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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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 문희경 역, [박쥐], 비채, 2014.

Jo Nesbo, [THE BAT](FLAGGERMUSMANNEN), 1997.

  오늘날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노르웨이의 작가 요 네스뵈, 그가 만들어낸 형사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10권의 시리즈 중에서 첫 번째 [박쥐]를 드디어 만났다. 작가는 글을 쓸 때에 이미 다음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국내 번역의 차이로 세 번째인 [레드브레스트](비채, 2013.)와 일곱 번째인 [스노우맨](비채, 2012.)을 먼저 읽어서, 겉으로는 중년의 나이에 유능한 경감(반장)으로 수사를 지휘하는 마초적인 모습과는 달리 내면으로는 서서히 파괴돼 가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인제야 그 원인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마치 조각 맞추기에서 남겨진 빈칸의 조각을 끼워 넣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어지는 주인공 캐릭터에 관한 깊은 이해로 더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해리 홀레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박쥐] 2014년 2월 출간

  ② [바퀴벌레]

  ③ [레드브레스트] 2013년 3월 출간

  ④ [네메시스] 2014년 2월 출간

  ⑤ [악마의 별]

  ⑥ [리디머]

  ⑦ [스노우맨] 2012년 2월 출간

  ⑧ [레오파드] 2012년 10월 출간

  ⑨ [팬텀]

  ⑩ [폴리스]

  "노르웨이 금발 아가씨들이 더 살해당하지 말아야 할 텐데요?"

  여자는 싱긋 웃으며 특수 비자에 쾅 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p.13)

  시작은 사뭇 달랐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서쪽에 있는 눈의 도시 오슬로가 아니라 남반부의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발의 노르웨이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되어 바닷가 절벽에서 반라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양국의 공조 수사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해리 홀레는 시드니 경찰서로 파견된다. 그리고 현장의 안내 및 수행 파트너로 애버리진(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출신의) 형사가 배속되는데...

  "애버리진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완전히 내몰리고 애버리진의 이해관계와 문화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인 토론에서조차 소외당하고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애버리진 미술품을 집 안에 걸어두는 걸로 할 일을 다 한 줄 알죠. 게다가 우리 깜둥이들은 실업자 행렬은 물론 자살률과 범죄 문제에 빈번히 등장합니다. 만약 당신이 애버리진이라면 교도소에 들어갈 확률이 오스트레일리아의 나머지 인구보다 스물여섯 배나 높아요. 잘 생각해봐요, 해리 홀리."(p.25)

  "테라 눌리우스(Terra nullius)라고 좀 웃기는 개념이 있어요.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와서 경작지가 많지 않은 걸 보고 만든 개념이에요. 애버리진들이 감자밭에서 반나절을 지키고 서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했지요. 그런데 애버리진은 자연을 속속들이 알았어요. 어디 가면 먹을 게 나는지 알고 제철에 찾아가 풍요롭게 먹고 살았죠. 그런데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국인들이 이곳을 임자 없는 땅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이게 테라 눌리우스예요. 그리고 테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영국인들은 애버리진의 입장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 마음대로 새로 들어온 정착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나눠줬어요. 애초에 애버리진들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으니까요."(p.138)

  "여러 단계를 거쳐서 다양한 정책이 나왔어요. 저는 강제 도시화 세대에 속해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정부는 과거의 정책에 변화를 줘서 원주민을 소외시키지 말고 흡수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우리의 거주지와 심지어 결혼 상대까지 통제하는 방식으로 강제 흡수하려고 했죠. 많은 원주민이 도시로 이주해와 유럽식 도시 문화에 적응해야 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이었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온갖 나쁜 행위에 관한 통계에서 우리가 상위를 차지했어요. 알코올중독, 실업, 이혼, 매춘, 범죄, 폭력, 마약, 뭐든지 맨 윗자리에 우리가 있었어요. 애버리진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줄곧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패배자 취급자 취급을 받아요."(p.198)

