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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역,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2014.
Murakami Haruki, [ONNA NO INAI OTOKOTACHI], 201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매번 하는 얘기지만, 나는 아직 그의 장편을 제대로 소화할 여력이 없어서 에세이와 단편으로 적응력을 키우는 중이다. 한마디로 무게감이라고 해야 하나? 허무함과 난해함을 포함해서 다중적 의미를 가진 몽환적인 글을 읽을 때의 피곤함(?)이 섣불리 다가서기를 망설이게 한다. 더구나 (하루키를 만나면 특히 더) 문학을 그 자체로 즐기기보다는 어떻게든 두뇌 회전을 가속화해서 숨은 은유와 상징을 찾아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는 부작용이 있고...ㅜㅜ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9년 만의 신작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곱 개의 단편 모음이다. 단편소설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 대비하여 빠르게 잊히는 속성 때문에(나는 잘 잊어버린다...;;) 하루에 한 개의 단편만을 읽기로 했다. 강렬함을 적당히 순화하면서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한 나름의 처방이다. 그래서 계획은 하루에 한 편씩 칠 일을 계산하고 시작했으나, 날이 갈수록 그의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재미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라서 매우 만족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
사랑하는 잠자
여자 없는 남자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8) 신은 남자를 만들고 나서 뭔가 부족한듯싶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느 한쪽의 우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도우면서 살라는, 돕는 배필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랑과 욕망을 포함해서 상실과 결여로 뭔가가 부족한 일곱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현실의 세계에서 여자 하나 없는 지질하고 매력 없는 남자가 아니라 한때는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혼자이다. 곁에 여자가 있어도 내 여자는 아니다. 어쩌면 매우 기묘한 설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루키는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포함해서 남자 내면의 복잡한 심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우리도 섬세하고 민감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여자가 운전하는 차를 적잖이 타보았지만, 가후쿠가 보기에 여자들의 운전습관은 대략 두 가지로 나뉘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난폭하거나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신중하거나. 후자가 전자보다 - 우리는 그 점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 훨씬 많았다. 일반론을 말하자면, 여자 운전자는 남자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물론 조심스럽고 신중한 운전에 불만을 제기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그런 운전은 때로 주위 운전자들을 답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p.9)
"그건 병 같은 거예요, 가후쿠 씨. 생각한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죠.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것도, 엄마가 나를 죽어라 들볶았던 것도, 모두 병이 한 짓이에요.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봤자 별거 안 나와요. 혼자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꿀꺽 삼키고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요."(p.59)
'드라이브 마이 카'는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가후쿠는 배우인데, 한쪽 눈에 문제가 생겨 단골 카센터의 소개로 와타리 미사키라는 여자를 전속 운전기사로 고용한다. 20대 중반의 무뚝뚝하고, 애교가 없는, 예쁘지 않은, 담배를 엄청나게 피우지만... 운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며 다른 감정보다 편안함을 느끼는데, 그는 죽은 아내와 아내가 만났던 남자에 관해서 들려준다. 연기자로 살면서 때로는 다른 인격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아는 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일본어로(그것도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인 인간은 기타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목욕할 때면 곧잘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p.63)
하지만 스무 살이던 시절을 돌아보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외톨이고 한없이 고독했다는 느낌뿐이다. 나에게는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 연인도 없었고, 흉금을 터놓고 대화할 친구도 없었다. 하루하루 뭘 해야 좋을지도 알지 못했고, 마음속에 그리는 장래의 비전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내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일주일 동안 거의 아무와도 말을 나누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일 년쯤 이어졌다. 긴 일 년이었다. 그런 시기가 혹독한 겨울이 되어 나라는 인간의 내면에 귀중한 나이테를 남겼을지,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p.112-113)
