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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 권영주 역, [애프터 다크], 비채, 2015.
Murakami Haruki, [AFTERDARK], 2004.
잠시 방심한 사이에 허를 찔렸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최근에 읽은 그의 단편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하루키의 (길지 않은) 장편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화불량(?)이 재발한 기분이다. 왜 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를 할 틈이 없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단숨에 읽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애프터 다크]는 어둠이 내린 후의 도시에서 평범하면서 그렇지 않은 하루를 보여주는데, 인물과 배경으로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10여 년 전에 작가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며 [어둠의 저편](문학사상, 2005.)으로 출간했고, 이번에 비채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출간한 작품이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연합과 결별이다.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인천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지적 장애인을 모아놓은 시설이었는데, 그곳에는 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먹은 아저씨와 아줌마로 보이는 이들이 서너 살의 어린아이로 살고 있었다. 사회복지라는 단어가 낯선 시절에 태어나 누군가로부터 버려져 이제는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나의 세계에서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섰을 때 시간은 멈춘 것만 같았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과는 다르게 할 게 없었던, 더 젊은 시절에는 밤을 새운 적이 별로 없었다. 건강의 이유가 있었고, 공부나 다른 것에 별다른 취미를 붙이지 못해 무언가를 하면서 뜬눈으로 아침을 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주기적으로 밤을 새우게 된 것은 군대에서였다. 아주 특별한(?) 보직 덕분에 정규 근무 이외에 밤을 새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돌아가고 유지되는 시스템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밤을 새우고, 청춘의 시절에는 내가 그 일을 하고,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이것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릉에 잠수함 무장공비가 나타나도 관계가 없으면 같은 시간에 딴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함께하는 관계가 그립다.
"중학교 때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블루스엣>이란 재즈 레코드를 우연히 샀어. 아주 예전 엘피. 왜 그런 걸 샀을까. 기억이 안 나. 그때까지 재즈는 들어본 적도 없었는데. 어쨌든 A면 첫 곡으로 <파이브 스폿 애프터 다크>란 곡이 들어 있었는데, 이게 참 절절하게 좋더라고. 트롬본을 부는 건 커티스 풀러. 처음 들었을 때 두 눈에서 콩깍지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더라. 그래, 이게 내 악기다 싶었어. 나하고 트롬본. 운명적인 만남."(p.26)
https://www.youtube.com/watch?v=_BlHRPXPx-4
싸늘한 공기가 맴도는 가을의 끝자락,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날짜가 바뀐다. 저녁 11:56... 대학 신입생쯤으로 보이는 아사이 마리는 '데니스'에서 홀로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잠시 뒤 한 남자가 들어오는데, 연주자로 보이는 그는 우연히 그녀를 알아보고 자리를 합석한다. 비슷한 시간 11:57... 두 살 터울인 언니 아사이 에리는 집의 침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있다. 다음날 새벽 12:25... '데니스'에서 남자는 나가고, 남자의 소개로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몸집이 큰 여자가 마리를 찾아와 통역을 부탁한다. 그녀를 따라가 보니 몸을 파는 중국인 여자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울고 있다. 계속해서 12:37... 에리의 방 TV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신원불명의 남자가 나타나고 기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간대 장소별로 아침까지 이어진다.
우리 시점은 가공의 카메라로서 방 안에 있는 그런 사물을 하나씩 포착해 시간을 들여 꼼꼼히 비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침입자다. 우리는 본다. 귀 기울여 듣는다.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정통적인 시간 여행자와 동일한 규칙을 지키는 셈이다. 관찰하지만 개입은 하지 않는다.(p.34)
작가는 관음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치 시간을 여행하는 관광객처럼 물리적 접촉 없이 역사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단지 관찰자로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본다.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카메라의 움직임처럼 묘사하는데, 현실적이지만 때로는 신비하고 초감각적인 상황을 부여하기도 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사는 자매, 섬세한 백설공주처럼 자란 예쁜 언니 에리와 씩씩한 양치기 목동 같은 동생 마리에게 일어나는 하룻밤의 사연은 시간과 공간을 따라가는데... 같은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있고, 어떤 이는 몸을 팔다가 폭행을 당하고, 어떤 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어떤 이는 추적자의 눈을 피해 살아가고, 어떤 이는 변태적 기질을 숨기며 평범하게 보이려 하고, 어떤 이는 잠을 자며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같은 시간이지만 모두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잠깐 시간을 공유하고 공간을 공유하며 관계를 맺는데, 어떤 관계는 더 친밀한 사이가 되기를 희망한다.
"왜 우리는 다들 각자 다른 인생을 살게 되는 걸까? 그러니까 너희 경우를 들어 말하자면, 한 부모한테 태어나서 한 집에서 자랐고 똑같이 여자애인데 어떻게 그렇게 다른 인격을 갖게 되는 거지? 어디에 그런 갈림길 같은 게 있는 걸까? 한 명은 수기신호의 깃발만한 비키니를 입고 풀사이드에서 매력적으로 그저 누워만 있고, 또 한 명은 학교 체육시간에 입는 수영복 같은 걸 입고 돌고래처럼 물속을 헤엄쳐다니고......"(p.20)
"그 이야기에 교훈 같은 게 있어?"
"교훈은 아마 두 개일 거야. 첫째는,"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든다. "사람은 모두 각각 다르다는 것. 형제라도 말이지. 그리고 또 하나는," 손가락 하나를 더 든다. "뭔가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p.23)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마리는 말한다. "왜 호텔 이름이 '알파빌'이죠?"
