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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1 - 바이러스 ㅣ 밀리언셀러 클럽 45
스즈키 코지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스즈키 고지, 김수영 역, [링① 바이러스], 황금가지, 2015.
Suzuki Koji, [RING(RINGU)], 1991.
심약하면 자주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던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공포 영화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굳이 찾아서 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미디어의 영향과 이런저런 입소문으로 귀에 익숙한 것이 있다. 이전 세대에는 영화 <엑소시스트>(1973.)와 <나이트메어>(1984.) 시리즈가 있고, 같은 세대에는 영화 <링>(나카다 히데오 감독, 1998.)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사다코'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는데, 이번에 밀리언셀러 클럽에서 새롭게 번역 출간한 스즈키 고지의 소설 [링]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1991년에 발표한 원작은 일본에서,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영화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소설과는 몇 가지 크게 다른 점이 있어서 더 흥미롭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자이고, 링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의 사진 속 얼굴은 심하게 뭉개지며, 가장 유명한 장면은 TV 브라운관을 뚫고 나오는 긴 머리의 사다코이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게 여긴 것인데)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에서 이와 같은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원작을 넘어서는 뛰어난 연출로 일본식 호러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링 바이러스가 세상에 전파되기까지 치밀한 세계관으로 탄탄한 기초와 이야기의 뼈대를 제대로 구성하고 있어서 본 작품 이외에 후속작까지 기대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우연한 기회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 한 모녀의 기구한 인생은 죽어서까지 원한으로 남아 우리에게 색다른 공포를 전달한다.
'혹시, 그거면 어쩌지?'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그 생각만 하다가 공포가 부풀어 올라서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겨우 잊었던 일주일 전의 그 사건.(p.12)
지금 바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인하고서 한시라도 빨리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어깨 언저리에 솟아오른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쭉쭉 기어 내려가서 식은땀으로 티셔츠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냥 생각이 지나쳐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몸의 변화가 지나치게 격했다.
'누군가가 말했는데, 마음보다 몸이 더 솔직하다고.'(p.13)
M신문사 주간지 기자로 일하는 아사카와 가즈유키는 여고 3학년인 아내의 조카가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퇴근길에 택시 기사로부터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대로변에서 오토바이를 몰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기자로서의 감으로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신문 데이터를 뒤져서 사건을 검색하는데, 9월 5일 오후 11시 전후에 발생한 원인불명의 돌연사는 두 건이나 더 있었다. 네 명의 젊은이가 한날한시에 모두 심장이 멈추었고, 한결같이 죽음 직전에 기이한 행동을 보이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이다. 공통의 접점... 작가는 의문의 죽음을 시작으로 기자의 시각에서 논리적으로 상황을 전개한다.
새까만 반지(半紙, 붓글씨 연습용 일본종이 - 옮긴이)에 흰 붓으로 쓴 형편없는 글씨. 그렇지만 어딘가 이렇게 보였다. '끝까지 봐.' 명령형이었다. 그것이 사라지고 잠시 후 다음 글자가 떠올랐다. '망자에게 먹힐 것이다.' 망자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먹힌다는 것은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그 두 문장 사이에는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 같다. 도중에 영상을 멈추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협박하는 셈이다.(p.83)
처음 그랬던 것처럼 글자가 떠올랐다. 첫 장면은 글씨가 너무 어설퍼서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쓴 글자 같았는데 마지막에 나온 것은 어느 정도 나았다. 차례차례 희미하게 떠오르는 흰 글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본 자는 일주일 뒤 이 시각에 죽을 운명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말하는 내용을 실행하라. 즉......'(p.89)
죽은 네 명의 남녀는 일주일 전에 미나미하코네 퍼시픽랜드의 로그캐빈 B-4에서 숙박했다. 그곳에서 의문의 비디오를 함께 보았는데, 음울하고 음산한 영상은 카메라가 아닌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깜빡임과 함께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죽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즈유키가 그곳에 가서 영상을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삭제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괴이한 화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을 본 사람은 정확히 일주일 뒤에 죽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이 나온 부분은 지워졌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내용을 알고 책을 읽어서 공포감이나 무서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모르고 책을 읽었다면, 일주일이라는 남은 시간이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그냥 흘끗거리면서 화면을 보던 것뿐인 데다, 그 애는 의미조차......"
"시끄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꿈이 무너져 버린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족 그 자체가 소멸하려 하고 있었다. 전혀,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에 의해.(p.151)
"바이러스란 건 말이지,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선을 떠도는 것이야. 애초부터 말해 보면 인간의 세포 내에 있는 유전자라는 설도 있을 정도야.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몰라. 그냥 생명의 탄생과 그 진화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해."(p.231)
"야, 아사카와. 재미있지 않냐? 세포 속의 유전자가 튀어나와서 별개의 생물이 된다는 말이. 상반하는 존재가 모두 그 근원이 동일할지도 모르는 거야. 빛과 어둠이라도,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이좋게, 모순되지도 않게 동거하고 있었어. 신과 악마도 그렇지. 간단하게 말해 타락한 신이 악마라고 불리는 것뿐이고, 원래는 같은 거야. 남자와 여자도 그렇지? 원래는 양성을 둘 다 보유하고 있고, 지렁이나 민달팽이도 여성 성기와 남성 성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지. 그거야말로 완벽한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p.231-232)
"악마란 건, 항상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존재야. 14세기 후반에 유럽 전 국토를 뒤덮었던 페스트를 알아? 전 인구의 반 가까이 죽었어. 믿어지냐? 반, 일본 인구가 6000만이나 사라지는 거랑 똑같아. 물론 당시 예술가는 페스트를 악마에 견주었어. 지금도 그렇잖아? 에이즈를 현대의 악마라고 멋대로 부르지. 그런데, 악마는 결코 인간을 사멸시키려고 하지 않아. 왜냐면...... 인간이 없으면, 그놈들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바이러스는 말이지, 바이러스도 숙주인 세포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 살 수가 없잖아. 그런데 인간은 천연두 바이러스를 사멸하게 하다니. 진짜, 그런 것이 가능할까?"(p.233)
증식 증식 증식 증식
바이러스의 본능, 그것은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것. '바이러스는 생명의 기능과 구조를 가로채서 자기 자신을 늘려 간다.'(p.306)
자신이 이 일주일 동안 한 일, 그리고 류지가 하지 않았던 일. 분명하지 않은가! 자신은 그 비디오를 빌라 로그캐빈에서 가져와서, 복사해서 류지에게 보여 주었다. 주문의 내용, 간단하지 않은가.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다. 복사해서 남에게 보여 주는 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서 증식하기를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p.307)
제한된 시간 안에 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의문의 비디오를 복사해서 고교 동창인 친구 다카야마 류지의 도움을 받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해답은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아내와 딸이 그 영상을 보았다. 점점 처절한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화면 속의 여인 사다코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지금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현대의 문물인 비디오재생기와 테이프, 인류의 생존과 진화에 크게 관여해온 바이러스... 이 둘의 기묘한 결합은 작가적 상상으로 무시무시한 링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결국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 숨은 기막힌 반전은 독자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야기의 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기묘한 여운은 오랫동안 지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