  "앤드류는 전쟁 전에 태어났어요. 당시의 국가 정책은 우리가 무슨 위험한 생물체라도 되는 양 우리를 '보호'하는 거였어요. 그중에서도 땅을 소유하거나 일자리를 얻는 데 제약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장 해괴한 법은, 아버지가 애버리진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면 정부에서 합법적으로 애버리진 엄마한테서 자식을 빼앗도록 보장하는 법이었어요. 나는 내가 어디 출신인지에 대해, 썩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그나마 할 말은 있어요. 앤드류한테는 아무것도 없어요. 부모를 본 적도 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정부에서 데려가 고아원에 집어넣었으니까..."(p.198-199)

  오스트레일리아의 근대 역사에서 애버리진에 관한 국가정책은 매우 충격적이다. 강제로 땅을 빼앗고, 미개한 원주민의 아이를 문명화한다는 목적으로 부모로부터 강탈해 고아원으로 보냈다. 강제로 거주지를 바꾸며 공장이나 농장의 일꾼으로 부려 먹고, 생활을 통제하여 유럽식 삶을 주입했다. 그 결과 현재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는데... 해리는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 애버리진의 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더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전통과 관련된 세 가지 전설을 서사 구조로 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애버리진한테 박쥐는 죽음을 상징해요. 알고 있어요?"

  ...

  "4만 년이나 외따로 떨어져 살아온 땅을 생각해봐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고사하고 유대교도 접해본 적이 없는 땅. 광활한 바다가 가장 인접한 대륙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만의 창세기, 이를테면 꿈의 시대를 만들었어요. 최초의 인간은 버룩부른이었어요. 창조주 바이아메가 만든 사람이죠..."(p.70)

  "여기 이 앤드류 삼촌이 고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을 들려주지요. 정확히 말해서 거대한 뱀 버버와 왈라의 이야기예요."(p.106-107)

  "갈게요. 가기 전에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죠. 우리 문화에 대한 당신의 무지를 일깨워줄 이야기. 검정 뱀이라고 들어 봤어요?"(p.203)

  외부의 세계에서 백인 이민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략 4만 년간 신비의 대륙은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와 맞붙을 만한 창조 신화가 있고, 부족 사이에 전해오는 남녀의 사랑과 복수를 담은 왈라-무라-버버의 전설이 있다. 그리고 맹독을 자랑하는 검정 뱀에 관한 이야기까지... 세 가지 전설은 사건을 수사하는 해리에게 오늘의 현실로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살인 사건을 하나 해결할 때마다 조금씩 타격을 입어요. 불행히도 인간사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보다 비참하거나 우울한 사연이 더 많고 특별한 동기도 없거든요. 처음에는 나도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때는 그냥 쓰레기 수거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살인범들은 대부분 불쌍한 인간들이고 그들이 그 지경에 이른 이유를 열 가지 이상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결국 모든 건 좌절감으로 귀결돼요. 그들이 타인을 같이 끌어내리지 않고 자기를 파멸시켜도 어차피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 아직도 감상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p.75-76)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더는 용납하지 못할 때 처벌받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것 같아. 아무튼 나도 그러고 싶었어. 처벌받고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싶었어. 내 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한테 벌을 내릴 사람이 없었어. 내게 발길질한 사람도 없었어. 공식적으로 나는 술에 취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언론에는 내가 근무 중에 중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경찰서장에게 표창까지 받은 걸로 보도됐어. 그래서 나 스스로 벌주기로 한 거야.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내리기로. 살아남아 술을 끊기."(p.158)

  소설 안에는 금발 미녀, 마약, 동성애자, 강간, 연쇄살인, 그리고 단서를 추적하는 강력반 형사가 등장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 관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사랑과 복수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로운 건, 해리 홀레에 관한 많은 정보가 녹아 있어서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지? 아니 결국에는 술에 의존하게 되는지? 사건을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왜 육체는 멍들고 영혼은 메마르고 파괴되어 가는지? 왜 사랑을 두려워하고 결혼을 꺼리는지? 아련한 옛사랑의 기억을 포함해서... 해리 홀레 시리즈 전설의 시작에는 해리 홀레에 관한 많은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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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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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권남희 역, [더 스크랩], 비채, 2014.

Murakami Haruki, [THE SCRAP_NATSUKASHII NO 1980 NEN DAI], 1987.

