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1 - 바이러스 밀리언셀러 클럽 45
스즈키 코지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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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고지, 김수영 역, [링① 바이러스], 황금가지, 2015.

Suzuki Koji, [RING(RINGU)], 1991.

  심약하면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공포 영화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찾아서 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미디어의 영향과 이런저런 입소문으로 귀에 익숙한 것이 있다. 이전 세대에는 영화 <엑소시스트>(1973.)와 <나이트메어>(1984.) 시리즈가 있고, 같은 세대에는 영화 <링>(나카다 히데오 감독, 1998.)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사다코'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이번에 밀리언셀러 클럽에서 새롭게 번역 출간한 스즈키 고지의 소설 [링]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1991년에 발표한 원작은 일본에서,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영화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소설과는 몇 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어서 더 흥미롭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자이고,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의 사진 속 얼굴은 심하게 뭉개지며, 가장 유명한 장면은 TV 브라운관을 뚫고 나오는 긴 머리의 사다코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게 여긴 것인데)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에서 이와 같은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원작을 넘어서는 뛰어난 연출로 일본식 호러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링 바이러스가 세상에 전파되기까지 치밀한 세계관으로 탄탄한 기초와 이야기의 뼈대를 제대로 구성하고 있어서 본 작품 이외에 후속작까지 기대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우연한 기회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 한 모녀의 기구한 인생은 죽어서까지 원한으로 남아 우리에게 색다른 공포를 전달한다.

  '혹시, 그거면 어쩌지?'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생각만 하다가 공포가 부풀어 올라서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잊었던 일주일 전의 그 사건.(p.12)

  지금 바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인하고서 한시라도 빨리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어깨 언저리에 솟아오른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쭉쭉 기어 내려가서 식은땀으로 티셔츠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냥 생각이 지나쳐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몸의 변화가 지나치게 격했다.

  '누군가가 말했는데, 마음보다 몸이 더 솔직하다고.'(p.13)

  M신문사 주간지 기자로 일하는 아사카와 가즈유키는 여고 3학년인 아내의 조카가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퇴근길에 택시 기사로부터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대로변에서 오토바이를 몰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기자로서의 감으로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신문 데이터를 뒤져서 사건을 검색하는데, 9월 5일 오후 11시 전후에 발생한 원인불명의 돌연사는 두 건이나 더 있었다. 네 명의 젊은이가 한날한시에 모두 심장이 멈추었고, 한결같이 죽음 직전에 기이한 행동을 보이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이다. 공통의 접점...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시작으로 기자의 시각에서 논리적으로 상황을 전개한다.

  새까만 반지(半紙, 붓글씨 연습용 일본종이 - 옮긴이)에 흰 붓으로 쓴 형편없는 글씨. 그렇지만 어딘가 이렇게 보였다. '끝까지 봐.' 명령형이었다. 그것이 사라지고 잠시 후 다음 글자가 떠올랐다. '망자에게 먹힐 것이다.' 망자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먹힌다는 것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그 두 문장 사이에는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도중에 영상을 멈추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협박하는 셈이다.(p.83)

  처음 그랬던 것처럼 글자가 떠올랐다. 첫 장면은 글씨가 너무 어설퍼서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쓴 글자 같았는데 마지막에 나온 것은 어느 정도 나았다. 차례차례 희미하게 떠오르는 흰 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뒤 이 시각에 죽을 운명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을 실행하라. 즉......'(p.89)

  죽은 네 명의 남녀는 일주일 전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로그캐빈 B-4에서 숙박했다. 그곳에서 의문의 비디오를 함께 보았는데, 음울하고 음산한 영상은 카메라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깜빡임과 함께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죽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즈유키가 그곳에 가서 영상을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삭제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괴이한 화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을 본 사람은 정확히 일주일 뒤에 죽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이 나온 부분은 지워졌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내용을 알고 책을 읽어서 공포감이나 무서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모르고 책을 읽었다면, 일주일이라는 남은 시간이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냥 흘끗거리면서 화면을 보던 것뿐인 데다, 그 애는 의미조차......"

  "시끄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꿈이 무너져 버린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족 그 자체가 소멸하려 하고 있었다. 전혀,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에 의해.(p.151)

  "바이러스란 건 말이지,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선을 떠도는 것이야. 애초부터 말해 보면 인간의 세포 내에 있는 유전자라는 설도 있을 정도야.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라. 그냥 생명의 탄생과 그 진화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해."(p.231)

  "야, 아사카와. 재미있지 않냐? 세포 속의 유전자가 튀어나와서 별개의 생물이 된다는 말이. 상반하는 존재가 모두 그 근원이 동일할지도 모르는 거야. 빛과 어둠이라도,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이좋게, 모순되지도 않게 동거하고 있었어. 신과 악마도 그렇지. 간단하게 말해 타락한 신이 악마라고 불리는 것뿐이고, 원래는 같은 거야. 남자와 여자도 그렇지? 원래는 양성을 둘 다 보유하고 있고, 지렁이나 민달팽이도 여성 성기와 남성 성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지. 그거야말로 완벽한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p.231-232)

