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8
도쿠나가 케이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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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쿠나가 케이, 홍은주 역,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 비채, 2016.

Tokunaga Kei, [KATAGIRI-SAKATEN NO FUKUGYOU], 2012.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삶을 더 강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흔으로 과거에 얽매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극복의 문제인 거 같은데, 말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가타기리 주류점의 부업일지]는 한 마디로 만화 같은 소설이다. 실제로 도쿠나가 케이는 소싯적에 만화가를 지망하다가 꿈을 버릴 수 없어서 소설가로 전업했다고 한다. 아무튼, 약간은 코믹한 제목과 함께 일본 특유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의 표지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문득 미우라 시온의 소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들녘, 2007.)이 떠오르기도 하고... 가벼우면서 삶의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다.

  "몇 년 전이었더라? 덜컥 회사를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왔잖아." 찻잔을 내려놓고 후사에가 목소리를 죽였다.

  "갑자기요?"

  "응. 그때부터 한 반년, 멀쩡히 손 놓고 지냈어. 부친이 걱정했었어. 무슨 일인지 속 시원히 말도 안 해주고."

  "흐음."

  "말수가 너무 적어도 곤란하다니까." 후사에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어렸다.

  "그 아버지란 분은 지금은 은퇴하셨나요?"

  "아니......" 후사에가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달중에 쓰러져서 그길로 돌아가셨거든. 그게 아니었음 작은 사장도 가게를 물려받지 않았을걸."(p.38-39)

  "'곤란할 때 믿고 찾는 참마음 배달', 저게 우리 가게 모토라고. 원래는 아버지가 시작한 거지만, 참마음 배달이라니, 네이밍도 뭐 좀 그렇지만."

  "아, 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은 손님의 의뢰는 받아들여. 아버지 때는 동네 사람들 심부름센터 비슷했던가봐. 배달하는 김에 무거운 짐도 옮겨주고 뭐 그런 거. 그런데 내가 맡게 되면서 급한 거나 말 못할 사정 있는 거 같은, 좀 유별난 의뢰가 제법 들어오게 됐어. '무엇이든' 배달해주는 업자가 있다고 소문이 났는지도 모르지."(p.44)

  30대 초중반의 젊은 사장 가타기리 아키라는 늘 검은 양복에 흰 드레스 셔츠를 입고 일하는데, 무뚝뚝한 성격으로 처음부터 뭔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8년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갑작스럽게 본가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물려받는다. 과거의 상처,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가타기리 주류점은 술을 판매하는 소매상이다. 그리고 부업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달하는 택배 서비스를 함께하고 있다. 주류점만으로는 시원찮은 돈벌이를 위해 심부름센터 비슷하게 시작했는데, 대를 이어서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사업이다. '곤란할 때 믿고 찾는 참마음 배달'이라는 신조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의뢰는 무엇이든 받는다. 실제로 여기에는 콘서트를 하는 유명 아이돌 가수에게 음식물을, 손자에게 살아있는 거북이를, 정신병원에 입원한 엄마에게 아이가 만든 공작물을 배달한다.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중년의 여자는 악의를 전해줄 것을, 중년의 남자는 아내와의 이혼으로 신혼여행에서 샀던 값나가는 도자기를 도로 오키나와 바다에 버려달라고 한다. 심지어는 7년 전에 맡긴 '스무 살의 나'에게 쓴 편지를 어렵게 전달한다.

  가타기리는 내처 말을 이었다. "흔한 얘기잖아요. 남한테 물어보면서 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뜻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거. 원치 않는 대답이 돌아오면 '그래도 말이야' 하고 반론해서 끝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끌어내죠. '이런 거 저런 거 안 따지고'라는 건, 이를테면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잖아요?"(p.65)

  "기억을 잃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여직원의 목소리가 다시 귓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평평하고 어딘지 냉랭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도 그런 바람을 품은 적이 있는 걸까.

  "눈앞이 백지가 된 느낌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새까매진 느낌?"

  "글쎄요......" 가타기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도......"

  "적어도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겠죠?"(p.116)

  "바쁘게 산다...... 여기선 무리네요." 여직원의 짓궂은 웃음을 떠올렸다. "어제도 오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요. 여긴 시간조차 비켜가는 장소인걸요."(p.118)

  비 내리던 그날 밤, 주점 카운터에서 느낀 아픔이 상실감이란 것을, 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이 아직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로 인해 삼각형의 꼭짓점 하나는 영원히 상실되었고, 그는 후회와 자책의 고통 속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밤, 손가락 사이로 흘러떨어진 구슬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p.137-138)

  아니, 아니다. 기억의 뚜껑은 이미 오래전부터 헐거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의뢰를 계기로 열렸던 것이리라. 그 의뢰인을 대신해 누군가에게 '악의'를 배달한 날. 그날부터 뚜껑은 밀려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끝내 꿈이 되어 밖으로 흘러넘친 것이리라.(p.217)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스스로 탓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몰아세워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욱더 갈 곳이 없었다.

