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파치
로렌조 카르카테라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로렌조 카르카테라, 최필원 역, [아파치], 펄스, 2015.
Lorenzo Carcaterra, [APACHES], 1997.
십 대 시절에 TV를 통해 방영하는 미국 드라마에서 시작이나 끝 부분에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이나 제리 브룩하이머(Jerry Bruckheimer) 제작이라는 자막을 보면서,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매주 시선을 잡아끄는 탄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세월이 흐르고 영미 스릴러를 조금씩 읽으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세상이 돌아가는 시스템 안에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많은 작가가 있고, 그들의 천재성과 열정 그리고 인고의 노력으로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고 사라지고 읽히고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것이다. 로렌조 카르카테라는 소설과 논픽션, 텔레비전과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작을 쏟아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소설 [아파치]는 마치 잘 짜인 미국 드라마 한 시즌을 보는 기분이다.
부머
데드아이
콜롬보 부인
제로니모
핀스
짐 목사
그리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주인 눈치오 골드먼
1980년대와 그 이전을 배경으로 프롤로그와 1, 2, 3부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작은 뉴욕에서 12세 소녀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무한히 자극한다. 솔직히 프롤로그에서는 앞으로 어린 소녀가 겪게 될 잔혹함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스릴러는 끔찍한 시신의 발견으로 시작하지만, 여기에서는 성적인 것을 포함해 아동학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제니퍼는 알고 있었다. 운 좋게 살아서 이곳을 탈출한다 해도 영영 말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걸. 언제까지나 그의 포로로 살아야 한다는 걸. 이곳에 억류된 채 밤낮을 보내면서 아이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오래토록 아이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 불쑥 튀어나와 지금의 공포와 고통을 다시 떠안겨줄 것이다.
이죽거리는 남자의 얼굴은 이미 아이 인생의 뗄 수 없는 일부가 돼버렸다. 더 이상 어리고 순진하지 않을 때,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아이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기억에서 그를 지워버릴 것이다.
제니퍼 산토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맹세했다. 말콤이 먼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p.161)
1부에서는 6인의 형사 캐릭터를 소개한다. '부머'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어 얻게 된 별명이다. 이탈리아계로 뉴욕 이스트 할렘의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에는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모든 것을 바꾸었고 복수를 위해 경찰이 된다. 공허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악당과 싸우고 범죄를 소탕하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그래서인지 죽음을 불사하고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의 파트너 '데드아이'는 아프리카계로 브루클린 출신이다. 뉴욕 경찰국 사격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한 경력으로 얻은 별명인데, 베테랑 총기 전문가이다. '콜롬보 부인'은 노스 브롬크스 강력계 소속으로 무엇보다 살인사건의 해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 형사이다. '제로니모'는 체로키 인디언의 혼혈로 브루클린 폭탄 처리반의 엘리트 요원이다. '핀스'는 보육원에서 위탁가정을 거치며 자랐는데, 기계를 잘 다루는 손재주로 뉴욕 경찰국 최고의 도청 전문가가 되었다. '짐 목사'는 사우스 자메이카에서 마약 중독자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다. 마약 딜러에게 어머니가 살해된 후에 개과천선하여 경찰이 되었는데, 위장잠입을 전문으로 한다.
이들은 한때 뉴욕 일대를 주름잡는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수사관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개성 강한 이미지로 나름대로 사연 깊은 인생들인데, 공통점은 임무 수행 중의 치명적인 부상에서 겨우 살아나 이제는 은퇴연금과 장애수당을 받으며 소일거리로 살고 있다. 범죄와 마주하는 긴장이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옛일을 회상하며 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이다. 캐릭터가 지니고 있는 매력과 저마다의 사연은 이것을 하나하나 풀어내면 각각의 장편으로 되살아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부머 프론티에리는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일 외에는 인생의 낙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술집에서 모든 범죄자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을 때 찾아드는 짜릿한 기분은 그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있었다. 범죄자들에게 혹사당해 온 거친 동네의 노동자들이 미소를 흘리며 목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부머 프론티에리는 한 순간도 거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도시의 평화를 위해 항상 범죄와 전쟁을 벌여나갔다.(p.25)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요, 아버지." 데드아이가 말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왜 못 보세요?"