  "악마란 건, 항상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존재야. 14세기 후반에 유럽 전 국토를 뒤덮었던 페스트를 알아? 전 인구의 반 가까이 죽었어. 믿어지냐? 반, 일본 인구가 6000만이나 사라지는 거랑 똑같아. 물론 당시 예술가는 페스트를 악마에 견주었어. 지금도 그렇잖아? 에이즈를 현대의 악마라고 멋대로 부르지. 그런데, 악마는 결코 인간을 사멸시키려고 하지 않아. 왜냐면...... 인간이 없으면, 그놈들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바이러스는 말이지, 바이러스도 숙주인 세포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잖아. 그런데 인간은 천연두 바이러스를 사멸하게 하다니. 진짜, 그런 것이 가능할까?"(p.233)

  증식 증식 증식 증식

  바이러스의 본능, 그것은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것. '바이러스는 생명의 기능과 구조를 가로채서 자기 자신을 늘려 간다.'(p.306)

  자신이 이 일주일 동안 한 일, 그리고 류지가 하지 않았던 일. 분명하지 않은가! 자신은 그 비디오를 빌라 로그캐빈에서 가져와서, 복사해서 류지에게 보여 주었다. 주문의 내용, 간단하지 않은가.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복사해서 남에게 보여 주는 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서 증식하기를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p.307)

  제한된 시간 안에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의문의 비디오를 복사해서 고교 동창인 친구 다카야마 류지의 도움을 받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해답은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아내와 딸이 그 영상을 보았다. 점점 처절한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화면 속의 여인 사다코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현대의 문물인 비디오재생기와 테이프, 인류의 생존과 진화에 크게 관여해온 바이러스... 이 둘의 기묘한 결합은 작가적 상상으로 무시무시한 링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숨은 기막힌 반전은 독자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야기의 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기묘한 여운은 오랫동안 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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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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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권영주 역, [애프터 다크], 비채, 2015.

Murakami Haruki, [AFTERDARK], 2004.

  잠시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찔렸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최근에 읽은 그의 단편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하루키의 (길지 않은) 장편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화불량(?)이 재발한 기분이다.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를 할 틈이 없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단숨에 읽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애프터 다크]는 어둠이 내린 후의 도시에서 평범하면서 그렇지 않은 하루를 보여주는데, 인물과 배경으로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10여 년 전에 작가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며 [어둠의 저편](문학사상, 2005.)으로 출간했고, 이번에 비채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출간한 작품이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연합과 결별이다.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인천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지적 장애인을 모아놓은 시설이었는데, 그곳에는 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먹은 아저씨와 아줌마로 보이는 이들이 서너 살의 어린아이로 살고 있었다. 사회복지라는 단어가 낯선 시절에 태어나 누군가로부터 버려져 이제는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나의 세계에서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시간은 멈춘 것만 같았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과는 다르게 할 게 없었던, 더 젊은 시절에는 밤을 새운 적이 별로 없었다. 건강의 이유가 있었고, 공부나 다른 것에 별다른 취미를 붙이지 못해 무언가를 하면서 뜬눈으로 아침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주기적으로 밤을 새우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아주 특별한(?) 보직 덕분에 정규 근무 이외에 밤을 새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유지되는 시스템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밤을 새우고, 청춘의 시절에는 내가 그 일을 하고,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이것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릉에 잠수함 무장공비가 나타나도 관계가 없으면 같은 시간에 딴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함께하는 관계가 그립다.

  "중학교 때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블루스엣>이란 재즈 레코드를 우연히 샀어. 아주 예전 엘피. 왜 그런 걸 샀을까. 기억이 안 나. 그때까지 재즈는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어쨌든 A면 첫 곡으로 <파이브 스폿 애프터 다크>란 곡이 들어 있었는데, 이게 참 절절하게 좋더라고. 트롬본을 부는 건 커티스 풀러. 처음 들었을 때 두 눈에서 콩깍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더라. 그래, 이게 내 악기다 싶었어. 나하고 트롬본. 운명적인 만남."(p.26)

https://www.youtube.com/watch?v=_BlHRPXPx-4

  싸늘한 공기가 맴도는 가을의 끝자락,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날짜가 바뀐다. 저녁 11:56... 대학 신입생쯤으로 보이는 아사이 마리는 '데니스'에서 홀로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잠시 뒤 한 남자가 들어오는데, 연주자로 보이는 그는 우연히 그녀를 알아보고 자리를 합석한다. 비슷한 시간 11:57... 두 살 터울인 언니 아사이 에리는 집의 침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다. 다음날 새벽 12:25... '데니스'에서 남자는 나가고, 남자의 소개로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몸집이 큰 여자가 마리를 찾아와 통역을 부탁한다. 그녀를 따라가 보니 몸을 파는 중국인 여자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울고 있다. 계속해서 12:37... 에리의 방 TV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신원불명의 남자가 나타나고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간대 장소별로 아침까지 이어진다.

