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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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권남희 역, [더 스크랩], 비채, 2014.

Murakami Haruki, [THE SCRAP_NATSUKASHII NO 1980 NEN DAI], 1987.

  나는 하루키의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가 더 좋다. 그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는 내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서...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의 소설을 제대로 완독한 적이 없다. 언젠가 여느 독자처럼 늦바람이 들어 그의 글에 중독된다면, 지금 이러한 얘기는 모두 펄 소리가 되겠지만서도... 아무튼, 소설과는 다른 일상의 진솔한 기록은 잔잔하게 내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고 글을 써서 살아가는 유명 작가의 좋아하는 소설, 즐겨 듣는 음악, 찾아보는 영화, 여행, 음식, 취미, 개인의 취향과 이런저런 소견... 등 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좋아한다. 1980년대를 추억한다는 [더 스크랩]은 '무라카미 라디오'(①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비채, 2013. ②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비채, 2012. ③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비채, 2013.) 이후에 만난 에세이이다.

  나는 1980년대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에 최루탄 가스의 매캐함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공기를 마셔야 했고, 강남의 8학군에서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당시에 개봉한, 주인공이 성적의 문제로 비관 자살하는 사회 고발성 하이틴 영화는 모두 나와 내 친구의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가정 경제의 위기로 수도권 근교로 이사하고 친구가 없었던 그저 그런 시기였다. 변두리에서 소외된 문화의 욕구 때문이었을까? 제대로 가진 것은 없어도 무언가를 손에 들고 읽는 습관을 들인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약 사 년에 걸쳐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글이다. 연재하는 걸 싫어하고, 어떤 글이든 일 년 이상 계속 쓰면 질리는 체질인 내가 <넘버>에 장기 연재를 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다.

  어째서 이렇게 오래 썼는가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쓰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먼저 한 달에 한두 번 <넘버>에서 미국 잡지며 신문을 왕창 보내준다. 보내주는 것은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등의 잡지와 <뉴욕타임스> 일요판이다. 나는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그걸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쓴다. 이것으로 한 편 끝.(p.4)

  글쓰기를 유혹하는 하루키의 [더 스크랩]은 연작을 목적으로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미국의 인기 잡지를 출판사와 작가가 공모(?)하여 인위적으로 추출해낸 작품이다. 물론 그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하루키의 눈으로 들어가 뇌에서 걸러진 소스는 다시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하루키의 팬 끝에서 되살아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81편의 모음은 다시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나에게 다가 와 마치 유년 시절의 문화적 빈곤감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이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에스콰이어> 12월호는 [호밀밭의 파수꾼] 출판 삼십 주년을 기념해서 '중년을 맞이한 파수꾼'이라는 작은 특집기사를 꾸몄다. 소설도 생일을 축하받다니 대단한 일이다. 흔히 이십 년 지나도 평가가 변하지 않으면 그 소설은 진짜라고 하는데, 삼십 년이 지난 [호밀밭의 파수꾼]은 [모비딕]이나 [위대한 개츠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국문학의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분위기가 농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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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둬도 한 달에 이삼만 부가 팔리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p.14, 16)

  그것과 달리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꾸밈없이 담담한 문체의 소설이다. 그러나 카버의 문장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돌진해간다. 알코올 중독으로 요양원에 들어간 주인공은 같은 환자 처지인 청년과 마음을 주고받는 얘기인데, 어두운 소재이지만 비장하게 흐르지 않는 면이 좋다. 술술 읽히는 데다 다 읽고 나면 마음에 뭔가가 남는다. 훌륭한 단편이란 그런 것이다.(p.27-28)

  확실히 후기의 브라우티건은 초기 작품에서처럼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한 상상의 비약은 잃었지만, 그래도 역시 여타의 작가는 흉내낼 수 없는 차분하고 부드럽고 재미가 넘치는 독자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 때 인상이 너무 강렬하면 작가는 뒷감당이 힘들어진다. 나 같은 사람은 적당히 팔리니 적당히 즐겁게 지낼 수 있지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군.(p.179)

  에릭 '러브스토리' 시걸은 요전에 [더 클래스]라는 장편소설을 출판했지만, 시걸의 대부분 책이 그렇듯이 서평은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좋은 서평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TV프로듀서들이 판권 쟁탈전을 펼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비평으로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해 "유감이다"라고 얘기한다. 동업자로서는 딱하다 싶지만, 동시에 후회하지 않는 것도 작가에게 요구되는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p.224)

  하루키는 본인이 매년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거론되고,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까? 삼십 대 중반의 작가는 J.D. 샐린저와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언급하고, 재미있게 읽은 단편 소설을 소개하며, 세상을 떠난 작가를 추모하고, 작가로서의 직업적 동질감을 솔직 담백하게 묘사한다. 그가 수집한 1980년대는 다양한 재즈 음악과 마이클 잭슨이 있고,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있으며, 영화 <스타워즈>와 <E.T.>가 있다. 작가의 거침없는 호기심은 성적인 담론을 포함해서 유명인의 천문학적인 연봉, 다양한 삶의 방식, 갖가지 설문 조사와 통계, 연예 가십을 말한다. 그리고 항상 개인적인 관심이 충만한 야구와 마라톤에 관한 애정도 담겨 있다.

  그는 서두에서 이 책을 마음 편하게 '가까운 과거 여행'을 즐기는 기분으로 읽어달라고 한다. 솔직히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해서 그의 글맛을 기대한 독자는 '인용'과 '소감'이라는 스크랩 형식이라 만족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바람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책 뒤에 도쿄 디즈니랜드 관람기인 <걱정 마세요, 재미있으니까>와 1984년 LA 올림픽과 관련하여 <올림픽과 별로 관계없는 올림픽 일기>를 첨부하여 문학적인 갈증을 해갈하고 있다.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30년 뒤를 대비해서 일기를 쓰고 미리 이것저것을 수집해 놓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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