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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해드립니다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평점 :
로런스 블록, 이수현 역, [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2015.
Lawrence Block, [HIT MAN], 1998.
악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와 소설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까? 결국, 독자는 자조적인 판단보다 작가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것은 아닐까?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은행나무, 2010.)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의 개최를 배경으로 테러하는 범인과 이를 추적하는 경찰의 이야기인데, 마지막에서 부디 범행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쫓는 자의 절실함보다 쫓기는 자의 대의가 더 마음에 들었나 보다. 로런스 블록의 소설 [살인해드립니다]는 '히트맨'(HIT MAN)이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암살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이다. 살인청부업자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신출귀몰한 범죄의 트릭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말을 탄 사나이 켈러
켈러의 상담 치료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켈러의 카르마
빛나는 갑옷을 입은 켈러
켈러의 선택
현장의 켈러
켈러의 마지막 피난처
켈러의 은퇴
뉴욕 맨해튼에서 퀸즈버러브리지가 보이는 1번가, 침실 한 칸짜리 고급 아파트에 사는 켈러는 전화가 오면 기차를 타고 화이트 플레인스 역으로 가서 다시 차를 타고 톤턴 플레이스에 있는 빅토리아풍의 저택으로 간다. 1층에서 도트라는 여성과 차를 마시며 얘기를 하다가 버저가 울리면 위층으로 올라가 노인을 만난다. 그에게서 이름과 사는 곳이 적힌 인덱스카드와 사진을 건네받으면 곧바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렌터카를 빌린다. 경중에 따라 누가 이것을 대신 준비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인물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 일을 진행한다. 의뢰인이 누구인지? 표적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 이것을 알 필요는 없다. 나라의 절반을 날아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면 된다. 킬러 존 폴 켈러가 등장하는 10개의 단편 모음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에게 이미 직업 경력이 생겨 있더군. 그게 사람들을 없애는 일이었던 거야.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소질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관심이나 소질은 필요가 없더라고. 할 수만 있으면 돼. 처음에는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두 번째에도 누가 하라고 해서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게 하는 일이 되어 있었어. 그렇게 스스로를 규정한 후에야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기 시작했지. 총, 다른 도구, 무기 없이 발휘하는 기술. 사람들을 처리하는 방법. 알아야 할 것들을 말이야.(p.158)
켈러는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왔고 깔끔한 일 처리로 업계에서 인정받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스릴러의 공식(?)... 가령 어린 시절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부모의 복수를 꿈꾸는, 특별한 스승으로부터 고도의 살상 훈련을 받는, 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보스의 아들과 문제가 생기는, 누군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의도하지 않은 일에 휘말리는, 평소와 다르게 냉정함을 잃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다가 일을 그르치는... 등의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경찰의 추격이나 경쟁자의 압박에 시달리지도 않고, 살인하고 다니는 주인공을 미화하기 위해 도덕적 딜레마가 없는 일만 골라 처리한다는 권선징악의 영웅 놀이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이고? 어떤 재미가 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 다른 의도로 접근한다.
얼마나 더 할 작정이야.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p.19)
책 제목도, 저자 이름도 켈러에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을 끈 것은 표지에서 확 두드러져 보인 한 줄의 문구였다.
"그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내를 죽이기 위해 말을 타고 천 킬로미터를 달렸다."(p.43)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마을에 달려와서 상황을 살펴보고, 여자를 만나고, 여자와 자고, 그런 다음에 다시 달려나간다? 그런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다간 예술영화관에서도 상영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건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p.67)
몇 년 전 일 때문에 갔던 마이애미에서 만난 쿠바인은 항상 2층보다 위에 있는 호텔방을 잡지 말라고 했다.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급하게 떠나야 할 상황을 생각해보라고. 1층은 아무 문제가 없지. 2층도 문제가 없어. 3층이라면 망할 다리가 부러지겠지."(p.69)
"보통은 우리 같은 사람을 공정 관리 담당자라고 부르지요. 하지만 분쟁 조정자와 마찬가지이긴 합니다."(p.93)
켈러는 개를 키울 때 제일 좋은 점은 개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개들은 인간보다 훨씬 훌륭한 청자였다. 상대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나, 혹시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는 아닐까, 아니면 내가 털어놓는 이야기 때문에 나를 낮춰 보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개들에게는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개들에게 한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났다. 다른 누구에게 전할 리도 없고 싸우다가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낼 리도 없었다.(p.156)
"당신에게는 잘못된 일 같지 않아요. 전 그게 당신 카르마라고 생각해요."