  나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가 더 좋다. 그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서...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의 소설을 제대로 완독한 적이 없다. 언젠가 여느 독자처럼 늦바람이 들어 그의 글에 중독된다면, 지금 이러한 얘기는 모두 펄 소리가 되겠지만서도... 아무튼, 소설과는 다른 일상의 진솔한 기록은 잔잔하게 내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고 글을 써서 살아가는 유명 작가의 좋아하는 소설, 즐겨 듣는 음악, 찾아보는 영화, 여행, 음식, 취미, 개인의 취향과 이런저런 소견... 등 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1980년대를 추억한다는 [더 스크랩]은 '무라카미 라디오'(①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비채, 2013. ②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③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비채, 2013.) 이후에 만난 에세이이다.

  나는 1980년대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에 최루탄 가스의 매캐함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공기를 마셔야 했고, 강남의 8학군에서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에 개봉한, 주인공이 성적의 문제로 비관 자살하는 사회 고발성 하이틴 영화는 모두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가정 경제의 위기로 수도권 근교로 이사하고 친구가 없었던 그저 그런 시기였다. 변두리에서 소외된 문화의 욕구 때문이었을까? 제대로 가진 것은 없어도 무언가를 손에 들고 읽는 습관을 들인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연재하는 걸 싫어하고,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p.4)

  글쓰기를 유혹하는 하루키의 [더 스크랩]은 연작을 목적으로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미국의 인기 잡지를 출판사와 작가가 공모(?)하여 인위적으로 추출해낸 작품이다. 물론 그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하루키의 눈으로 들어가 뇌에서 걸러진 소스는 다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하루키의 팬 끝에서 되살아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81편의 모음은 다시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나에게 다가 와 마치 유년 시절의 문화적 빈곤감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에스콰이어> 12월호는 [호밀밭의 파수꾼] 출판 삼십 주년을 기념해서 '중년을 맞이한 파수꾼'이라는 작은 특집기사를 꾸몄다. 소설도 생일을 축하받다니 대단한 일이다. 흔히 이십 년 지나도 평가가 변하지 않으면 그 소설은 진짜라고 하는데, 삼십 년이 지난 [호밀밭의 파수꾼]은 [모비딕]이나 [위대한 개츠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문학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분위기가 농후해졌다.

  ...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둬도 한 달에 이삼만 부가 팔리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p.14, 16)

  그것과 달리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꾸밈없이 담담한 문체의 소설이다. 그러나 카버의 문장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돌진해간다.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원에 들어간 주인공은 같은 환자 처지인 청년과 마음을 주고받는 얘기인데, 어두운 소재이지만 비장하게 흐르지 않는 면이 좋다. 술술 읽히는 데다 다 읽고 나면 마음에 뭔가가 남는다. 훌륭한 단편이란 그런 것이다.(p.27-28)

  확실히 후기의 브라우티건은 초기 작품에서처럼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한 상상의 비약은 잃었지만, 그래도 역시 여타의 작가는 흉내낼 수 없는 차분하고 부드럽고 재미가 넘치는 독자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하면 작가는 뒷감당이 힘들어진다. 나 같은 사람은 적당히 팔리니 적당히 즐겁게 지낼 수 있지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군.(p.179)

  에릭 '러브스토리' 시걸은 요전에 [더 클래스]라는 장편소설을 출판했지만, 시걸의 대부분 책이 그렇듯이 서평은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좋은 서평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TV프로듀서들이 판권 쟁탈전을 펼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비평으로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해 "유감이다"라고 얘기한다. 동업자로서는 딱하다 싶지만, 동시에 후회하지 않는 것도 작가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p.224)

  하루키는 본인이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고,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삼십 대 중반의 작가는 J.D. 샐린저와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언급하고, 재미있게 읽은 단편 소설을 소개하며, 세상을 떠난 작가를 추모하고, 작가로서의 직업적 동질감을 솔직 담백하게 묘사한다. 그가 수집한 1980년대는 다양한 재즈 음악과 마이클 잭슨이 있고,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있으며, 영화 <스타워즈>와 <E.T.>가 있다. 작가의 거침없는 호기심은 성적인 담론을 포함해서 유명인의 천문학적인 연봉, 다양한 삶의 방식, 갖가지 설문 조사와 통계, 연예 가십을 말한다. 그리고 항상 개인적인 관심이 충만한 야구와 마라톤에 관한 애정도 담겨 있다.