"글쎄, 왜려나. 아마 우리 사장이 지었을 텐데. 러브호텔 이름이야 하나같이 대충 붙인다고. 결국은 남녀가 그걸 하러 오는 데니까, 침대하고 욕실만 있으면 오케이고 이름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비스름한 것 하나만 있으면 돼.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거든요, <알파빌>. 장 뤽 고다르의."
...
"가령 알파빌에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람은 체포돼서 공개 처형을 당해요."(p.71-72)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 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그러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하는 걸로써 자기 몸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슥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슥 이동하는, 그런 공유적인 상태를 낳는 거야. 아마도."(p.113)
"그런데 법원에 몇 번 드나들면서 재판을 방청하다 보니까, 재판을 받는 사건하고 그 일에 얽힌 사람들한테 이상하게 관심이 생기더라고. 아니, 그보다 점점 남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 기분이 참 묘하더라. 그렇잖아? 거기서 재판을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나랑 다른 세계에 살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나랑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하고 내가 사는 세계 사이엔 튼튼하고 높다란 벽이 있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잖아? 내가 흉악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없는걸. 난 평화주의자고, 성격은 온후하고, 어렸을 때부터 누구한테 주먹을 휘둘러본 적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구경꾼의 입장에서 재판을 볼 수 있었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그는 얼굴을 들고 마리를 본다. 그리고 표현을 골라 말한다.
"하지만 법원에 드나들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본인의 진술을 듣다 보니까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어.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거야. 두 세계를 가르는 벽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있어도 종이로 만든 얄팍한 벽일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 자신 안에 저쪽이 벌써 몰래 숨어들어와 있는데 모르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지만."(p.116-117)
"<러브 스토리> 본 적 있어? 옛날 영화." 다카하시는 묻는다.
...
다카하시는 잠시 위를 올려다보며 줄거리를 떠올린다. "해피엔드. 둘이서 오래도록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 사랑의 승리지. 옛날엔 힘들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최고다 하는 느낌으로. 번쩍번쩍 광나는 재규어를 몰고, 스쿼시를 치고, 겨울이면 가끔 눈싸움을 하고. 한편,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던 아버지는 당뇨병이랑 간경변증이랑 메니에르병으로 고생하다가 고독하게 죽어."(p.121-123)
"우리는 나서부터 줄곧 한 지붕 밑에 한 자매로 살아왔지만, 성장한 세계는 많이 달랐어. 예를 들어 먹는 음식 하나만 봐도 똑같지 않았어. 그 왜, 이것저것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그 사람은 다른 식구들이랑 다른 특별한 메뉴를 먹었거든."(p.153)
"그 애도 열아홉 살이었어." 마리는 말한다.
"그 애?"
"'알파빌'에서 모르는 남자한테 얻어맞고 옷가지도 모조리 빼앗겨서 알몸뚱이로 피 흘리던 중국인 여자애. 예쁜 애였어. 하지만 그 애가 사는 세계엔 준비 기간이 없어.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 아닌지, 그런 건 아무도 생각해주지 않아. 안 그래? ...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애랑 친구가 되고 싶었어. 아주 강하게. 우리가 다른 곳에서 다른 때 만났다면 분명히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누구한테 그런 식으로 느끼는 일, 별로 없는데, 별로라고 할지, 전혀라고 할지."(p.155-156)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p.189)
"언니가 두 달쯤 전에 '지금부터 얼마 동안 자야겠다'라고 말했어요. 저녁 먹다가 가족 앞에서 선언한 거예요.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아직 7시였지만 언니는 늘 잠이 불규칙했기 때문에 특별히 놀랄 일도 아니었거든요. 우리는 '잘 자'라고 했어요. 언니는 식사에는 손을 거의 안 대고 자기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어요. 그 이래로 계속 잠만 자요."(p.192)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 그래서 말이지, 만약 그런 연료가 나한테 없었다면, 기억의 서랍 같은 게 내 안에 없었다면, 난 이미 오래전에 반 동강 났을 거야. 어디 궁상맞은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길바닥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 소중한 거, 시시한 거, 이런저런 기억을 그때그때 서랍에서 꺼낼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도 그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젠 틀렸다. 더는 못 해먹겠다 싶어도 그럭저럭 고비를 넘길 수 있어."(p.202-203)
"대체 몇 시쯤 날이 밝는 거지?" 마리는 묻는다.
다카하시는 손목시계를 본다. "이 계절이면 그러게, 6시 40분쯤 아닐까. 밤이 제일 긴 계절이니까 말이지. 얼마 동안은 아직 어두울 거야."
"어둡다는 거, 꽤나 피곤하구나."
"원래는 다들 자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니까." 다카하시는 말한다. "인류가 어두워진 다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밖에 나오게 된 건,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아주 최근이거든. 해가 지고 나면 옛날 사람은 다들 동굴에 틀어박혀서 자기 몸을 지켜야 했어. 우리 체내 시계는 아직 해가 지면 자도록 설정돼 있는 거야."(p.220)
세상과 단절된 채 잠을 자는 언니 에리, 열아홉 살 같은 나이에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마리와 중국에서 밀입국하여 몸을 팔다 폭행당해 울고 있는 여자의 만남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며 살아온 다른 삶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저마다의 삶을 사는 사람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딴 세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 때로는 친밀함을 꿈꾸지만, 이들의 관계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작가는 어둠이 지난 후에는 분명히 밝은 해가 떠오르듯이 행복한 결말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 <러브 스토리>를 인용하면서 해피엔드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어둠이 내린 후 현대사회의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고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