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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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이 셀레스틴, 김은정 역, [액스맨의 재즈], 황금가지, 2015.

Ray Celestin, [THE AXEMAN'S JAZZ], 2014.

영국추리작가협회상

  다른 나라의 경우를 제외하고 국내의 미해결 사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이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의 여성을 차례로 강간, 살해한 사건으로 이미 살인 공소시효 15년이 지났고, 아직도 범인의 윤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만약에 이러한 범죄가 오늘날 다시 일어난다면, CCTV와 DNA 분석 등의 과학수사를 통해서 충분히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혈액형과 지문 감식 정도의 수사였고, 증거 보존에 관한 체계가 확립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재즈 음악을 아주 좋아해. 지옥의 모든 악마를 들어 맹세컨대 내가 말한 시간에 집에서 재즈 밴드가 한창 연주 중이면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거야. 만약 모두 재즈 연주를 하고 있다면, 음...... 그렇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 한 가지 분명한 건 화요일 밤에 재즈 연주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런 자들은 도끼 세례를 받을 거야.(p.16)

  [액스맨의 재즈]는 1918년부터 1919년 사이에 미국의 뉴올리언스에서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미해결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내용은 작가적 상상으로 재구성한 허구이나 경찰과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도끼 살인마의 편지는 신문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어서 사건이 발생한 100여 년 전의 현장감을 물씬 느낄 수 있다.

  "타로 카드도 있던가?"

  도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장에 손을 뻗고 마이클에게 묻은 카드 두 장을 건넸다. 마이클은 카드를 살펴봤다. 정의 카드와 심판 카드였다. 이전 희생자들에게서 발견한 것처럼 이 두 카드는 돈을 많이 들여 손수 그린 것으로 일반적으로 쓰는 카드보다 더 컸다. 강렬하게 빨간색과 자주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테두리는 검정색과 황금색 잉크로 둘렀다. 정의 카드에는 가운을 입은 남자가 왕좌에 앉아서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심판 카드에는 지옥같이 황폐한 풍경 위로 천사가 높이 날고 있고 벌거벗은 한 무리의 죄인들이 땅에서 천사에게 애원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보통 카드의 뒷면에는 모두 복잡한 모노크롬 무늬가 있지만, 이 카드는 아주 작은 동물들이 디자인과 얽혀 있었다. 동물들은 서로를 향해 울부짖으며 기하학 양식의 감옥에 갇힌 걸 항의하는 듯했다.(p.34-35)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거나 아니면 희생자로부터 어떤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미드 <덱스터>에서 덱스터 모건은 법의 손이 닿지 않는 사이코패스를 대상으로 살인하며 그들의 혈액 표본을 채취해서 보관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도끼 살인마는 범행에 도끼날을 사용하고 시신 위에 두 장의 타로 카드를 남겨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사건 현장은 모두 안에서 문이 잠긴 밀실 형태를 보인다. 수사는 오리무중이고,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범인은 다음 살인을 예고한다.

  뉴올리언스로 돌아가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폭력적이고 용서가 없고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의심을 놓지 않는 범죄자와 이민 사회가 넘쳐나는 곳. 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눈부시게 빛나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곳이기도 해서 차별과 악의, 지저분한 거리와 빛바랜 영광에도 불구하고 뉴올리언스라는 도시에 홀리기 쉬웠다.(p.47-48)

  루카는 이 교도소 마당에 전해 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세계 대전, 1915년 뉴올리언스 허리케인, 유행성 감기, 스토리빌 지역 폐쇄 소식을 들었다. 심지어 흑인 수감자들한테는 어떤 새로운 음악이 도시를 삼킬 만큼 유행하고 있는지 들었다. 헌법 수정 제18조가 통과돼서 금주령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는데, 이해가 충돌하는 화약고 같은 뉴올리언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못 궁금했다.(p.49)

  "뉴올리언스, 살기 좋은 대도시, 걱정을 잊은 도시, 초승달 모양의 도시, 미시시피의 파리, 가장 미국 같지 않은 도시. 이 도시에는 왜 이리 많은 이름이 붙었을까요?"

