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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도쿠나가 케이, 홍은주 역,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비채, 2016.
Tokunaga Kei, [KATAGIRI-SAKATEN NO FUKUGYOU], 2012.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삶을 더 강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흔으로 과거에 얽매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극복의 문제인 거 같은데, 말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는 한 마디로 만화 같은 소설이다. 실제로 도쿠나가 케이는 소싯적에 만화가를 지망하다가 꿈을 버릴 수 없어서 소설가로 전업했다고 한다. 아무튼, 약간은 코믹한 제목과 함께 일본 특유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의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문득 미우라 시온의 소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들녘, 2007.)이 떠오르기도 하고... 가벼우면서 삶의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다.
"몇 년 전이었더라? 덜컥 회사를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왔잖아." 찻잔을 내려놓고 후사에가 목소리를 죽였다.
"갑자기요?"
"응. 그때부터 한 반년, 멀쩡히 손 놓고 지냈어. 부친이 걱정했었어. 무슨 일인지 속 시원히 말도 안 해주고."
"흐음."
"말수가 너무 적어도 곤란하다니까." 후사에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어렸다.
"그 아버지란 분은 지금은 은퇴하셨나요?"
"아니......" 후사에가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달중에 쓰러져서 그길로 돌아가셨거든. 그게 아니었음 작은 사장도 가게를 물려받지 않았을걸."(p.38-39)
"'곤란할 때 믿고 찾는 참마음 배달', 저게 우리 가게 모토라고. 원래는 아버지가 시작한 거지만, 참마음 배달이라니, 네이밍도 뭐 좀 그렇지만."
"아, 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은 손님의 의뢰는 받아들여. 아버지 때는 동네 사람들 심부름센터 비슷했던가봐. 배달하는 김에 무거운 짐도 옮겨주고 뭐 그런 거. 그런데 내가 맡게 되면서 급한 거나 말 못할 사정 있는 거 같은, 좀 유별난 의뢰가 제법 들어오게 됐어. '무엇이든' 배달해주는 업자가 있다고 소문이 났는지도 모르지."(p.44)
30대 초중반의 젊은 사장 가타기리 아키라는 늘 검은 양복에 흰 드레스 셔츠를 입고 일하는데, 무뚝뚝한 성격으로 처음부터 뭔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8년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갑작스럽게 본가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물려받는다. 과거의 상처,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가타기리 주류점은 술을 판매하는 소매상이다. 그리고 부업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달하는 택배 서비스를 함께하고 있다. 주류점만으로는 시원찮은 돈벌이를 위해 심부름센터 비슷하게 시작했는데, 대를 이어서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사업이다. '곤란할 때 믿고 찾는 참마음 배달'이라는 신조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의뢰는 무엇이든 받는다. 실제로 여기에는 콘서트를 하는 유명 아이돌 가수에게 음식물을, 손자에게 살아있는 거북이를, 정신병원에 입원한 엄마에게 아이가 만든 공작물을 배달한다.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중년의 여자는 악의를 전해줄 것을, 중년의 남자는 아내와의 이혼으로 신혼여행에서 샀던 값나가는 도자기를 도로 오키나와 바다에 버려달라고 한다. 심지어는 7년 전에 맡긴 '스무 살의 나'에게 쓴 편지를 어렵게 전달한다.
가타기리는 내처 말을 이었다. "흔한 얘기잖아요. 남한테 물어보면서 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뜻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거. 원치 않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래도 말이야' 하고 반론해서 끝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죠. '이런 거 저런 거 안 따지고'라는 건, 이를테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잖아요?"(p.65)
"기억을 잃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여직원의 목소리가 다시 귓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평평하고 어딘지 냉랭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도 그런 바람을 품은 적이 있는 걸까.
"눈앞이 백지가 된 느낌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새까매진 느낌?"
"글쎄요......" 가타기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도......"
"적어도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겠죠?"(p.116)
"바쁘게 산다...... 여기선 무리네요." 여직원의 짓궂은 웃음을 떠올렸다. "어제도 오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여긴 시간조차 비켜가는 장소인걸요."(p.118)
비 내리던 그날 밤, 주점 카운터에서 느낀 아픔이 상실감이란 것을, 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이 아직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로 인해 삼각형의 꼭짓점 하나는 영원히 상실되었고, 그는 후회와 자책의 고통 속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밤, 손가락 사이로 흘러떨어진 구슬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p.137-138)
아니, 아니다. 기억의 뚜껑은 이미 오래전부터 헐거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열렸던 것이리라. 그 의뢰인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악의'를 배달한 날. 그날부터 뚜껑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끝내 꿈이 되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리라.(p.217)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탓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몰아세워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욱더 갈 곳이 없었다.
거듭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고, 후회와 자책으로 상처를 문지르고, 짓무른 그 상처에 칼을 들이댔다. 치유해선 안 돼. 내가 나를 용서하면 그땐 진짜 살인자가 되는 거야. 친구의 유해를 밟고 서서 웃는, 피비린내 피우는 살인자가.(p.219)
"그 애가 당신을 찾아갔다는 건 당신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노신사가 부드럽게 말하며 가타기리를 건너다보았다.
가타기리가 노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후사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너는...... 정말 신뢰받을 만한 인간일까? 누구보다 널 안 믿는 건 네 자신이잖아...... 구두코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p.259-260)
"과거 청산, 이란 말이 있지?"
"응."
"그게 지난 일을 깨끗이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안은 채 계속 살아간다는 뜻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이 드네."(p.280-281)
이것도 다 내 이기심이다...... 내 자신을 위해 이 애를 몰아세우고 있을 뿐이야. 어느새 나는 몇 년 전의 나를, 세상에 절망해 있던 내 자신을 이 아이 위에 겹쳐보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약함은 그의 약함이었다.
그녀를 구하는 일은 그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녀를 절망에서 끌어내면 그도 깊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도 결국 환상이리라. 그런데도 그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고통은, 그리고 누군가의 슬픔은, 더는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p.283)
주인공은 남자이지만, 배달과 관련해서 그가 만나는 이는 대부분 여자이다. 아이돌 여가수, 병원의 여직원, 못생기고 뚱뚱한 중년 여자, 죄책감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여자... 이들은 모두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름의 상처가 있고 힘들게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여성과 관련된 심리, 성장소설로 이해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가타기리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는 바쁘게 살면서 상처를 앓는 자를 위로하고 자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단순히 남자 또는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이기심과 부족함에서 오는 실수,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 그리고 죄책감의 굴레... 결국,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주류 판매점에서 부업으로 무엇이든 배달한다는 것, 그 배달이 하필이면 별난 의뢰라는 것,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 과거의 상흔으로 자학하는 남자와 이런저런 상처가 있는 여자는 서로를 치유한다는 것, 지난 일을 깨끗이 잊기보다는 오히려 안고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단순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을 감싸 안는 이야기라서 글을 읽는 내내 위로가 되었다. 먼저 나를 신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