  그는 서두에서 이 책을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기는 기분으로 읽어달라고 한다. 솔직히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해서 그의 글맛을 기대한 독자는 '인용'과 '소감'이라는 스크랩 형식이라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바람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책 뒤에 도쿄 디즈니랜드 관람기인 <걱정 마세요, 재미있으니까>와 1984년 LA 올림픽과 관련하여 <올림픽과 별로 관계없는 올림픽 일기>를 첨부하여 문학적인 갈증을 해갈하고 있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30년 뒤를 대비해서 일기를 쓰고 미리 이것저것을 수집해 놓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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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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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김욱동 역, [오 헨리 단편선], 비채, 2012.

O. Henry, [THE SELECTED WORKS OF O. HENRY].

  [오 헨리 단편선]은, 작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름의 기분을 내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다. 내 책상 한쪽 구석에서, 가방 모퉁이에서... 항상 손이 닿을 거리에 놓여있던 책은 한 해가 지나고서야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었다. 오 헨리라는 익숙한 이름, 다채로운 구성으로 선별된 30개의 단편, 고전이 주는 마음의 여운은 독서의 즐거움과 정신의 풍요로움을 한껏 누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원문을 감상하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마지막 잎새 / 크리스마스 선물 / 낙원에 들른 손님 / 경찰관과 찬송가 / 사랑의 희생 / 제물의 신과 사랑의 신 / 다시 찾은 삶 / 추수감사절의 두 신사 / 사랑의 묘약 / 식탁에 찾아온 봄 / 어느 바쁜 브로커의 로맨스 / 20년 뒤 / 백작과 결혼한 초대 손님 / 구두쇠 연인 / 녹색 문 / 하그레이브스의 멋진 연기 / 가구 딸린 셋방 / 물방앗간이 있는 예배당 / 도시의 패배 / 인생은 회전목마 / 채광창이 있는 방 / 5월은 결혼의 달 / 시계추 / 할렘의 비극 / 세상 사람은 모두 친구 / 카페 안의 세계주의자 / 매혹의 옆모습 / 매디슨 광장의 아라비안나이트 / 어느 도시 보고서 / 붉은 추장의 몸값

  미국의 문학에 관한 조예가 없어도 누구나 한 번쯤은 '마지막 잎새'나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동화로, 만화로, 드라마와 영화로, 심지어는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고 수많은 패러디와 문화를 생산해 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에서 얻게 되는 특별한 감동은 아주 매력적이다.

  오 헨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상 경험을 즐겨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아무리 평범하고 범상한 일상 경험이라도 좀처럼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실제로 어떤 일상 경험에서도 그는 작품의 실마리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 그의 손에 들어온 소재는 마치 연금술사가 무쇠 덩어리를 황금으로 만들듯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곤 하였다.(p.398)

  오 헨리의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다. 1862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그린즈버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숙모에게 위탁되어 자라난다. 불우한 환경과 책을 읽는 습관은 작가의 역량을 키우는 데에 최고라고 했던가? 그는 삶의 경험과 고전 문학의 탐독으로 작가의 소양을 쌓는다. 실제로 작품 곳곳에는 성경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학이 인용되고 있다.

  또한, 감옥은 작가에게 어떤 문학적 영감을 부여하는 곳인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 등 수많은 유명 작가의 명성 이전에는 감옥이 있다. 그도 젊은 시절에 잠시 은행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세상과의 단절이 글쓰기의 몰입을 가져온 것인가? 아니면 파란만장한 인생의 여정이 창작의 디딤돌이 된 것인가? 어쨌든, 그의 시작은 감옥에서이다.