  우리 시점은 가공의 카메라로서 방 안에 있는 그런 사물을 하나씩 포착해 시간을 들여 꼼꼼히 비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침입자다. 우리는 본다. 귀 기울여 듣는다.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정통적인 시간 여행자와 동일한 규칙을 지키는 셈이다. 관찰하지만 개입은 하지 않는다.(p.34)

  작가는 관음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시간을 여행하는 관광객처럼 물리적 접촉 없이 역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단지 관찰자로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본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카메라의 움직임처럼 묘사하는데, 현실적이지만 때로는 신비하고 초감각적인 상황을 부여하기도 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자매, 섬세한 백설공주처럼 자란 예쁜 언니 에리와 씩씩한 양치기 목동 같은 동생 마리에게 일어나는 하룻밤의 사연은 시간과 공간을 따라가는데... 같은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있고, 어떤 이는 몸을 팔다가 폭행을 당하고, 어떤 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어떤 이는 추적자의 눈을 피해 살아가고, 어떤 이는 변태적 기질을 숨기며 평범하게 보이려 하고, 어떤 이는 잠을 자며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같은 시간이지만 모두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잠깐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관계를 맺는데, 어떤 관계는 더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왜 우리는 다들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너희 경우를 들어 말하자면, 한 부모한테 태어나서 한 집에서 자랐고 똑같이 여자애인데 어떻게 그렇게 다른 인격을 갖게 되는 거지? 어디에 그런 갈림길 같은 게 있는 걸까? 한 명은 수기신호의 깃발만한 비키니를 입고 풀사이드에서 매력적으로 그저 누워만 있고, 또 한 명은 학교 체육시간에 입는 수영복 같은 걸 입고 돌고래처럼 물속을 헤엄쳐다니고......"(p.20)

  "그 이야기에 교훈 같은 게 있어?"

  "교훈은 아마 두 개일 거야. 첫째는,"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든다. "사람은 모두 각각 다르다는 것. 형제라도 말이지. 그리고 또 하나는," 손가락 하나를 더 든다. "뭔가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p.23)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마리는 말한다. "왜 호텔 이름이 '알파빌'이죠?"

  "글쎄, 왜려나. 아마 우리 사장이 지었을 텐데. 러브호텔 이름이야 하나같이 대충 붙인다고. 결국은 남녀가 그걸 하러 오는 데니까, 침대하고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고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비스름한 것 하나만 있으면 돼.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거든요, <알파빌>. 장 뤽 고다르의."

  ...

  "가령 알파빌에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은 체포돼서 공개 처형을 당해요."(p.71-72)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 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그러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하는 걸로써 자기 몸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슥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슥 이동하는, 그런 공유적인 상태를 낳는 거야. 아마도."(p.113)

  "그런데 법원에 몇 번 드나들면서 재판을 방청하다 보니까, 재판을 받는 사건하고 그 일에 얽힌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관심이 생기더라고. 아니, 그보다 점점 남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 기분이 참 묘하더라. 그렇잖아? 거기서 재판을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나랑 다른 세계에 살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나랑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하고 내가 사는 세계 사이엔 튼튼하고 높다란 벽이 있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잖아? 내가 흉악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없는걸. 난 평화주의자고, 성격은 온후하고, 어렸을 때부터 누구한테 주먹을 휘둘러본 적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재판을 볼 수 있었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그는 얼굴을 들고 마리를 본다. 그리고 표현을 골라 말한다.

  "하지만 법원에 드나들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본인의 진술을 듣다 보니까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어.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거야. 두 세계를 가르는 벽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있어도 종이로 만든 얄팍한 벽일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자신 안에 저쪽이 벌써 몰래 숨어들어와 있는데 모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지만."(p.116-117)

  "<러브 스토리> 본 적 있어? 옛날 영화." 다카하시는 묻는다.

  ...

  다카하시는 잠시 위를 올려다보며 줄거리를 떠올린다. "해피엔드. 둘이서 오래도록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 사랑의 승리지. 옛날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최고다 하는 느낌으로. 번쩍번쩍 광나는 재규어를 몰고, 스쿼시를 치고, 겨울이면 가끔 눈싸움을 하고. 한편,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던 아버지는 당뇨병이랑 간경변증이랑 메니에르병으로 고생하다가 고독하게 죽어."(p.121-123)

  "우리는 나서부터 줄곧 한 지붕 밑에 한 자매로 살아왔지만, 성장한 세계는 많이 달랐어. 예를 들어 먹는 음식 하나만 봐도 똑같지 않았어. 그 왜, 이것저것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그 사람은 다른 식구들이랑 다른 특별한 메뉴를 먹었거든."(p.153)

  "그 애도 열아홉 살이었어." 마리는 말한다.

  "그 애?"

  "'알파빌'에서 모르는 남자한테 얻어맞고 옷가지도 모조리 빼앗겨서 알몸뚱이로 피 흘리던 중국인 여자애. 예쁜 애였어. 하지만 그 애가 사는 세계엔 준비 기간이 없어.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 아닌지, 그런 건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아. 안 그래? ...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아주 강하게.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른 때 만났다면 분명히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누구한테 그런 식으로 느끼는 일, 별로 없는데, 별로라고 할지, 전혀라고 할지."(p.155-156)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p.189)

  "언니가 두 달쯤 전에 '지금부터 얼마 동안 자야겠다'라고 말했어요. 저녁 먹다가 가족 앞에서 선언한 거예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아직 7시였지만 언니는 늘 잠이 불규칙했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거든요. 우리는 '잘 자'라고 했어요. 언니는 식사에는 손을 거의 안 대고 자기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어요. 그 이래로 계속 잠만 자요."(p.192)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 그래서 말이지, 만약 그런 연료가 나한테 없었다면, 기억의 서랍 같은 게 내 안에 없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반 동강 났을 거야. 어디 궁상맞은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길바닥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소중한 거, 시시한 거, 이런저런 기억을 그때그때 서랍에서 꺼낼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젠 틀렸다. 더는 못 해먹겠다 싶어도 그럭저럭 고비를 넘길 수 있어."(p.202-203)

  "대체 몇 시쯤 날이 밝는 거지?" 마리는 묻는다.

