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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 죽은 자의 일기 ㅣ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정해연, [악의, 죽은 자의 일기], 황금가지, 2015.
선의의 가면 뒤에 숨은 악의의 얼굴은 탐욕과 추악함으로 표정 짓고 있다. 누군가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읽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음을 마주하는 경계에서 드러나는 욕망, 집착, 중독... 문단의 장막 뒤에서 은유와 상징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무의식의 세계보다는 잔혹하고 자극적인 색채로 물든 현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문득 같은 제목으로 오래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떠오르고,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도 이런 작품이 있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정해연의 소설 [악의, 죽은 자의 일기]를 읽었다.
한 마디로 과감하다고 해야 하나? 자식을 향한 왜곡된 모정, 돈과 권력 앞에서의 눈먼 정의, 만족함이 없는 쾌락, 무의미한 결혼생활... 등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는데, 암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세상으로 끄집어낸다. 썩을 대로 썩어서 곪아 터진 상처를 이렇게 대놓고 들쑤셔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직접적이다. 서글픈 자화상을 포함해 수많은 이의 한숨이 들어 있다.
얼마 남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는 결심할 때가 되었다.
남편의 배를 가르면 뭐가 나올까.
추악한 욕망, 불결한 어둠, 배신, 교만, 비틀린 욕정, 밭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그것들을 한꺼번에 울컥, 쏟아낼 것이다. 나는 마침내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법은, 그를 옭아 맬 수 없다.(p.59)
가상의 도시 영인시, 시장 선거를 앞두고 치열한 선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저녁 늦은 시간, 호화로운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추락사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신원을 확인하는데, 1702호에서 발생한 사고이다. 그런데 80평대 아파트 안에는 또 한 구의 시체가 있다. 창밖으로 떨어진 여자는 주미란, 집권당인 국민당의 영인 시장 후보 강호성의 아내이다. 그녀는 말기 암 환자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집 안에서 교살된 다른 여자는 장옥란, 강호성의 어머니로 최근에 치매를 앓고 있었다. 사건의 정황은 말기 암 환자인 아내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하고 배란다 창밖으로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경찰은 정치적 압박과 수사의 부담으로 빠르게 종결지으려 하지만, 형사 2팀장 서동현 경감은 여기에 뭔가 있음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한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애고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지방대 출신의 정숙한 여자.
그 조건에 주미란이 완벽하게 부합했다.
어머니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와의 결혼은 뒷배경도, 돈도 아닌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살 수 있는 정직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주었다. 결혼으로 부는 이뤄낼 수 없었지만 부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안긴 셈이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시의원 출마 시에도 공천을 쉽게 받았으며, 국민적 호감을 등에 업고 당선도 되었다.(p.25)
"그 중에 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소설가란 제 부모의 장례식에서도 소재를 찾고 줄거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사사로운 정치인의 가정사나, 아내의 서글픈 죽음도 정치에 필요하다면 이용할 수 있어야지. 설령 그것이 제 부모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말이야."(p.79-80)
그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몇 번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다이어리에 손을 뻗었다. 대체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이어리를 열고, 한 장 한 장 읽어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비난의 조소로, 경직으로, 분노로 변해갔다. 다이어리에는 그에 대한 악의로 넘쳐났다.(p.213)
남편과 큰 자식을 떠나보내고 어미는 남은 둘째를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다. 시장통에서 돈놀이하며 아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사채 시장의 큰손이 되어서는 아들을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앉히기를 원했다. 사사로운 문제부터 주요한 사안에 이르기까지 아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불법을 마다치 않았고... 이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를 발판으로 차기 대권을 넘볼 수 있으니 무슨 일이든 벌여야 한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노모는 자기의 인생이 아닌 아들의 인생을 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으로 늘 먹고살 걱정을 해야 했고, 어렵게 지방대에 들어가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 멸시와 천대로 모멸감을 느낀다. 모든 것은 철저히 계산된 일이고 아내는 이용만 당하다가 병까지 얻었다. 이제는 복수하고 싶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두 여자는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자의적이든 아니면 타의에 의해 강압적이든, 목적은 남자의 정치적인 성공뿐이다. 사악함과 치밀함을 모두 가진 남자는 두 여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자행하며 앞만 보고 달리지만, 어느 순간 잠재된 불안이 폭발했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지금부터는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악의, 죽은 자의 일기]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한 가정의 불행과 함께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낱낱이 보여준다. 한국 정치의 몰상식과 파렴치함은 물론이고, 정치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야욕을 폭로한다. 수사의 진행과는 별도도 남은 다이어리는 죽은 이의 목소리를 들려주어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같은 날, 두 여자의 죽음과 남겨진 다이어리라는 소재는 참 좋은데... 왜 시작부터 범인과 범행의 과정을 공개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결론부에서 기막힌 반전이나 귀가 솔깃한 이야깃거리를 더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할까...;; 이미 알고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