"운명 같은 거 말인가요?"
"비슷해요. 카르마는 이번 생애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배우기 위해 할 일이에요. 알죠, 우린 여기에 한 번만 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 생애를 살죠."(p.215)
성숙해져야지.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성숙하게, 만족을 뒤로 미루자. 무엇보다도 전문가다워야 한다.(p.254)
홈쇼핑 채널 중 하나에서 어떤 여자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우리 둘 다 아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귀고리는 아무리 많아도 넘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죠."(p.220)
"'사내아이들에게는 보르도 와인, 사나이에게는 포트와인, 그러나 영웅이라면 브랜디를 마셔야지.' 새뮤얼 존슨이 한 말이라네. 조금 잘못 기억했을지도 모르지만."(p.325)
"켈러는 청부 킬러야."
"아니야, 켈러는 배신자 킬러야."
"켈러는 하나 안에 둘, 둘, 두 명의 킬러지......"(p.390)
여기에는 청부살인과 관련된 10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했을까? 켈러는 시작부터 그만두고 싶어한다. 맛있는 멕시코 식당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소도시에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다. 돈은 충분한데,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서부에 가서는 카우보이 영화를 상상한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을 하지만, 직업을 포함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다. 넬슨이라는 이름의 오스트레일리안 캐틀 도그가 생겼다. 상담의에게 하지 못한 말을 개에게는 할 수 있다. 잦은 출장으로 개를 돌보는 도우미를 구했다. 앤드리아라는 여자는 개를 산책시키고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을 한다. 일하다가 보스의 실수를 보스 모르게 처리하고, 아마추어를 상대로 확실한 전문가의 솜씨를 보여준다. 어쩌다 일이 겹치거나 중복되어 곤란한 상황인데, 신중한 결단을 내린다. 때로는 진짜 하고 싶지 않은 살인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사기꾼을 찾아 확실한 복수를 한다. 은퇴하면 취미로 우표를 모을 생각이다.
이야기는 여유롭게 흘러가다가 매우 급하게 바뀌어 냉혹한 킬러의 모습을 보여준다. 목표물을 앞에 두고 머뭇거림이나 한 치의 실수 없이 일을 완수한다. 우연인가? 나비효과인가? 를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함축적이면서 상징적이다. 매번 살인하고 여자와 잠자리를 갖지만, 하드보일드답게 한두 줄의 문장으로 넘어간다. 킬러와 개와 여자가 한집에 사는 오묘한 조합이 재미있다. 다른 스릴러와는 다르게 누구를 살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죽이느냐의 문제를 다룬다. 시한부 인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살인을 용납할 수 있을까? 켈러는 일을 할 때는 냉혹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감상적이고 순진하다. 그래서 그에게 끌린다. 미국식 언어유희는 흥미롭고...
- [HIT MAN](1998.)
- [HIT LIST](2000.)
- [HIT PARADE](2006.)
- [HIT and RUN](2008.)
- [HIT ME](2013.)
켈러는 주방장이 요리하듯이, 음악가가 악기를 연주하듯이, 소설가가 글을 쓰듯이 자신의 도구를 사용해서 자기의 일을 한다. 청부살인이 다른 전문직처럼 우아하게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빈틈없이 완벽하다.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체와 가벼움이 마음에 드는데, 마치 브루스 윌리스가 킬러로 나오는 코미디 영화 <나인 야드 1, 2>를 보는듯하다. 곳곳에서 주인공의 은퇴를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제부터 시리즈의 시작이다(정말 다행이다). 어느 순간 그의 곁을 떠난 앤드리아와 넬슨이 궁금한데, 후속작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켈러에게도 숨 막히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올까? 엘릭시르에서 시리즈를 꾸준히 번역 출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