  시작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수면보다 약 2미터 낮은 습지에 세워진 도시, 강과 호수 사이에 자리한 도시, 뉴올리언스의 존재는 기적이자 인간의 집요한 본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도시가 이런 별명을 얻은 이유예요."(p.102-103)

  라일리는 뉴올리언스가 만약 사람이라면 늙어 빠진 매춘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연지를 덕지덕지 바르고 시샘 어린 미소를 지으며 애처로운 분위기와 자태로 빛바랜 프랑스 실크로 얼굴을 감싼 매춘부. 교태와 장식으로 누추함을 가린 매춘부 말이다.(p.106)

  "그것만이 아니야.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도 불법이 됐어. 헤로인도. 이제는 술도 금지하려고 해. 생각해 봐, 여자도 살 수 없고, 술도 대마초도 더 이상 살 수 없다니. 이게 미국이야?"(p.139)

  숨겨야 하는 결혼사진은 없었다. 아네트가 임신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그들은 캔자스시티에 가기로 결정했다. 법적으로 결혼을 인정받을 수 있는 도시 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그들은 길고 먼지 나는 여정에 올랐다. 끝없이 펼쳐진 중서부 평야를 서로 떨어져서 차에서도 따로 앉고, 승강장도 따로 서고, 역 한 켠에 있는 식당에서도 분리된 공간에 따로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 내내 아네트는 어지럼증과 더위에 시달렸다.(p.154-155)

  "자네가 악마를 쫓고 있다니, 그것도 여기가 제 집인 뉴올리언스 악마를 말이야."(p.174)

  하지만 여객선은 뉴욕이나 시카고, LA로 가지 않고, 중서부에 있는 주를 따라가며 대부분 백인들을 위해 연주할 예정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재즈를 악마의 음악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뉴올리언스가 차별과 편견 어린 시선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흑인들은 그곳에서 상당히 개인적으로 안전했다. 그런 점에서 루이지애나 주의 다른 지역, 더 나아가 바로 옆 미시시피 주와 비교해 보자면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p.407)

  "'오, 루이지애나, 차별 없던 남부의 낙원, 폐허가 된 지금도 그토록 아름다우니 너의 화려했던 그 시절엔 어떠했으랴?'"(p.484)

  1919년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포된 해이다. 1919년의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스는 화려함 뒤에 어둠이 공존하는 도시였는데, 곳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스페인계 혼혈인 크리올, 프랑스계 혼혈인 케이준, 아이티인,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시칠리아인, 아시아의 중국인... 등 이민자가 넘쳐나고 마피아 등의 범죄가 일어나는 곳이었다. 위험하지만, 매력적이라고 해야 할까? 전쟁의 상흔으로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신경증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있었고, 정부는 매춘과 마약을 금지하고 심지어 금주령을 계획하고 있었다. 철저한 흑백 분리 정책으로 흑인과 백인의 차별이 있었고...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이탈리아인들은 도끼 살인마를 흑인이라고 생각하고, 흑인들은 사악한 백인의 짓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다 데이비스는 핑커턴 탐정 사무소의 말단 여직원이다. 그녀는 추리소설 애호가로 탐정이 되기를 원했는데, 실제로 하는 일은 잡다한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다. 근무 시간을 피해서 남몰래 도끼 살인마의 정보를 수집한다. 마이클 탤벗 경위는 사건의 책임자이다. 그는 언론과 대중의 비난 속에서 수사를 지휘하는데, 선배 경찰을 밀고한 이유로 동료들로부터 견제를 당하고 있다. 루카 단드레아는 5년의 실형을 살고 이제 막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는 카를로 마트랑가의 집안에서 자라나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경찰이 되어 조직의 뒤를 봐주는 역할을 했었다. 연쇄살인은 경찰의 대대적인 압박 수사로 이어져 범죄 소탕의 전과를 올린다. 보스는 경찰보다 먼저 도끼 살인마를 잡아 본보기로 삼고 싶어 한다. 소설은 세 사람의 시점으로 번갈아 진행한다.

  "있잖아, 아이티에 이런 속담이 있어. 콩플로 플리 포 파세 우앙가."