  이렇게 오 헨리는 뉴욕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자칫 진부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상 경험을 다루되 그것에 낭만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손에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만들어버리는 저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 왕처럼 아무리 보잘것없는 일상 경험이라도 일단 그의 손에 들어오면 로맨스의 빛깔을 띠게 된다.(p.406)

  출소 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데, 주로 뉴욕을 배경으로 평범한 일상의 낭만을 해학적으로 재치있고 간결하게 묘사한다. 그는 마흔여덟이라는 조금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략 300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조금 미흡해 보이는 서사 구조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눈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였다고 한다. 여기에 엄선된 30개의 단편은 그의 문학성을 제대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버먼 할아버지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대. 앓으신 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야. 엊그제 아침 관리인이 아래층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봤더니 할아버지가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계시더래. 신발과 옷은 온통 젖어서 얼음처럼 차갑고. 그렇게 날씨가 사나운 밤에 도대체 할아버지가 어디를 갔다 오셨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는 거야. 그러다가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초롱이랑, 늘 두던 장소에서 꺼내온 사다리랑,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림붓들이랑, 초록색과 노란색 물감이 섞여 있는 팔레트를 발견했다지 뭐야...... 그리고 자, 창밖을 내다봐. 벽에 붙어 있는 저 마지막 담쟁이 잎새를 말이야. 바람이 부는데 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지 이상하지 않아? 아, 존시, 저건 버먼 할아버지가 그린 걸작품이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 그분이 저기에 그려놓으신 거거든."(p.19)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 '사랑의 희생'이다. 비슷한 패턴을 보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잔잔한 여운의 파동은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약간은 허를 찌르는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마지막 뒤집기가 돋보인 단편은 '낙원에 들른 손님', '경찰관과 찬송가', '도시의 패배', '카페 안의 세계주의자'이다. 언어의 유희와 함께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재치가 돋보였다. 마지막 절정의 묵직함이 아직도 대서사시의 기분으로 전해오는 '다시 찾은 삶'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고, '붉은 추장의 몸값'은...

  영문학자의 충실한 번역은 세계문학을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게 한다. 그리고 후반에 수록된 '작품 해설'은 글을 읽으며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문학적 포만감을 충만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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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살인사건 - 제3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2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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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 교타로, 이연승 역, [종착역 살인사건], 레드박스, 2013.

Nishimura Kyotaro, [TERMINAL(SHUCHAKUEKI) SATSUJINJIKEN], 2009.

제3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어느 유머 글에서 '종착역'이란 만취했을 때에 한 번씩 다녀오는 곳이라고 한다. 인생을 살면서 아쉽게도 만취한 적이 없어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근교에 살고 있어서 아직 종착역의 여운을 깊이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기차로 10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면? 야행열차의 침대칸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면? 마침내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의 의미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종착역 살인사건]은 도쿄 근교의 우에노 역과 도호쿠 지방 아오모리 역을 배경으로 한다.

  내가 '종착역'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종착역이 그와 동시에 출발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즐거운 여행의 시작점인 역이, 다른 이에게는 슬픈 이별의 종착역이 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착역에서 인생을 느끼는 것이리라. 일본에서 가장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우에노 역 플랫폼에서 우두커니 서서 야행열차의 붉은 미등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유난히 그런 감상에 사로잡히고 만다. 희망, 만남, 혹은 좌절과 이별을, 때로는 범죄마저 탄생시키는 것이 '종착역'이다.(p.427)

  니시무라 교타로의 [종착역 살인사건]은 [침대특급 살인사건]과 [야간비행 살인사건]에 이은 트래블 미스터리의 제3탄으로, 1981년에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다. 두 개의 역과 달리는 열차에서 일어나는 연쇄적인 살인 사건은 밀실의 형태를 띠고 있고, 이것을 수사하는 경찰의 활약을 그린 본격 미스터리이다.

