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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최선 엮음 / 북오션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최선 편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북오션, 2013.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기도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소박한 꿈이었다.
더불어 평생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래서 먼저 감동 하기를 원했고 시집을 읽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의무감이었다.
아쉽게 한동안 시를 잊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여류 시인이 국문과 강사로 있었는데,
우연히 기말고사 감독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초겨울의 싸늘한 강의실에서 우리는 직전까지 암기한 것으로 저마다의 논리를 펼치고 있었고
그녀는 그 틈에서 시를 썼다.
시인은 가까이에 있다.
문득 기리노 나쓰오의 어느 단편 소설에서 "결국은 시인, 시인은 청렴하니까. 소설을 쓰려면 악인이어야만 하지."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사물을 있는 대로 묘사하는 시인의 청렴함은 늘 왜곡하고 꾸밈으로 독자를 속이는 소설가의 음흉함과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가는 만들어질 수 있어도 시인은 타고나야 한다는...
그래서일까? 나는 시를 잘 쓰지 못한다.
성경에서 어느 책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순간의 망설임 없이 시편을 이야기한다.
150편의 시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고백이다.
고통과 탄식을 기쁨의 희열로 부르짖는다.
시를 읽기는 쉽지 않다.
1장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장 오, 그대는 궁핍하고도 풍요로워라
3장 내 가슴 저리고...... 내 슬픔 찬란하오
4장 잔혹한 시대에 자유를 외쳤고
5장 지평선 멀리 하늘 품속 나무들의 속삭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은 알렉산드르 푸슈킨을 포함해서
40여 명의 시 100편으로 삶, 조국, 사랑, 시인, 자연 등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격동의 시대를 보내며 지성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희망의 기도로, 은유와 역설로, 때로는 강렬하게 그리고 서정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p.14)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슷한 상처를 가졌기에 더 공감되는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시가 주는 위로의 선물이다.
<침묵> 표도르 튜체프
침묵할 것, 나를 드러내지 말고
내 감정과 꿈을 감추고
그들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고요히
일어나 걷도록 할 것
그들을 고이 보듬으며 - 침묵할 것
심장은 말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법
다른 사람이 어찌 너를 이해하겠는가,
네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말을 뱉어 버리면 생각은 거짓이 된다.
샘은 휘저으면 흐려지는 법
그것으로 살아가며 - 침묵할 것
너 혼자서 네 속에서만 살 수 있을 것 -
네 영혼 속에 신비롭고 환상적인 생각들이
그 둥근 온 세상이 있으니
바깥의 소음은 그것을 힘 빠지고 멍하게 할 뿐
낮의 세상의 빛은 그들을 쫓아내려 하지 -
그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고 - 침묵할 것!(p32-33)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나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일깨우는 잠언이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네> 표도르 튜체프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네
보편의 자로 잴 수도 없네
그에겐 특이한 무엇이 있으니
러시아는 오직 믿을 수 있을 뿐(p.88)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광활한 대륙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논리를 뛰어넘는 감정의 세계이다.
가을의 문턱에서 만난 러시아 명시의 향연은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
지친 마음을 보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