  ...

  "그러니까 '음모가 주술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야."(p.178)

  도끼 살인마의 밤, 도끼 살인마가 살인을 예고한 날에 온 도시는 재즈로 뒤덮인다. 싸구려 선술집으로부터 유명한 나이트클럽에 이르기까지, 평소에는 조용한 가정집에서도 수백 수천 곡의 재즈가 흘러넘친다. 밴드는 악기란 악기는 모두 동원해서 연주하고, 밴드가 없는 곳에는 축음기와 전축이 연주한다. 마치 온 도시가 마법에 걸린 것처럼, 도끼 살인마가 보란 듯이 재즈에 열광한다.

  [액스맨의 재즈]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읽은 책이다. 요즘에 심한 감기에 시달리고 있어서 집중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었지만, 세 사람 이상이 번갈아가며 서술하는 구조는 다소 번잡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이들 하나하나의 개인사는 장황한 느낌마저 들게 했는데, 조금 더 간략하게 압축해서 사건에 초점을 맞췄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일어난 미해결 사건을 놓고 쓴 소설이라서 결론이 어떻게 날까? 상당히 궁금했는데, 완벽한 동기 부여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완성한 것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도 국내를 배경으로 이런 분위기의 작품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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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0
도진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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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외,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⑤], 황금가지, 2015.

  도진기, 이경민, 송시우, 정해연, 전건우, 신원섭, 박하익, 김주동, 조동신, 장유남이 한 권의 책으로 뭉쳤다. 다섯 번째로 출간한 한국형 추리 스릴러 단편집이다. 일본의 미스터리나 다른 나라의 스릴러와 비교해서 아직은 국내의 작품이 낯설지만, 다행인 것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가 순수문학이 아닌 것을 헐뜯는 이상한 풍토라서 그동안 접근의 기회마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반갑고, 우리에게도 이런 작품이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단편이라는 짧은 호흡으로 열 명의 작가가 내뿜는 서늘한 기운은 나름의 개성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간의 뫼비우스

  네일리스트

  잃어버린 아이에 관한 잔혹동화

  누군가

  해무

  라면 먹고 갈래요?

  죽음의 신부

  그렇게 밤은 온다

  검은 학 날아오르다

  충분히 예뻐

  10개의 단편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느 것 하나 중복되지 않고 저마다의 소재와 내용으로 자극을 주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치 <환상특급> 시리즈를 보는 것 같은 판타지가 있는가 하면, 괴이한 분위기의 컬트와 호러로 무장한 복수가 있다. 잔혹한 동화와 전통적인 추리가 있고, 단막극이 연상되는 수사 드라마가 있다. 액션 활극이 있으며,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추리 스릴러'라는 제목으로 모였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관용적으로 다양한 장르를 즐길 수 있다.

  더 놀라운 건 놀라움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는 거지요. 또 다른 나, 그러니까 3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내 몸을 움직이고 명령하고 감정을 느끼고 발산하는 주체는 30년 전의 나였습니다. 그러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말하자면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향의 의식이었습니다. 오로지 수동적으로 30년 전의 내가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또 다른 의식이 감지하고 인식하는 것 말고는요. 오로지 지금의 의식만이 외로이 공간 없는 공간에, 어디에 속한지도 모르게 내 뇌 속 어딘가에 떠 있었습니다. 예전의 나 자신이 느끼고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p.15-16)

  인간사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후회라고 말하며 다가온 중년의 남자는 같은 인생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산다고 한다. '시간의 뫼비우스'는 타고 있는 기차가 화남 터널을 지나면 30년 전의 나로 돌아가 당시의 나와는 다른 의식으로 존재하며,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남자와의 대화이다. 사연 깊은 인생만큼 푹 빠져드는 얘기가 또 있을까? 수록된 단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만약, 마지막에서 모든 게 마약 중독자의 환각이었다면, 너무 허무한 결말이 되었을까? 현직 부장판사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도진기 작가의 글은 노리즈키 린타로를 읽는 기분이었는데, 직업적인 전문성과 함께 인생의 굴레를 잘 표현하고 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해무(海霧)라는 어엿한 명사가 붙은 이유는 버스 기사의 말처럼 지독한 안개 때문이었다.

