결혼 상대까지 통제하는 방식으로 강제 흡수하려고 했죠. 많은 원주민이 도시로 이주해와 유럽식 도시 문화에 적응해야 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이었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온갖 나쁜 행위에 관한 통계에서 우리가 상위를 차지했어요. 알코올중독, 실업, 이혼, 매춘, 범죄, 폭력, 마약, 뭐든지 맨 윗자리에 우리가 있었어요. 애버리진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줄곧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패배자 취급자 취급을 받아요."(p.198)
"앤드류는 전쟁 전에 태어났어요. 당시의 국가 정책은 우리가 무슨 위험한 생물체라도 되는 양 우리를 '보호'하는 거였어요. 그중에서도 땅을 소유하거나 일자리를 얻는 데 제약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장 해괴한 법은, 아버지가 애버리진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면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애버리진 엄마한테서 자식을 빼앗도록 보장하는 법이었어요. 나는 내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해, 썩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나마 할 말은 있어요. 앤드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부모를 본 적도 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정부에서 데려가 고아원에 집어넣었으니까..."(p.198-199)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대 역사에서 애버리진에 관한 국가정책은 매우 충격적이다. 강제로 땅을 빼앗고, 미개한 원주민의 아이를 문명화한다는 목적으로 부모로부터 강탈해 고아원으로 보냈다. 강제로 거주지를 바꾸며 공장이나 농장의 일꾼으로 부려 먹고, 생활을 통제하여 유럽식 삶을 주입했다. 그 결과 현재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는데... 해리는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애버리진의 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더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전통과 관련된 세 가지 전설을 서사 구조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애버리진한테 박쥐는 죽음을 상징해요. 알고 있어요?"
...
"4만 년이나 외따로 떨어져 살아온 땅을 생각해봐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고사하고 유대교도 접해본 적이 없는 땅. 광활한 바다가 가장 인접한 대륙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만의 창세기, 이를테면 꿈의 시대를 만들었어요. 최초의 인간은 버룩부른이었어요. 창조주 바이아메가 만든 사람이죠..."(p.70)
"여기 이 앤드류 삼촌이 고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을 들려주지요. 정확히 말해서 거대한 뱀 버버와 왈라의 이야기예요."(p.106-107)
"갈게요. 가기 전에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죠. 우리 문화에 대한 당신의 무지를 일깨워줄 이야기. 검정 뱀이라고 들어 봤어요?"(p.203)
외부의 세계에서 백인 이민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략 4만 년간 신비의 대륙은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와 맞붙을 만한 창조 신화가 있고, 부족 사이에 전해오는 남녀의 사랑과 복수를 담은 왈라-무라-버버의 전설이 있다. 그리고 맹독을 자랑하는 검정 뱀에 관한 이야기까지... 세 가지 전설은 사건을 수사하는 해리에게 오늘의 현실로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살인 사건을 하나 해결할 때마다 조금씩 타격을 입어요. 불행히도 인간사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보다 비참하거나 우울한 사연이 더 많고 특별한 동기도 없거든요. 처음에는 나도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때는 그냥 쓰레기 수거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인범들은 대부분 불쌍한 인간들이고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른 이유를 열 가지 이상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결국 모든 건 좌절감으로 귀결돼요. 그들이 타인을 같이 끌어내리지 않고 자기를 파멸시켜도 어차피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 아직도 감상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p.75-76)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더는 용납하지 못할 때 처벌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 같아. 아무튼 나도 그러고 싶었어. 처벌받고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싶었어. 내 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한테 벌을 내릴 사람이 없었어. 내게 발길질한 사람도 없었어. 공식적으로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언론에는 내가 근무 중에 중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에게 표창까지 받은 걸로 보도됐어. 그래서 나 스스로 벌주기로 한 거야.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리기로. 살아남아 술을 끊기."(p.158)
소설 안에는 금발 미녀, 마약, 동성애자, 강간, 연쇄살인, 그리고 단서를 추적하는 강력반 형사가 등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 관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사랑과 복수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로운 건, 해리 홀레에 관한 많은 정보가 녹아 있어서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지? 아니 결국에는 술에 의존하게 되는지? 사건을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왜 육체는 멍들고 영혼은 메마르고 파괴되어 가는지? 왜 사랑을 두려워하고 결혼을 꺼리는지? 아련한 옛사랑의 기억을 포함해서... 해리 홀레 시리즈 전설의 시작에는 해리 홀레에 관한 많은 것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