  "그래, 착각일지도 모르지. 여긴 도쿄니까. 하지만 이 우에노 역에는 우리 같은 도호쿠 사람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뭔가가 있어. 난 그게 냄새라고 생각해. 지금 막 도착한 열차에서 내린 도호쿠 사람들이 옮겨온 냄새일 수도 있고, 우에노 역이 도호쿠에서 상경해 온 사람들에게 종착역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스며든 도호쿠의 냄새일지도 몰라. 조금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꿈을 안고 상경한 도호쿠 사람들은 종착역인 이곳 우에노 역에 도호쿠라는 기억을 떨어뜨리고 최대한 도쿄 사람이 되어 역을 나서기 마련이야. 그러니 이 우에노 역에 도호쿠의 냄새가 스며들지 않았을까?"(p.58)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한 개는, 가메이는 아오모리 출신으로 도쿄에서 20년 이상을 형사로 일하고 있다. 갑자기 고향 모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옛친구가 찾아와 행방을 알 수 없는 여제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해온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 행적을 추적하다가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한 개는, 아오모리 현립 F 고등학교에서 교내 신문 편집부 활동을 같이한 7명은 졸업 후에 모두 도쿄로 왔다. 진학하고 취업을 하고 사업을 하는 등 숨 가쁘게 도시인으로 살고 있다. 편집장이었던 미야모토는 7년 만에 고향으로의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고 친구들에게 초대 편지를 쓰고 승차권을 동봉한다. 오랜만에 우에노 역에서 만난 이들은 옛 기억을 되살리며 열차에 탑승하는데, 한 명씩 연쇄적으로 의문의 사고를 당한다.

  '고향이란 대체 뭘까?'(p.100)

  만약 이번 사건이 연쇄살인이라면 그 원인은 아오모리에서의 십팔 년간보다는 도쿄에서의 칠 년간에 있을 것 같아."(p.221)

  처음에는 우연한 사고로 여겼던 일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점점 타살의 의혹이 짙어진다. 한발 늦은 경찰은 수사의 방향을 재편하고 도쿄와 아오모리에서 7명에 관한 조사를 벌인다. 각자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지만, 범행은 계속 진행되고 경찰의 가설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그리고 커다란 두 개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에 어떤 연관성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결합한다.

  아오모리에서 함께 자란 고교 동창, 7년간의 도쿄 생활, 고향 여행으로의 초대, 야행열차, 연쇄 살인사건, 가설을 세우고 추적하는 경찰, 실수, 의혹, 돌파구, 조각 맞춤... 그리고 강렬한 노스탤지어. [종착역 살인사건]은 여느 경찰소설과는 다르게 조직의 전형적인 가부장 구조나 과중한 업무로 가정에 소홀한 마초들의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단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한 도시 생활, 그리움은 종착역에서 매일 고향을 향해 출발하는 열차를 바라보며 삭이는 감정만이 드러난다. 예고된 희생자와 서서히 조여오는 연쇄 살인의 압박은 소설의 재미를 더하고 있으나, 방대한 경찰의 수사는 캐릭터의 개성을 약하게 하고 트릭에 맞춰진 초점은 메시지를 약하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리즈는 모아서 읽어야 하고,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고 했던가? 앞서 나온 두 권의 시리즈를 함께 읽어야 니시무라 교타로의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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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윌리 로니스, 류재화 역, [그날들], 이봄, 2011.

Willy Ronis, [CE JOUR-LA], 2006.

  어느 유명인의 전시회나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 아니더라도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가끔은 시선을 사로잡는 사진을 만날 때가 있다. 이런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 우연인가, 연출인가? 초상권은? 어떤 렌즈를 사용했을까? 어떻게 보정을 했을까? ... 그리고 어떤 뒷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윌리 로니스라는 이름은 몰라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다란 바게트를 들고 가는 어린아이의 사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일상으로까지 파고든 한 장의 사진을 인연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 작은 삶의 기적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윌리 로니스(1910 - 2009)는 '휴머니스트 사진작가'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인이라고 한다. 솔직히 문외한이라 불행하게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명성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사진 스튜디오를 하는 아버지와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감각을 가지고 사진에 입문하여 파리 곳곳을 누비는 사진가로의 삶을 시작한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그의 일생은 프랑스의 근대 역사와 함께하는데... 1934년 노동자 시위 촬영을 시작으로, 1938년 시트로앵 자벨 자동차 회사 파업을 담은 연작 촬영, 제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 귀환 촬영, 1951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사진 '규소폐증에 걸린 광부'를 촬영... 20세기의 모든 사건 현장과 이미지와 풍경 등을 '르포르타주'한다. 1953년부터는 프랑스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시사 화보 잡지 [라이프]의 사진기자가 되었으며...