  해무 마을이 자리 잡은 산자락 너머는 바다였다. 안개는 그 바다에서 밀려왔다. 해무 마을 특유의 끈끈하고 질척한 안개는 소리 없이 진격해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안개가 마을을 지배하는 동안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숨을 멈춘다. 안개는 서슬 퍼런 계엄군이요, 가혹한 독재자다.(p.158)

  새벽에 느닷없이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25년 전에 몸을 피해 잠시 숨어들었던 해무 마을에서 만난 순자의 죽음을 알려준다. '해무'는 지독한 안개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도망쳐 나왔던 그곳으로 문상을 간다. 영화 <손님>(2015.)에 나오는 산골 마을이 연상되는데...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묘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전건우 작가는 한 마디로 묘사력에 반했는데,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반짝이는 한 줄기 빛을 보여줘라."라는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매력적이다. 짜임새 있는 구성은 물론이고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에 든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선비, 농부, 공업 종사자, 상인 순서로 실생활에는 쓸모도 없는 유학(儒學)에 빠진 사람만 높게 쳐 주고, 정작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나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네. 그들이 없으면 자신들은 살지도 못하면서 말일세! 하지만 일본에서는 도공이든 대장장이든 기술이 있는 사람이라도 일인자는 모두 조선과는 비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우대해 주네. 나도 선비 출신이지만 그런 데에는 정말 진력이 났네!"(p.324-325)

  조동신의 '검은 학 날아오르다'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다.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 비차(飛車)라는 잃어버린 비기를 등장시키는데, 실제 역사와 허구적 상상이 조화를 이루어 설득력 있는 작품을 완성했다. 사농공상으로 서열 짓는 유학의 폐해를 지적하며 오늘의 우리를 뒤돌아보게 한다.

  간혹 단편이 아닌 장편의 서론과 같은 글이 있고, 용두사미의 전개로 급하게 마무리되어 아쉬운 작품이 있다. 난해함을 오픈된 결말로 포장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개인적으로 추리 스릴러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함께 명확한 결말을 좋아해서 도진기, 전건우, 조동신 작가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형 추리 스릴러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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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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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악의, 죽은 자의 일기], 황금가지, 2015.

  선의의 가면 뒤에 숨은 악의의 얼굴은 탐욕과 추악함으로 표정 짓고 있다. 누군가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읽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을 마주하는 경계에서 드러나는 욕망, 집착, 중독... 문단의 장막 뒤에서 은유와 상징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무의식의 세계보다는 잔혹하고 자극적인 색채로 물든 현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문득 같은 제목으로 오래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떠오르고,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도 이런 작품이 있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정해연의 소설 [악의, 죽은 자의 일기]를 읽었다.

  한 마디로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자식을 향한 왜곡된 모정, 돈과 권력 앞에서의 눈먼 정의, 만족함이 없는 쾌락, 무의미한 결혼생활... 등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데,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세상으로 끄집어낸다. 썩을 대로 썩어서 곪아 터진 상처를 이렇게 대놓고 들쑤셔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직접적이다. 서글픈 자화상을 포함해 수많은 이의 한숨이 들어 있다.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는 결심할 때가 되었다.

  남편의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올까.

  추악한 욕망, 불결한 어둠, 배신, 교만, 비틀린 욕정, 밭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울컥, 쏟아낼 것이다. 나는 마침내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법은, 그를 옭아 맬 수 없다.(p.59)

  가상의 도시 영인시, 시장 선거를 앞두고 치열한 선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저녁 늦은 시간, 호화로운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추락사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신원을 확인하는데, 1702호에서 발생한 사고이다. 그런데 80평대 아파트 안에는 또 한 구의 시체가 있다. 창밖으로 떨어진 여자는 주미란, 집권당인 국민당의 영인 시장 후보 강호성의 아내이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집 안에서 교살된 다른 여자는 장옥란, 강호성의 어머니로 최근에 치매를 앓고 있었다. 사건의 정황은 말기 암 환자인 아내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하고 배란다 창밖으로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경찰은 정치적 압박과 수사의 부담으로 빠르게 종결지으려 하지만, 형사 2팀장 서동현 경감은 여기에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한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애고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지방대 출신의 정숙한 여자.