  다카하시는 손목시계를 본다. "이 계절이면 그러게, 6시 40분쯤 아닐까. 밤이 제일 긴 계절이니까 말이지. 얼마 동안은 아직 어두울 거야."

  "어둡다는 거, 꽤나 피곤하구나."

  "원래는 다들 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니까." 다카하시는 말한다. "인류가 어두워진 다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밖에 나오게 된 건,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아주 최근이거든. 해가 지고 나면 옛날 사람은 다들 동굴에 틀어박혀서 자기 몸을 지켜야 했어. 우리 체내 시계는 아직 해가 지면 자도록 설정돼 있는 거야."(p.220)

  세상과 단절된 채 잠을 자는 언니 에리, 열아홉 살 같은 나이에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마리와 중국에서 밀입국하여 몸을 팔다 폭행당해 울고 있는 여자의 만남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다른 삶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저마다의 삶을 사는 사람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딴 세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때로는 친밀함을 꿈꾸지만, 이들의 관계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어둠이 지난 후에는 분명히 밝은 해가 떠오르듯이 행복한 결말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 <러브 스토리>를 인용하면서 해피엔드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어둠이 내린 후 현대사회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고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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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최선 엮음 / 북오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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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편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북오션, 2013.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기도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꿈이었다.

더불어 평생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먼저 감동 하기를 원했고 시집을 읽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의무감이었다.

아쉽게 한동안 시를 잊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여류 시인이 국문과 강사로 있었는데,

우연히 기말고사 감독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초겨울의 싸늘한 강의실에서 우리는 직전까지 암기한 것으로 저마다의 논리를 펼치고 있었고

그녀는 그 틈에서 시를 썼다.

시인은 가까이에 있다.

문득 기리노 나쓰오의 어느 단편 소설에서 "결국은 시인, 시인은 청렴하니까. 소설을 쓰려면 악인이어야만 하지."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사물을 있는 대로 묘사하는 시인의 청렴함은 늘 왜곡하고 꾸밈으로 독자를 속이는 소설가의 음흉함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가는 만들어질 수 있어도 시인은 타고나야 한다는...

그래서일까?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한다.

성경에서 어느 책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순간의 망설임 없이 시편을 이야기한다.

150편의 시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고백이다.

고통과 탄식을 기쁨의 희열로 부르짖는다.

시를 읽기는 쉽지 않다.

  1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장 오, 그대는 궁핍하고도 풍요로워라

  3장 내 가슴 저리고...... 내 슬픔 찬란하오

  4장 잔혹한 시대에 자유를 외쳤고

  5장 지평선 멀리 하늘 품속 나무들의 속삭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포함해서

40여 명의 시 100편으로 삶, 조국, 사랑, 시인, 자연 등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격동의 시대를 보내며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희망의 기도로, 은유와 역설로, 때로는 강렬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p.14)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슷한 상처를 가졌기에 더 공감되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시가 주는 위로의 선물이다.

  <침묵> 표도르 튜체프

  침묵할 것, 나를 드러내지 말고

  내 감정과 꿈을 감추고

  그들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고요히

  일어나 걷도록 할 것

  그들을 고이 보듬으며 - 침묵할 것

  심장은 말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법

  다른 사람이 어찌 너를 이해하겠는가,

  네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말을 뱉어 버리면 생각은 거짓이 된다.

  샘은 휘저으면 흐려지는 법

  그것으로 살아가며 - 침묵할 것

  너 혼자서 네 속에서만 살 수 있을 것 -

  네 영혼 속에 신비롭고 환상적인 생각들이

  그 둥근 온 세상이 있으니

  바깥의 소음은 그것을 힘 빠지고 멍하게 할 뿐

  낮의 세상의 빛은 그들을 쫓아내려 하지 -

  그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 침묵할 것!(p32-33)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나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일깨우는 잠언이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네> 표도르 튜체프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네

  보편의 자로 잴 수도 없네

  그에겐 특이한 무엇이 있으니

  러시아는 오직 믿을 수 있을 뿐(p.88)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광활한 대륙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논리를 뛰어넘는 감정의 세계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만난 러시아 명시의 향연은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

지친 마음을 보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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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이노우에 유메히토, 김아영 역, [마법사의 제자들], 황금가지, 2015.

Inoue Yumehito, [MAHOUTSUKAI NO DESHITACHI], 2010.

  책을 읽은 후에 서평이 늦었는데, 일본소설 특유의 가벼움으로 지난여름을 함께한 작품이다. 과체중으로 고민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마르고 허약해서 유행병이 돌면 가장 먼저 병치레를 했다. 매번 고열과 어지러움으로 병원을 가까이하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웬만한 병을 다 앓아서 오히려 남과 다른 면역력을 지니게 되어 더 건강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가끔 엉뚱한(?) 상상을 했는데, 악성 바이러스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때에 내가 가진 면역 체계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나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망상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MERS)의 유행으로 전국이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을 때 출간한 이노우에 유메히토의 소설 [마법사의 제자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첫인상은 판타지를 연상하게 하는데, 실제 내용은 신종 바이러스를 소재로 하는 SF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지만, 미국의 마블 코믹스(Marvel Comics)와 비슷한 맥락을 보이는데... 유사한 영웅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데서 몇몇은 병을 앓은 후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다는... 아주 익숙하면서도 흥미롭다.