'예스터데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 만난 한 친구를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다니무라는 간사이 출신으로 도쿄에 와서 대학을 다닌다. 아르바이트 중에 만난 기타루는 도쿄 출신이지만, 간사이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특이한 친구이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기류가 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지 않겠느냐는 이상한 제안을 해 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직 인생의 경험이 빈약한 시절이라 하나하나가 몸에 나이테를 새기는 과정이다. 더 먼 미래에서 현재를 뒤돌아봐도 비슷하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각자의 길을 멀리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적인 굴곡이나 고뇌가 너무도 부족한 탓에, 그 몫만큼 놀랍도록 기교적인 인생을 걷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연한 기회에 눈에 띄곤 한다. 도카이 의사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 같은 사람들은 굴곡진 주위 세계에 (말하자면) 올곧은 자신을 끼워맞춰 살아가기 위해 많든 적든 저마다 조정작업을 요구받게 되는데, 대부분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번거로운 기교를 부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숨기는 것도 없고 꾸미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디선가 꽂혀들어온 특별한 햇빛을 받아 그들이 자기 삶의 인공성을, 혹은 비자연성을 퍼뜩 깨달았을 때, 사태는 때로는 비통하고 또한 때로는 희극적인 국면을 맞이한다. 물론 죽을 때까지 그런 빛을 목도하지 않는, 혹은 목도하더라도 딱히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는 축복받은(이라고밖에 말할 도리가 없다) 사람들도 허다하게 존재하지만.(p.117-118)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상처받거나, 그녀들의 평안한 잠이 방해받거나 하는 일은 - 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 - 일어나지 않는다.(p.166-167)
'독립기관'은 항상 주위에 여자가 끊이지 않은 남자의 순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니무라는 스포츠센터에서 50대 초반의 성형외과 의사인 도카이를 알게 된다. 그는 아직 미혼인데, 특이한 여성 취향으로 평범하지 않은 연애를 하고 있다. 능숙한 기교로 수많은 여자가 그를 거쳐 갔고, 지금까지 여자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겪은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얼마 뒤에 임종의 소식이 전해진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바라와 성교할 때마다 그녀는 흥미롭고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천일야화]의 왕비 셰에라자드처럼. 물론 그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하바라는 날이 밝으면 그녀를 참수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다(애초에 그녀가 아침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던 적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하바라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늘 혼자서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하바라를 위로해주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혹은 그 이상으로 그녀는 침대에서 - 특히 성행위를 끝낸 뒤 둘만의 나른한 시간에 - 남자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던 거라고 하바라는 추측했다.(p.173)
섹스 뒤에 셰에라자드는 더이상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하바라의 피임구를 점검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곳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천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칠성장어가 물밑에서 환한 수면을 응시하듯이. 내가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시간 속에 있고, 그리고 칠성장어였다면 - 하바라 노부유키라는 특정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이름 없는 칠성장어였다면 -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바라는 생각했다. 셰에라자드와 하바라는 둘 다 칠성장어이고, 이렇게 나란히 돌에 찰싹 달라붙어, 물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면서 수면을 올려다보고, 살이 오른 송어가 자태를 뽐내며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p.206-207)
'셰에라자드'는 바깥세상과 단절된 남자와 그를 찾아오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락책의 소개로 하바라가 머무는 집에 일주일에 두 번꼴로 그녀가 온다. 식료품 봉투를 들고 주방에 가서 정리한 후에는 자연스럽게 침실로 이동한다. 섹스가 끝나면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대화한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그녀는 하던 말을 멈추고 돌아간다. 그는 그녀를 [천일야화]에 나오는 왕비 셰에라자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연히 주어진 관계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기에 그는 조심스럽고 슬프다.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제일 안쪽 의자. 물론 먼저 앉은 손님이 없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그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비어 있었다. 애당초 손님이 많지 않은 가게인데다 그곳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그리고 그리 편하다고 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뒤에 계단이 있어서 천장이 비스듬하게 내려와 있다. 일어날 때는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남자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 비좁은 자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p.217)
원래부터 아무런 성취도,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인생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당연히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고통이나 분노, 실망, 체념, 그런 감각도 뭔가 또렷하게 와 닿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기노'라는 골목 안쪽의 작은 술집이 그 구체적인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이었다.(p.226-227)