  그 조건에 주미란이 완벽하게 부합했다.

  어머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와의 결혼은 뒷배경도, 돈도 아닌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살 수 있는 정직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주었다. 결혼으로 부는 이뤄낼 수 없었지만 부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안긴 셈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시의원 출마 시에도 공천을 쉽게 받았으며, 국민적 호감을 등에 업고 당선도 되었다.(p.25)

  "그 중에 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소설가란 제 부모의 장례식에서도 소재를 찾고 줄거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사사로운 정치인의 가정사나, 아내의 서글픈 죽음도 정치에 필요하다면 이용할 수 있어야지. 설령 그것이 제 부모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말이야."(p.79-80)

  그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몇 번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다이어리에 손을 뻗었다. 대체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이어리를 열고, 한 장 한 장 읽어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비난의 조소로, 경직으로, 분노로 변해갔다. 다이어리에는 그에 대한 악의로 넘쳐났다.(p.213)

  남편과 큰 자식을 떠나보내고 어미는 남은 둘째를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다. 시장통에서 돈놀이하며 아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사채 시장의 큰손이 되어서는 아들을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앉히기를 원했다. 사사로운 문제부터 주요한 사안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불법을 마다치 않았고...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를 발판으로 차기 대권을 넘볼 수 있으니 무슨 일이든 벌여야 한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노모는 자기의 인생이 아닌 아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으로 늘 먹고살 걱정을 해야 했고, 어렵게 지방대에 들어가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멸시와 천대로 모멸감을 느낀다.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일이고 아내는 이용만 당하다가 병까지 얻었다. 이제는 복수하고 싶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는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자의적이든 아니면 타의에 의해 강압적이든, 목적은 남자의 정치적인 성공뿐이다. 사악함과 치밀함을 모두 가진 남자는 두 여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며 앞만 보고 달리지만, 어느 순간 잠재된 불안이 폭발했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악의, 죽은 자의 일기]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한 가정의 불행과 함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낱낱이 보여준다. 한국 정치의 몰상식과 파렴치함은 물론이고, 정치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야욕을 폭로한다. 수사의 진행과는 별도도 남은 다이어리는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같은 날, 두 여자의 죽음과 남겨진 다이어리라는 소재는 참 좋은데... 왜 시작부터 범인과 범행의 과정을 공개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부에서 기막힌 반전이나 귀가 솔깃한 이야깃거리를 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할까...;; 이미 알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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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6
나카마치 신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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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마치 신, 현정수 역, [천계살의], 비채, 2015.

Nakamachi Shin, [TENKEI NO SATSUI(THE APOCALYPTIC FUGUE)], 1982. 2005.

  "크리스마스에 뭐 하세요?"

  우울한 얘기가 될 수 있지만, 모 결혼정보회사의 설문 조사에서 애인이 없는 미혼 남성 10명 중의 8명은 나 홀로 집에 있을 계획이라는 결과가 있었다고 한다. 매우 정확한 통계인 것 같다. 지난 크리스마스와 주말 내내 일본 미스터리를 붙잡고 있었으니...;; 연인과 같다고 해야 하나? 나카마치 신의 소설 [천계살의]를 읽었다. [모방살의](비채, 2015.)에 이어서 또 하나의 '살의(殺意) 시리즈'라고 하는데, 이전의 작품을 토대로 한 계단 올라선 서술트릭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가능하면 순서대로 읽으시길...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서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매번 자극적인 소재와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와의 두뇌 싸움을 벌이는데, 이제는 '탐정이 곧 범인이다'라는 다소 파격적인 설정을 완성했다. 그런데 이미 드러난 공식을 가지고 다시 독자를 속일 수 있을까? 서술트릭을 쓰는 작가가 가진 선입견과 눈속임이라는 무기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했던 우려가 얼마 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차라리 맞서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마음 편하게 즐기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범인 맞추기 릴레이 소설......"

