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나카마치 신, 최고은 역, [모방살의], 비채, 2015.

Nakamachi Shin, [MOHOU NO SATSUI(THE PLAGIARIZED FUGUE)], 1973. 2004.

  일본소설 특유의 정서와 경쾌함을 좋아하는데, 최근에 스티븐 킹과 요 네스뵈를 연달아 읽었더니 그 묵직함에 압도되어 상대적으로 더 가벼움을 느꼈나 보다. 난독증이 이렇구나! 할 정도로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본격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이 한몫했고... 그래서 비교적 짧은 분량인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대부분이 그렇지만, 선입견과 눈속임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독자와 벌이는 치열한 두뇌 싸움은 후반부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나카마치 신의 소설 [모방살의]를 읽었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이 정해준 길을 가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던 시절의 해방감이 그립다고 한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나이에 추리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망으로 원고를 쓰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열정은, 1972년에 초고를 발표하고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작가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는 '서술트릭 시론'에서 서술트릭이란, 소설에서 작가와 독자 사이에 성립한 '암묵의 이해' 중 하나 또는 여럿을 깸으로써 독자를 속이는 트릭이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암묵의 이해란 작가가 중요한 정보를 반드시 독자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선입견이며, 독자의 이러한 착각이 서술트릭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착각을 바탕으로 인물, 무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고의로 숨기거나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의 미스리딩을 이끈다. 또한 아비코는 이야기 전체에 걸쳐 이 '눈속임'을 유지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므로, 프롤로그 단계부터 독자에게 선입견을 심어주면 트릭을 성공시키기가 한결 쉽다고 전한다.(p.285)

  책의 내용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발표한 작품은 다시 작가의 손을 거쳐서 [모방살의]이후로, [천계살의](비채, 2015.), [공백살의], [삼막살의], [추억살의] 등 '살의(殺意) 시리즈'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일본에서 왜 그토록 미스터리 팬들의 끊임없는 재출간 요청이 있었는지 서술트릭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7월 7일

  오후 7시

  사카이 마사오는 죽었다.

  청산가리 중독사였다.

  그가 살던 집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실내에서 유서로 추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 작가의 신변 비관 자살로 처리되었다.(p.7)

  신인 추리소설 작가인 사카이 마사오가 죽었다. 사인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는 집 안에서 문을 잠근 밀실 상태에서였다. 그는 자기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유서처럼 '7월 7일 오후 7시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정확히 그 일시에 사망한 것이다. 경찰은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 작가의 자살로 처리한다. 하지만 자살에 의문을 품은 두 사람이 있다.

  "알리바이 뒤집기라면 혐의가 짙은 인물을 반쯤 범인으로 허용한 형태로 전면에 내세워야 하지. 작가가 쓰고 싶은 건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범인이 어떻게 견고한 알리바이를 구축했으며, 그것이 탐정에 의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잖아. 뭐, 지금 말한 종래의 낡은 방식이기는 하지만."(p.52)

  "본격물을 쓰겠다는 신인들은 탐정이 곧 범인이라는 큰 주제에 한 번은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탐정이 곧 범인이라. 그런 거면 사카이가 아니라도 골치깨나 썩겠는데."(p.53)

  그냥 스쳐 지나가는 대화 같지만, 실제로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이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실행되었는지 깜짝 놀랄 것이다. 어쨌든...

  나카다 아키코는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작가의 딸로 지금은 의학전문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편집자이다. 노년의 아버지 곁에서 잠시 글을 쓴 사카이 마사오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녀는 돈 문제로 얽힌 의문의 여자를 뒤쫓는데, 사건 당일에 시계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증거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쓰쿠미 신스케는 <주간 동서>에 '살인 리포트'라는 르포 기사를 올리고 간간이 글을 쓰는 작가이다. 사카이 마사오와는 <추리원탁>이라는 추리소설 동인지 활동을 같이했다. 처음에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으나 자살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감지한다. 원한 관계인 남자를 추적하는데, 사건 당일 열차 시간을 증거로 알리바이를 주장한다.

  소설은 아키코와 신스케의 관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하는데, 마치 나선형 계단처럼 둘 사이를 오가며 의혹과 반론이 팽팽하게 부딪힌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각자의 길을 가던 두 사람이 공통의 접점을 이루는 순간 스파크와 함께 거대한 불똥이 튀어 오를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획기적인 결말을 가지고 올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이기적이고 교활한 남자가 어째서 그렇게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는지... 크게 뒤통수를 한 방 맞았다고 해야 하나... 왜 그토록 재출간을 염원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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