'기노'는 기노라는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기노는 우연히 출장에서 하루 일찍 돌아와 아내가 직장 동료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는 그대로 집을 나와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이모가 운영하는 가게를 인수해 작은 술집을 만든다. 골목 자락에서 화려함보다는 편안한 장소로 하나둘 손님이 찾아오는데, 올 때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위스키와 맥주를 마시고 책을 읽는 남자는 잠시 가게 문을 닫고 멀리 피하라는 말을 전한다. 행복은 물론이고 원망이나 분노를 억제하며 사는 남자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의 어둠침침함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보아하니 그것은 어디에나 흔히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천장이었다. 원래는 흰색이나 연한 크림색 계열로 칠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몰고 온 먼지와 때 탓에 이제는 상해가는 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 변했다.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 주장도 메시지도 없다. 천장으로서의 구조적인 역할은 일단 무난하게 해내고 있으나, 그 이상의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p.275)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죠." 아가씨는 사려 깊게 말했다. "세계 자체가 이렇게 무너져가는 판에 고장난 자물쇠 같은 걸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또 착실히 고치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참 이상야릇하다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뭐,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의외로 그런 게 정답일 수 있어요. 설령 세계가 지금 당장 무너진다고 해도, 그렇게 자잘한 일들을 꼬박꼬박 착실히 유지해가는 것으로 인간은 그럭저럭 제정신을 지켜내는지도 모르겠어요."(p.308)
'사랑하는 잠자'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연상되는데, 눈을 떠보니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해 있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잠에서 깨어난 잠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집 안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은 후,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가운을 찾아 걸친다. 이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현관에는 등이 굽어 몸을 앞으로 숙인 젊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열쇠수리공으로 문고리의 자물쇠를 고치러 왔다고 하는데, 고장난 자물쇠는 잠자가 깨어난 방의 문이다.
한밤중 한시가 넘어 걸려온 전화가 나를 깨운다. 한밤중의 전화벨은 언제나 거칠다. 누군가가 흉포한 쇠붙이로 세상을 깨부수려는 것만 같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나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든다.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내게 전한다, 한 여자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음을. 목소리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내가 지난주 수요일에 자살했습니다. 뭐가 어찌됐건 알려드려야겠다 싶어서, 라고 그는 말했다. 뭐가 어찌됐건. 내가 들은 한, 그의 말투에는 한 방울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전보를 치려고 쓴 문장 같았다. 말과 말 사이에 스페이스가 거의 없었다. 순수한 알림. 수식 없는 사실. 피리어드.(p.315-316)
하지만 나는 그 남편이 전화로 말한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의심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헤어진 뒤에도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았고, 누군가와 (아마도)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그리고 지난주 수요일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방법을 택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뭐가 어찌됐건.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죽은 자의 세계와 깊숙이 이어진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밤의 정적 속에서 그 생생한 연결을 귀로 들을 수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실의 긴박감을, 그 날카로운 번뜩임을 눈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 한밤중 한시 넘어서 전화를 한 것은 그에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낮 한시에는 아마도 이렇지 못했을 것이다.(p.317-318)
'여자 없는 남자들'은 새벽에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은 남자의 내면 독백이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소식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녀에 관한 기억, 꿈같은 묘사, 선원과 항해, 여자 없는 남자들... 복잡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쉬운듯하면서 잠시 정신을 놓으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가던 길을 잃는 어려운 소설이다. 남자를 충분히 배려한 감성이 돋보이는데,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하루키 특유의 음악과 영화에 관한 조예가 잘 드러나고 있다. 대부분 두세 사람이 등장하는 간단한 구조이나 이들의 관계 외에 각자의 이야기를 이중으로 기록하여 입체감이 살아난다. 상처를 가진 남자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탐욕적이고 원색적으로, 때로는 감각적인 내면의 독백으로 풀어간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열쇠수리공 아가씨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