  "네. 어떤 작가가, 이 경우에는 제가 되겠군요. 제가 쓴 '문제편' 원고를 다른 작가에게 보여주고 추리하게 한 뒤에 '해결편'을 집필하도록 하는 겁니다. 즉 범인 관점으로 쓴 '문제편' 바로 다음에 상대 작가의-탐정 역이라고 불러야 할까요-'해결편'을 싣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에 범인의 눈으로 쓴 '해결편'을 다시 싣는 구성입니다. 뭐, 두 사람의 지혜 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죠."(p.11)

  추리소설 작가 야규 데루히코는 월간 <추리세계>의 편집부 하나즈미 아스코에게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 일명 '범인 맞추기 릴레이 소설'이라는, 한 작가가 문제편을 집필하면 다른 작가가 원고를 읽고 해답편을 쓰는 방식이다. 그는 먼저 '호수에 죽은 자들의 노래가......'라는 문제편을 전달하며 해답편은 탤런트 겸 소설가인 오노미치 유키코가 써주길 요청한다.

  천계(天啓)처럼 어떤 생각이 라이조의 머리를 스친 것은, 그로부터 반 시간 뒤였다.(p.54)

  잘못된 배달. 신문 홍보원의 해코지. 봉투 좌측 상단의 타버린 자국......(p.56)

  사소한 말다툼으로 집을 나간 아내는 친구의 집에 들러 온천 여행을 하고 오겠다는 편지를 쓰고 사라진다. 며칠 뒤 싸늘한 죽임으로 발견되었는데, 편지의 배달부터 아내의 행적까지 평소와는 다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가령 그녀가 초밥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고 하는...

  아스코는 예전부터 본격추리의 참맛은 밀실이라든가 알리바이 트릭의 재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의 곡예와 결말의 의외성에 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야규에게도 한 적이 있다.(p.59-60)

  아스코는, 야규의 원고가 바라는 수준은 아니지만, 릴레이 소설의 문제편으로는 적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읽은 듯한 기억? 실제로 여섯 달 전에 있었던 의문의 살인 사건을 원고지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었다. 인명과 지명... 모두 신문에 난 기사와 일치하는데, 작가는 마치 미궁에 빠진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보인다. 이대로는 잡지에 실을 수 없어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하지만, 곧이어 야규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진범이 누구인지 알았던 것일까? 하필이면 유키코를 지명해서 해답편을 써달라고 했을까? 둘은 어떤 관계인가? 아스코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찾아간다.

  당신은 추리소설의 프로이니 일부러 어려운 말을 사용하자면, '머니퓰레이트(manipulate)'라고 하던가요? 어쨌든 이 원고는 대단한 마력을 가졌습니다.(p.299)

  저는 [붉은 머리 가문의 비극](이든 필포츠의 1922년 작품)에 대한 에도가와 란포의 평을 좋아하는데, 암기할 정도로 되풀이해서 읽었습니다. 란포는 읽을 때마다 만화경처럼 양상이 변해가는 소설이다, 라며 칭찬했습니다. 조금 지나친 찬사인지도 모릅니다만, 야규 씨의 이 소설은 읽는 이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인상을 주는 참으로 신비한 작품입니다.(p.299)

  인생은 자기가 개척하는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추리소설에 관한 열정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몰입하는 작가의 인생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그에게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을까? 아니면 신이 정해 놓은 궤도였을까? 여기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작가가 정해놓은 대로 움직인다. 물이 파인 길을 따라 흘러가듯이 작가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서 차례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어떤 암시로 체면에 걸린 듯한 기분인데, 자칫 책 안의 문제편 소설과 책의 내용이 뒤섞이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책 안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착각하는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극단적인 한계에 다가서며 수없이 고치고 고쳐 쓰는 과정은 서술트릭의 진수를 보게 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번역의 과정에서 문제편과 책의 페이지를 맞추었더라면, 현실과 허구가 정확히 일치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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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나카마치 신, 최고은 역, [모방살의], 비채, 2015.

Nakamachi Shin, [MOHOU NO SATSUI(THE PLAGIARIZED FUGUE)], 1973. 2004.