  어느 신문에선가 쓰기 시작한 명칭이지만 세간에서는 이 신종 전염병을 '용뇌염(龍腦炎)'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류오 대학병원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이 명칭이 널리 퍼져 일본 내에서 거의 고착화된 탓에 세계보건기구는 'dragonviral encephalitis'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직역하면 '드래건바이러스 뇌염'이다.(p.46)

  용뇌염이 발병하면 두통과 함께 높은 발열이 일어난다. 구토가 계속되고 목 근육이 경직되거나 빛을 극도로 눈부시게 느끼거나 환각을 보는 등 여러 의식장애가 나타나고, 길어도 하루, 짧으면 5~6시간 만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백신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거의 100퍼센트가 이런 경위를 밟았다.(p.48-49)

  야마나시에 있는 류오 대학병원에서 원내 감염이 발생했다는 소식으로 <주간 이터니티>의 기자인 나카야 교스케는 취재를 위해 병원을 찾아간다. 병원 측은 빠른 조치로 시설을 격리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상태인데, 그 안에는 입원환자, 외래환자, 방문객, 병원 도우미, 의사, 간호사... 등 대략 450여 명이 격리 중이다. 그러면서 6명, 16명... 점차 늘어가는 희생자의 신원이 알려진다. 이미 병원 입구는 경찰과 취재진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교스케는 기삿거리를 찾아 주변을 수소문하다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약혼자를 찾아온 오치아이 메구미라는 여자를 만나 인터뷰한다. 전날까지 병원에서 약혼자를 만났다는 그녀는 대화 도중에 발병 증상이 나타나고 교스케는 자진 신고로 구급차를 불러 함께 격리된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을 대부분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실 거라 봅니다. 오치아이 메구미 씨의 염동력, 오키쓰 시게루 씨의 회춘, 나카야 교스케 씨의 투시 능력, 그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 앞으로 제가 드릴 말씀을 믿어 주실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생체 방위 능력이라고 할까요. 방위 시스템 같은 게 갖춰져 있습니다."(p.376-377)

  "최강인 게 최악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 무엇보다 악질인 건 우리가 이 방위 시스템을 일절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거지. 우리들은 체내 박테리아를 무의식적으로 퇴치하고 있어. 선생님들 설명에 따르면 그거랑 같은 것 같아. 우리를 덮쳐 오는 걸 방위 시스템은 자동적으로 배제해 버리는 거지. 메구미는 자신의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태세를 갖출 필요가 전혀 없는 거야. 우리들을 때리려고 팔을 들어 올리면 그 팔뼈가 가루처럼 조각나 버리니까."(p.355)

  보호구를 착용한 이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극도의 공포심... 더욱 뚜렷해지는 증상... 육체적 고통... 열흘간의 의식불명 상태... 의료팀이 연구를 위해 확보한 생존자는 4명이다.

  ① 고바타 고조는 류오 대학에서 근무 중에 가장 먼저 피를 토하고 쓰러진 최초의 감염자이다. 그는 여전히 의식불명이다.

  ② 오키쓰 시게루는 93세 노인으로 고바타 고조가 돌보던 환자이다. 감염 후에 점점 젊어져 20대로 보이게 되고, 유체이탈과 빙의와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된다.

  ③ 오치아이 메구미는 고바타 고조와 약혼한 사이로 바이러스의 외부 유출자이다. 감염 후에 물질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염력과 공중부양의 능력을 갖추게 된다.

  ④ 나카야 교스케는 감염 후에 시간과 공간을 투시하여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완벽한 생체 방어 시스템으로 보호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부에서 어떤 위협이 가해지면 신체는 자동으로 방어한다. 가령 이들을 때리려는 사람은 팔이 부러지고, 이들에게 총을 쏜 사람은 총알이 튕겨 나가 쏜 사람이 맞게 된다.

  "역시나 마음은 신체에 깃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양로시설에서 지낼 때엔 생각한다든가 떠올리는 게 전부 옛날 기억뿐이었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지금이 즐겁다는 생활을 한동안 한 적이 없으니까.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밖엔 하지 않았지. 앞으로의 일 따윈 생각하거나 걱정할 기력도 없었어. 그런데 이렇게 몸이 젊어지고 나니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한 거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엔 급기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려면 젊음이 필요하다는 게지. 이런 사치스러운 불안을 느끼는 것도 회춘한 덕택일세. 고마운 일이지."(p.130)

  보고 싶은 것만이라니,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과거나 미래를 투시할 대상을 고르는 건 할 수 있지만 그 과거나 미래가 어떤 것인지는 볼 때까지 알 수가 없다.

  그 여자아이가 불치병에 걸려 병원 침대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될 줄은 투시를 해서 처음 알게 된 일이다. 투시하기 전부터 알던 일이 아닌 것이다. 알고 있었더라면 볼 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해보면 어떤 인간의 미래를 투시하는 일이란 그 인간이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람이 가는 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p.230)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이들... 더구나 세상이 믿기 어려운 초능력을 갖게 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하다. 여전히 대학병원의 부속 건물에서 통제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메구미는 바이러스를 병원 밖으로 유출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시게루는 갑자기 젊어져 앞날을 걱정해야 하며... 교스케는 불행한 미래를 보는 것으로 괴로워한다. 병원 밖에서는 이들을 향한 호기심과 증오심이 부풀어 가는데... TV와 매스컴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문제가 있다.