 

 

  그날은 1947년 일요일 오후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교외 술집 분위기를 좋아해 자주 가곤 했다...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중앙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고, 당장 사진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위치를 잡아야 했다. 춤추는 장면 전체를 다 잡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야 했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무대와 춤의 전체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게 내가 포착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의자 위로 올라갔다. 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커플 바로 뒤에 내가 있다.(p.7)

  디지털카메라와 보정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셔터를 누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1947년의 세상에서 기계식 카메라와 필름을 사용한다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사진가의 머리는 수많은 계산을 해야 하고 몸은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여기에는 사진을 찍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의자 위에 올라서서 보니,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양쪽의 두 아가씨와 아주 신나게, 아주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청년이었다. '그래, 이게 주제야.' 난 주제를 찾으면 바로 알 수 있다. 나는 청년에게 좀 가까이 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가 나를 보았고, 두 아가씨와 정신없이 춤을 추면서도 내 뜻을 알아챘는지 점점 앞으로 나왔다. 바로 그 순간에 찍은 사진이다. 그는 정말 신처럼 춤을 추었다. 두 여자와 함께 그렇게 추려면 춤에 대단한 재능이 있어야 했다. 음악이 끝나고 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얼이 빠졌다. 그는 외다리였다! 춤을 출 때는 그런 줄 몰랐는데.(p.8)

  두 여자와 멋지게 춤을 춘 남자는 외다리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오른쪽 아가씨로부터 작가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녀는 신문과 잡지에서 가끔 이 사진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운데 청년은 이날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역동적인 몸동작이 그려진 한 장의 사진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세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렘브란트의 얼굴들을 떠올렸다. 감싸면서도 드러내는 그 어슴푸레한 빛, 그들은 정말 거리와 외따로 떨어진 듯했다. 나는 전혀 빛을 바꾸지 않았다. 주변은 어두웠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은 오스만 가였다. 거리에는 별다른 조명이 없었다. 빛이라곤 진열창에 설치된 조명뿐. 그러나 그 조명은 진열창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 위로 반사될 정도로 강했다.(p.11-12)

  진정 신비한 장면이 현현하였다. 그녀는 불현듯 중세의 동정녀 마리아가 되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하게, 나머지 다른 승객들은 다 어둠 속에 있는데 그녀 얼굴에만 빛이 들어온 그 순간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순간을 담아낼 수 있었다.(p.27)

  드디어 혼잡과 희망으로 요동치는 분위기 속에 깡마르고, 피곤에 지친 포로들이 도착했다. 그 속에서 어떤 간호사가 한 병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수송 기차에서 그를 돌봐준 간호사였을 것이다...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사진을 어떤 책에 소개할 수 있었다.(p.49-50)

  사진의 내용이나 담긴 이야기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찍어보고 싶은 사진은 빛을 최대한 이용하는 사진이다. 세 장은 사진은 단순하면서도 광선으로 아름답게 돋보인다.

 

 

  이 사진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양쪽 스키 플레이트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도약할 때 내가 코치에게 매달려 뛰었기 때문이다. 내 등 뒤에 코치의 배가 닿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코치의 두 스키 사이에 내 두 스키가 엇갈려 들어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각자의 오른쪽 스키다. 왼쪽은 화면 밖에 있다.(p.42)

  1992년, 여든두 살의 나이, 스키를 탈 수 있다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나이이다. 평생을 사진가로 살아온 작가는 패러글라이딩하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열정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나 보다.

 

 

  여행 중에 아내를 모델로 하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지금은 모두 노인이 되었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부인, 이 아이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빵을 사서 나올 때요. 빵을 들고 뛰어가는 모습을 찍어보고 싶은데요."

  "그래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안 될 거 없죠."

  나는 약간 뒤로, 좀 멀리 가서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빵을 사서 나온 아이는 이토록 귀엽게, 이토록 신나게 달렸다. 난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아이를 세 번 뛰게 했다. 이 사진은 정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엽서로, 포스터로 제작되어 심지어 뉴욕이나 유럽 여러 도시의 식당이나 빵집에서도 볼 수 있었다.(p.171-172)

  사진보다 더 아름다운 사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사진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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