  일본소설 특유의 정서와 경쾌함을 좋아하는데, 최근에 스티븐 킹과 요 네스뵈를 연달아 읽었더니 그 묵직함에 압도되어 상대적으로 더 가벼움을 느꼈나 보다. 난독증이 이렇구나! 할 정도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격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한몫했고... 그래서 비교적 짧은 분량인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선입견과 눈속임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독자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후반부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나카마치 신의 소설 [모방살의]를 읽었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이 정해준 길을 가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시절의 해방감이 그립다고 한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나이에 추리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원고를 쓰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열정은, 1972년에 초고를 발표하고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작가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서술트릭 시론'에서 서술트릭이란,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성립한 '암묵의 이해' 중 하나 또는 여럿을 깸으로써 독자를 속이는 트릭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암묵의 이해란 작가가 중요한 정보를 반드시 독자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선입견이며, 독자의 이러한 착각이 서술트릭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착각을 바탕으로 인물, 무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고의로 숨기거나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의 미스리딩을 이끈다. 또한 아비코는 이야기 전체에 걸쳐 이 '눈속임'을 유지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므로, 프롤로그 단계부터 독자에게 선입견을 심어주면 트릭을 성공시키기가 한결 쉽다고 전한다.(p.285)

  책의 내용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은 다시 작가의 손을 거쳐서 [모방살의]이후로, [천계살의](비채, 2015.), [공백살의], [삼막살의], [추억살의] 등 '살의(殺意) 시리즈'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일본에서 왜 그토록 미스터리 팬들의 끊임없는 재출간 요청이 있었는지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7월 7일

  오후 7시

  사카이 마사오는 죽었다.

  청산가리 중독사였다.

  그가 살던 집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실내에서 유서로 추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 작가의 신변 비관 자살로 처리되었다.(p.7)

  신인 추리소설 작가인 사카이 마사오가 죽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는 집 안에서 문을 잠근 밀실 상태에서였다. 그는 자기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유서처럼 '7월 7일 오후 7시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정확히 그 일시에 사망한 것이다. 경찰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 작가의 자살로 처리한다. 하지만 자살에 의문을 품은 두 사람이 있다.

  "알리바이 뒤집기라면 혐의가 짙은 인물을 반쯤 범인으로 허용한 형태로 전면에 내세워야 하지. 작가가 쓰고 싶은 건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범인이 어떻게 견고한 알리바이를 구축했으며, 그것이 탐정에 의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잖아. 뭐, 지금 말한 종래의 낡은 방식이기는 하지만."(p.52)

  "본격물을 쓰겠다는 신인들은 탐정이 곧 범인이라는 큰 주제에 한 번은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탐정이 곧 범인이라. 그런 거면 사카이가 아니라도 골치깨나 썩겠는데."(p.53)

  그냥 스쳐 지나가는 대화 같지만, 실제로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이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실행되었는지 깜짝 놀랄 것이다. 어쨌든...

  나카다 아키코는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작가의 딸로 지금은 의학전문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편집자이다. 노년의 아버지 곁에서 잠시 글을 쓴 사카이 마사오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녀는 돈 문제로 얽힌 의문의 여자를 뒤쫓는데, 사건 당일에 시계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증거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쓰쿠미 신스케는 <주간 동서>에 '살인 리포트'라는 르포 기사를 올리고 간간이 글을 쓰는 작가이다. 사카이 마사오와는 <추리원탁>이라는 추리소설 동인지 활동을 같이했다. 처음에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으나 자살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감지한다. 원한 관계인 남자를 추적하는데, 사건 당일 열차 시간을 증거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소설은 아키코와 신스케의 관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하는데, 마치 나선형 계단처럼 둘 사이를 오가며 의혹과 반론이 팽팽하게 부딪힌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각자의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공통의 접점을 이루는 순간 스파크와 함께 거대한 불똥이 튀어 오를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획기적인 결말을 가지고 올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기적이고 교활한 남자가 어째서 그렇게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크게 뒤통수를 한 방 맞았다고 해야 하나... 왜 그토록 재출간을 염원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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