  제목이 왜 '마법사의 제자들'일까? 책을 읽는 동안 어디에도 마법사나 스승은 나오지 않아서 계속해서 가진 의문이다. 출간 타이밍과 연관해서 차라리 제목을 '용뇌염'이나 '드래건 바이러스'라고 했으면 너무 직설적이었을까?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에 모두가 죽는 상황에서 살아나 특별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설정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마치 앞으로의 시리즈를 기대할 만한 것처럼 작가는 캐릭터와 초능력에 관해서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세밀하고 논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한 권으로 끝나는 아쉬움이 큰데, 혹시라도 깜짝 놀랄만한 후속작으로 제목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지는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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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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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 공진호 역, [파수꾼], 열린책들, 2015.

Harper Lee, [GO SET A WATCHMAN], 2015.

1. 무엇을 먼저 읽을 것인가?

  워낙 유명해서, 미디어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퍼 리라는 이름과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 2015.)라는 제목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장벽과 감성이 메마른 삶을 살다 보니 아쉽게 책을 읽지 못했다.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기억에서 다시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을 되새기게 한 것은 잊힌 원고의 발견과 55년 만의 출간이라는 [파수꾼]의 소식 때문이다.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관계를 알아야 하는데, 긴 세월만큼 새로운 책을 출간하기까지 작가와 작품이 가진 이야기는 어쩌면 책의 내용보다 더 흥미롭고 뭔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퍼 리는 편집자들의 제안에 따라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개고한 원고를 제출하고 10월에 J. B. 리핀코트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테이 호호프는 원고를 달리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의 관점에서 쓴 [파수꾼]은 당시 한창 일어나고 있던 시대 상황의 뜨거운 이슈에 너무 가깝고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퍼 리는 그녀의 조언에 따라 이번에는 스카웃이라는 어린이의 일인칭 목소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제한적인 삼인칭 목소리로 쓴 [파수꾼]과는 전혀 다른 [앵무새 죽이기]가 1960년 7월 11일에 탄생했다.(p.396-397)

  하퍼 리는 1926년 앨라배마 주 먼로빌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헌팅턴 여자 대학교와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1949년 뉴욕으로 간다. 1956년 글쓰기에 관심과 재능을 보인 그녀를 위해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1년 치 생활비를 주면서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써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해서 1957년 [파수꾼]이라는 제목으로 원고가 만들어진다. 책의 출간을 준비하면서 편집자는 과거로 돌아가 작중 인물인 진 루이즈의 아버지 애티커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했고, 작가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글을 다시 써서 1960년 [파수꾼]과는 전혀 다른 [앵무새 죽이기]를 완성한다.

  그래서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의 20년 뒤의 이야기지만, 작품의 순서상 먼저 쓰였기 때문에... 두 책의 관계는 [파수꾼]을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자 후속작이라고 하고, 하퍼 리가 쓴 최초이자 최후의 작품이라고 한다. 조금 더 설명하면 [앵무새 죽이기]는 늦게 쓰고 먼저 출간하였으며 1930년대를 배경으로 6살 어린 아이의 시선이다. [파수꾼]은 먼저 쓰였으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뒤늦게 출간하게 되었으며 1950년대를 배경으로 20대 중반 여성의 시선이다. 이미 [앵무새 죽이기]를 읽은 독자라면 아무런 고민 없이 [파수꾼]을 읽으면 되겠지만, 두 권을 처음으로 만나는 독자라면 어느 것을 먼저 읽을 것인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쉽지 않은 선택으로... 나는 작가의 원고 수정 과정을 뒤따르고 싶어서 [파수꾼]을 먼저 읽기로 했다.

2. 논란과 실망 그런데도

  [앵무새 죽이기]는 작품의 호평으로 1961년 퓰리처상을 받고 40여 개 나라에 번역되어 4,00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1962년 그레고리 펙을 주연으로 영화가 제작되고 성경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는 책으로 평가되어 단숨에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작가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다.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를 출간한 뒤 소설 한 편을 더 쓰고 일단 보류했던 [파수꾼]을 낼 생각이었지만, 결국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이 있지만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면, 그녀가 바라지 않았던 규모의 인기와 관심이 숨 막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앵무새 죽이기]를 능가하는 작품을 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집필 계획을 세우고 관련 자료를 모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앵무새 죽이기]가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등 성공과 인기는 그녀의 사생활을 앗아 갔다. 그녀는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 그런 인기와 명성은 바라지 않았다.(p.397)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중의 반응으로 하퍼 리는 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전작의 가치를 훼손할까 두려워 작품활동을 중단한다. 최근까지 [앵무새 죽이기]는 그녀의 유일한 소설로 알려졌었다. 그리고 2015년 하퍼 리의 변호사 토냐 카터는 그녀의 안전 금고를 조사하다가 [파수꾼]이라는 원고를 발견한다.

  저자의 동의로 출간한 [파수꾼]은 영미권에서 논란과 실망을 불러일으킨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주위의 비난에도 신념을 지키며 흑인의 인권보호에 앞장섰던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가 [파수꾼]에서는 전혀 다른 늙은 인종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독자의 일부는 미국의 영웅으로 여기던 핀치 변호사의 변절을 절대로 수긍할 수 없다는 비판을 하고, 일부 평론가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미숙한 초고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출판계에서는 올해의 베스트셀러를 기대하고 있다.