  거듭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고, 후회와 자책으로 상처를 문지르고, 짓무른 그 상처에 칼을 들이댔다. 치유해선 안 돼. 내가 나를 용서하면 그땐 진짜 살인자가 되는 거야. 친구의 유해를 밟고 서서 웃는, 피비린내 피우는 살인자가.(p.219)

  "그 애가 당신을 찾아갔다는 건 당신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노신사가 부드럽게 말하며 가타기리를 건너다보았다.

  가타기리가 노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후사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너는...... 정말 신뢰받을 만한 인간일까? 누구보다 널 안 믿는 건 네 자신이잖아...... 구두코에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p.259-260)

  "과거 청산, 이란 말이 있지?"

  "응."

  "그게 지난 일을 깨끗이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를 안은 채 계속 살아간다는 뜻 아닌가...... 요즘 그런 생각이 드네."(p.280-281)

  이것도 다 내 이기심이다...... 내 자신을 위해 이 애를 몰아세우고 있을 뿐이야. 어느새 나는 몇 년 전의 나를, 세상에 절망해 있던 내 자신을 이 아이 위에 겹쳐보고 있었던 거야.

  그녀의 약함은 그의 약함이었다.

  그녀를 구하는 일은 그를 구하는 일이었다.

  그녀를 절망에서 끌어내면 그도 깊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도 결국 환상이리라. 그런데도 그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고통은, 그리고 누군가의 슬픔은, 더는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다.(p.283)

  주인공은 남자이지만, 배달과 관련해서 그가 만나는 이는 대부분 여자이다. 아이돌 여가수, 병원의 여직원, 못생기고 뚱뚱한 중년 여자, 죄책감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여자... 이들은 모두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름의 상처가 있고 힘들게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여성과 관련된 심리, 성장소설로 이해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가타기리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는 바쁘게 살면서 상처를 앓는 자를 위로하고 자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단순히 남자 또는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이기심과 부족함에서 오는 실수,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 그리고 죄책감의 굴레... 결국,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주류 판매점에서 부업으로 무엇이든 배달한다는 것, 그 배달이 하필이면 별난 의뢰라는 것,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 과거의 상흔으로 자학하는 남자와 이런저런 상처가 있는 여자는 서로를 치유한다는 것, 지난 일을 깨끗이 잊기보다는 오히려 안고 살아간다는 것... 어쩌면 단순하게 느껴지지만, 마음을 감싸 안는 이야기라서 글을 읽는 내내 위로가 되었다. 먼저 나를 신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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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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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로저스, 이진 역, [제시 램의 선택], 비채, 2016.

Jane Rogers, [THE TESTAMENT OF JESSIE LAMB], 2011.

아서클라크상

  지구의 멸망에 관해서는 환경파괴, 핵전쟁, 화산 폭발, 운석 충돌, 외계인의 침입... 등 다양한 가상의 시나리오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 중의 하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인데, 가까운 미래에 희소 질병으로 여성이 더는 출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인류의 생존이 길어야 70여 년 정도를 남겨두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영국인 작가 제인 로저스의 소설 [제시 램의 선택]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정확히 기록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도록,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한 치의 의문도 남지 않도록, 더없이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다.

  이것은 제시 램의 고백이다.(p.9)

  성경의 구약을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이 책의 원제는 [THE TESTAMENT OF JESSIE LAMB]이다.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을 연상하게 하는 제목인데, 주인공 제시 램(Jessie Lamb)의 이름은 예수(Jesus)와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하고 비슷한 어감이고... 인류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을 하는 열여섯 살 소녀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마 우린 아기를 못 낳을 거야." 샐이 말했다.

  "지금 살아 있는 가장 어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 오랫동안 뉴스에 나온 이야기였지만 처음으로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쯤, 세상엔 아이들이 없을 거야."

  "학교 문도 닫겠지."

  "아이들한테 필요한 물건도 만들지 않을 테고."

  "기저귀, 아기 옷, 유모차......"

  "진짜 이상하겠다."

  "그리고 죄다 노인뿐이겠지. 아무도 일하러 가지 않겠네."

  "가게도 없고 청소부도 없고 버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겠지. 모든 게 서서히 정지될 거야."(p.14-15)

  어느 화요일, 아빠가 내게 모체사망증후군(MDS, Maternal Death Syndrome)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뉴스에 따르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이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존 밀림의 부족이나 북극지방의 이누이트 족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MDS는 서방국가나 선진국, 혹은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임신하고도 살아 있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MDS가 돌기 이전에 임신한 것이었다. 그들이 출산하고 나면 다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p.18-19)

  십 대 시절,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과 산적한 문제 때문에 이것을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임신과 출산은 내 일이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성장기 소녀에게 있어서 종말은 별다른 의미보다는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의 멸망과는 별개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은 다른 고민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다가온다.