"세상은 달라졌는지 몰라도 사람은 변하지 않아, 데이비스." 에디가 시가를 입에 물고 일어났다. "그걸 명심해라. 그 바닥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절대 잊어선 안 돼."(p.45)
강력계 형사들은 스스로를 경찰국의 최고 엘리트라 여겼다. 그들은 늘 그런 자신감과 오만에 차 있었다. 형사들 대부분은 셔츠나 스웨터 안에 자신들의 모토가 적힌 티셔츠를 받쳐 있었다. 분필로 그린 시체의 윤곽 위에는 이런 모토가 적혀 있었다. 당신의 하루가 끝나면 우리의 하루가 시작된다. 강력계.
강력계 최고의 형사는 누가 뭐래도 실베스트리였다. 사람들은 특출한 재능을 소유한 그녀를 "콜롬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유명한 TV 형사의 여성 버전.(p.53)
"폭탄에 목숨을 잃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제로니모가 말했다.
"그럼 뭐가 두려운가?" 노인이 물었다.
"폭탄이 저를 죽이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제로니모가 말했다. "그게 제 유일한 두려움입니다."
"전사라면 싸우다 죽어야지." 노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아남아서 사람들의 연민을 사는 건 전사의 길이 아니야."
"폭탄 처리반에 몸담았던 선배들을 가끔 봅니다." 제로니모가 말했다. "대부분 넋이 나간 모습이더군요. 다리를 잃은 사람도 있고, 팔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눈들은 하나같이 몽롱해보였죠. 다들 꿋꿋이 살아가는 척 하지만 저는 그들이 자신들을 완전히 끝장내주지 못한 폭탄을 저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 기도를 해, 델가도." 노인이 말했다. "죽음을 부르는 기도."(p.79-80)
라이언은 얼굴과 이름들이 뒤섞인 고요한 공간들에 갇힌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덕분에 그는 현실의 차가운 눈빛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것과 자신을 영원히 배신하지 않을 것들만 신뢰했다. 지미 라이언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전자 감시의 냉정하고, 메마른 세상뿐이었다. 그리고 담배 연기 자욱한 볼링장의 번들거리는 갈색 레인은 그의 안식처였다.
집, 그리고 경찰서와 더불어 그가 당당히 자신의 영역이라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p.91)
스카포니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거리의 아이들은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 <택시>에 나오는 극도로 예민한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그를 짐 목사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소리 없이 바비의 관할구로 스며들었고, 결국에는 모두의 입에 붙어 버리고 말았다. 스카포니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모두가 똑똑히 기억할 거리 이름이 생겼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p.109)
부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이들의 인생을 단숨에 바꾸어 놓는다. 2부에서는 부머와 데드아이가 다시 파트너가 되어 사라진 소녀의 뒤를 추적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점점 잊어가던 희열을 되찾게 된다. 소녀를 구하는 것은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자신을 구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음의 경계로 뛰어든다. 그런데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눈치오스를 아지트로 비슷한 경험을 했던 6인의 은퇴 형사는 각자의 장애를 극복하며 비밀 수사 조직 '아파치'를 결성한다. 그리고 3부에서는 거대 카르텔과의 전쟁을 시작하는데...
"아파치." 제로니모가 엄숙한 톤으로 말했다. "아파치라고 부르는 건 어때?"
...
"우리 모두에겐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봐야해." 제로니모가 맴버들의 얼굴을 차례로 보면서 말했다. "아파치 전통 중에 이런 게 있어. 전투에서 전사가 부상을 당하면 부족은 그를 버리고 떠나버리지. 남겨진 전사는 홀로 버티다 쓸쓸히 죽는 거야. 따라가면 부족에게 큰 부담이 될 테니까. 그게 우리야, 데드아이. 그게 바로 우리 운명이라고."(p.197)
이것을 서술형 스릴러라고 해야 하나?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문장은 빠르게 전개되는 줄거리와 맞물려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만큼 작가는 시각화하여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미국식 유머와 액션 활극인데, 살짝 B급 정서가 담겨 있어서 흥미를 더하고 있다. 문학적인 글맛보다는 대중적인 이야기의 맛을 즐기는 작품으로 충분한 재미를 보장한다. 무더운 여름철에 가볍게 읽기에는 제격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은 폰트와 빽빽한 문단 편집의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