3. 내가 만난 최고의 성장소설

  [파수꾼]이 공개된 후에 안타깝게도 아주 오래전 작가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인지 모르지만, [앵무새 죽이기]의 미래 독자까지 흥미를 떨어뜨리게 한 소설이니 차라리 출간하지 말았어야 할 책이라는 언론의 싸늘한 탄식이 있었다고 한다(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상은 이 책을 읽으므로 오히려 [앵무새 죽이기]를 바라보게 한다. 지난 50여 년간 문학은 짜릿한 감동으로 독자를 매료하는 수많은 글쓰기 기법이 발전해왔다. 현대의 시선으로 요즘에 나오는 소설과 비교해서 어쩌면 투박하고 클라이맥스가 아쉬운 구성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런데도 [파수꾼]은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이사야 21:6)

  [앵무새 죽이기]에서 6세이던 스카웃은 [파수꾼]에서 26세의 진 루이즈 핀치로 그려진다. 1950년대는 흑인 인권운동의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던 시대로 의견의 대립과 다툼이 빈번했다. 뉴욕에서 개방된 삶을 살다가 잠시 고향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세계관과 갈등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흑인을 변호하며 평등하게 대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법 정의를 실현했을 뿐, 흑인을 비하하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충격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노하고 논쟁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사랑은 아무하고나 해도 결혼은 동류와 한다. 진 루이즈에게 그것은 본능에 해당하는 금언이었다.(p.19)

  그녀는 그와 거의 사랑에 빠졌다. 아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면 빠진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모호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물론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경우든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p.26)

  "고모, 아빠한테 필요하다면 내가 여기 와 있을 거란 거 고모도 아시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전혀 필요가 없어요. 그건 아빠가 알고 내가 알아요. 오빠가 이렇게 되기 전 우리가 살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가족의 회복은 훨씬 더딜 거란 걸 모르세요? 고모, 내가 고모를 이해시킬 수는 없겠지만, 내가 정말 아빠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길은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는 거예요. 독립해서 내 인생을 사는 거라고요. 그걸 모르겠어요?"(p.48)

  "여자는 노련하면서도 마음을 터놓지 않는 남자를 원해, 네게 그런 요령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자들이 무력하다고 느끼게 만들어, 특히 불쏘시개로 쓰는 소나무 그루터기도 거뜬히 들 수 있는 여자란 걸 알아도 말이야. 여자 앞에서는 절대로 자신을 의심하면 안 돼. 여자를 이해 못 하겠다는 말도 하면 안 되고."(p.71)

  그녀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따뜻하고 편안한 과거의 아주 작은 음성이었다. "여러분, 제가 이 세상에서 믿는 구호가 하나 있다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p.154)

  애티커스는 변호사 인생을 걸고 모험했다. 변호인으로서 배심원 앞에 서서 기소장의 부정확한 점을 이용하여 메이콤 군에서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었다. 강간 혐의로 기소된 그 흑인 청년은 무죄라는 선고를 얻어 낸 것이다. 검찰 측의 주요 증인은 백인 소녀였다.(p.155)

  진 루이즈가 생각할 수만 있었더라면, 아주 옛날부터 있던 돌고 도는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바라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관련된 중요 사건은 2백 년 전에 시작되어 현대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과 가장 가혹한 평화도 파괴시키지 못한 당당한 사회에서 펼쳐졌고, 이제는 어떤 전쟁도 평화를 구할 수 없을 문명의 황혼기로 되돌아와 개인의 장에서 다시 펼쳐질 참이었다. - 각주) '2백 년 전에 시작된 사건'은 독립 전쟁을,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은 남북 전쟁을, '그 후의 가장 가혹한 평화'는 전쟁은 안 하지만 인종 차별이 존재해 온 시기를, '자존심이 강한 사회'는 남부의 백인 사회를, 마지막 문장은 진 루이즈의 개인적인 것을 나타낸다.(p.173)

  그들은 어째서 소름이 돋지 않지? 그들은 어떻게 예배 시간에 듣는 모든 것을 독실하게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런 말들을 하고 그런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데 토 나오지도 않나?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나는 다른 무엇이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껏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은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인데. 똑같은 사람들, 바로 이 사람들. 그러니까 내가 문제인 거야, 그들이 아니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p.234-235)

  눈이 멀었거나, 그게 내 모습이다. 나는 눈을 뜬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려 한 적이 없다. 얼굴만 살짝 봤을 뿐이다. 완전히 눈이 멀었다, 돌처럼...... 스톤 목사. 스톤 목사는 어제 예배에 파수꾼을 세웠다. 그는 내게 파수꾼을 세워 주었어야 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 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데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나가서 그들에게 그 모든 스물여섯 해는 누가 장난을 치기에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든 너무 긴 시간이라고 공표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p.254-255)

  "자, 그런데 말이다, 스카웃." 핀치 박사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남부와는 맞지 않는 어떤 정치 철학이 강요되고 있는데, 남부는 그에 대한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 곤경에 처했다는 걸 깨닫고 있단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반복되고 있어. 인간이 인간인 한, 확실히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것 같지 않구나. 정말이지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피를 덜 흘리는 재건이 되기를 바란다."(p.278)

  "하나만 물어보자, 하나만.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해? 말해 봐,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야?"

  "어떻게? 겉만 번지르르한 네가 주민 협의회에 가까이 가지 않길 원해! 아빠가 네 맞은편에 앉아 있든, 영국의 왕이 네 오른편에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네 왼쪽에 앉아 있든 어떻든 상관없어. 나는 네가 남자답게 살기를 원해, 그뿐이야!"(p.329)

  "욕해 봐야 아무 소용 없어. 다음과 같은 점을 잘 생각해 봐. 강 건너 애봇 군은 문제가 심각해. 거의 인구의 4분의 3이 니그로야. 유권자의 수는 이제 거의 반반이란다. 거기에 있는 그 큰 사범 학교 때문이지. 저울이 반대쪽으로 기울면 어떻게 될까? 군에 완전한 등기소를 유지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니그로가 투표로 백인을 서서히 밀어내면 결국 군청의 모든 지국에 니그로가 들어가 있을 테니까."(p.342-343)

  "저는 아빠가 변호한 그 강간 사건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아빠는 정의를 사랑해요, 그건 틀림없어요. 그런데 그건 사건 적요서에 항목별로 열거된 추상적인 정의인 거죠. 그 흑인 청년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정연한 사건 적요서를 좋아하신 거죠. 그 소송 사건이 아빠의 정연한 기질과 충돌한 거예요. 그래서 아빠는 무질서를 질서로 만들어야 했던 거죠. 그건 아빠에게 있는 강박 충동이에요. 그리고 이제 그게 아빠에게 자업자득이 되어 돌아오는 거고요."(p.350)

  "......그런데 진 루이즈, 이 아가씨야, 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 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인간의 결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지. 그것을 깨닫는 게 쉽지 않았으리란 것은 내가 인정한다. 형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형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수를 하기는 해.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 왔지."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인물의 말을 경청했다.

  "네가 우연히 지나치다 네 아버지가 그의 양심에, 즉 너의 양심에 정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하는 것을 봤을 때, 너는 그야말로 견딜 수 없었던 거야. 육체적으로 아팠던 것이지. 네 인생은 생지옥이 되었고. 너는 너 자신을 죽여야만 했는데, 네 아버지가 너를 독립된 실체로서 살아가게 하려고 너를 죽여야만 했던 거야."(p.372-373)

  이번에 집에 온 뒤로 줄곧 상당히 불쾌한 이야기들을 들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너는 예의 군마(軍馬)에 올라 무조건 그들을 쳐서 쓰러뜨리기는커녕 돌아서 달아났어. 너는 그럼으로써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지, '나는 이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이 싫어, 그러니까 나는 이들과 상대하지 않아'라고 말이야. 이것아, 그들과 상대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절대로 성장하지 못할 거야. 예순 살이 되어도 지금과 똑같을 거라고. 그러면 너는 내 조카가 아닌 괴짜가 되는 거야. 너는 마음속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여지를 안 주는 편이야, 그들의 생각이 네 생각에 아무리 어리석어도 말이야."(p.375-376)

  "좋다, 멜번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내 말로 바꿔 말해 주지. 친구에게 네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틀렸을 때란다, 진 루이즈, 친구가 옳을 때는 네가 필요 없지."

  "무슨 뜻이죠?"

  "요즈음 남부에서 살려면 특정한 종류의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뜻이야. 너한테 아직은 그게 없지만, 그 근본이 조금 보이거든. 너는 겸손한 마음이 없어서......"

  "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지혜의 근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그거야. 겸손."(p.383-384)

4.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위로가 되기를

  [파수꾼]은 크게 7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부는 분명한 색채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1부는, 진 루이즈 핀치(스카웃)는 매우 독립적이고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있다. 뉴욕에서 생활하는데, 2주간의 휴가로 고향 집에 온다. 2부는, 앨라배마 주 메이콤 군에서 핀치 가문이 자리 잡게 된 배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통해 앞으로 미국 남부의 전통적 세계관과의 갈등을 암시한다. 3부는,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르게 변해버린 마을과 주민 협의회에서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를 보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논란이 되는 내용의 시작이다. 4부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으로 어린 시절에 잘못된 지식으로 겪었던 웃지 못할 일과 현재의 잘못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나열한다. 갈등의 심화로 흑인 운전자에 의해 백인이 사망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5부는, 지역 주민이 가지고 있는 흑인에 관한 편견과 남부의 보수적인 전통에 얽매여 닫힌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대화이다. 이들은 흑인 인권운동 세력을 공산주의로 매도한다. 6부는, 갈등의 최고조로 분노하고 논쟁하고 좌절한다. 7부는, 갈등의 해소와 화해 그리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것 참. 아 이것 참, 그래.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해" - 각주)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이 미완의 장편 [뤼사앙 뢰방](사후 1894년 출판)의 원고 여백에 남긴 메모. 소설은 추상적인 생각을 나타내기에 앞서 우선 재미있는 이야기로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p.264)

  하퍼 리는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충분한 즐거움을 준다. 인권운동과 의견대립이 한창인 시대에 시종일관 빈틈없는 논리로 강력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진 루이즈 핀치를 주인공으로 과거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현재의 하고 싶은 말을 재치있게 서술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작가는 단 한 권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쓴 후에 천문학적인 인세를 받으며 평생을 유유자적하게 산 것으로 오해했다. 글을 읽으면서 [앵무새 죽이기]의 성공 이후에 후속작을 준비하는 그녀가 받았을 심리적인 압박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글을 쓰는 것은 인생의 의미이고 생명을 위해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작가에게 글을 쓰지 않는 고통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이제라도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작품으로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정치적 신념으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성숙한 지혜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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