  나이 든 사람, 우리 부모, 정치인, 사업가들이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망가뜨려서 화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겐 권력이 필요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재앙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니까. MDS가 가장 끔찍한 재앙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 다른 문제도 많았다. 전쟁, 홍수, 기아. 사람들은 그저 쾌락을 채우는 데 급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중단해야 했다. "이제 어른들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말할 자격이 없어." 제이컵이 말했다.(p.32-33)

  "난 연구소 문을 닫게 하는 데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

  "MDS가 거기서 나왔으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복잡하고 끔찍한 연구를 계속하는 과학자들한테서."

  "하지만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학자도 있잖아."

  "그런 사람도 있지. 하지만 미생물이나 아원자 입자, 아니면 돌연변이 같은 걸 연구하는 사람이 더 많아. 겨우 조금 더 알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걸 통제하기 위해서."(p.46-47)

  전단지에는 하느님이 자연재해를 통해 인간에게 경고해왔지만 무지한 인간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이 옛날처럼 흉흉해지자 하느님이 홍수를 일으켜 노아의 방주만 살아남게 했다고. 이제 우리 인간이 악의 손길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 거라고.(p.59)

  수천 년에 걸쳐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해온 것을 감안할 때 MDS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했다. 남성은 여성의 성행위를 혐오하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여성의 소유권을 시기한다. 그것이 바로 남성이 처녀와 결혼해서 여성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싶어 하는 이유다. 남성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코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었다. 남성만 상속이 가능했고 아무도 딸을 원하지 않았다. 수백만의 여아가 살해되고 낙태되었다.(p.89)

  언젠가부터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남자를 두려워하는 여자도 있었다. 모두 임플라논을 시술받았지만 여전히 섹스를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주위에 죽은 여자가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섹스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p.91)

  모체사망증후군(MDS)은 여자가 임신하면 면역체계에 변화를 일으켜 감염이 시작된다. 바이러스가 몸속으로 퍼지면 광우병(CJD)을 일으키는데, 한 마디로 AIDS와 CJD를 결합한 질병이다. 여기에는 그 원인을 테러리스트의 생화학 무기 때문인지, 어떤 특정 과학자가 우연으로 만든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는데, 절대로 우연이 아님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을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데... 가령 십 대들은 몇몇 정치가와 기업인에 의해서 세상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어른들의 욕망으로 세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동물보호단체는 과학자들의 무분별한 동물 실험을 비난하고, 과학을 통해서 불필요한 살육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한다.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스른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성 단체에서는 지난 수천 년에 걸쳐서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한 결과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성 소수자의 모임이 늘어가고 성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의 틈에서 제시 램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자기 운명이라고 믿으면서 죽은 거지. 대리모를 자청하는 여자애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닌가?

  "예수님처럼." 내가 말했다.

  "맞다. 제서룬, 바로 그거야. 인간의 희생은 예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어. 한 나라의 왕이 곤경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는 거였으니까."(p.115-116)

  "미래가 없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의 삶은 살아야 할 가치를 잃게 될 거야."(p.190)

  살면서 임신, 출산, 죽음, 종말... 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다른 쪽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해 보았는데,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사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고결한 정신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그 이후에 관해서도... 뭔가 뚜렷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이 성장한 기분이다. 인류의 밝은 미래에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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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3 - 야!야!야!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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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마키(ms-work), 장선정 역, [콩고양이③ 야! 야! 야!], 비채, 2016.

Nekomaki(ms-work), [MAMENEKO VOL.3_KORA! KORA! KORA!], 2014.

  어떤 사람이 귀농해서 사는데, 마당에 뱀이 자주 출몰해서 골치를 썩이다가 이것을 이웃에게 말하니 고양이를 키워보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장 고양이 한 마리를 사다가 키웠는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이 녀석이 뱀을 잡아서 가지고 놀고 있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이후에 마당에서 뱀을 보지 못했다는... 주말에 시골집에 내려가 마당에 숯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면, 어디선가 냄새를 맡고 찾아온 고양이 한 마리가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쫓아 버렸을 텐데, 앞의 얘기를 들었기에 따로 고기를 챙겨서 극진히(?) 대접한다. 혹시 모를 쥐라도 잡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녀석이 알아들은 것일까? 어쨌든 시골집 마당에서는 뱀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본 적이 없다. 고양이는 참 신비로운 동물이다.

  지금은 통용되는 공식이 아니고 분명한 예외가 있지만, 한때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편보다 나은 속편은 거의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작가나 제작자는 열정과 에너지를 본편에 쏟아부어서인지 속편은 그냥 그저 그런 아류작에 지나지 않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만화의 경우는 조금 달랐는데,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그림의 숙련도와 내용의 확장성이 발전한다고 해야 하나... 최소한 그림만큼은 갈수록 더 좋아진다. 여기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데, 캐릭터와 이야기의 진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편 - 2편 - 3편의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림의 숙련도와 내용의 확장성은 3편 - 2편 - 1편의 순이다.

 

 

 

 

 

  [콩고양이③ 야! 야! 야!]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사고뭉치 고양이 팥알이와 콩알이를 향한 감정이 다분히 포함된 어감인데, 역시나 이들의 활동은 전작을 넘어서고 있고, 심지어 마담 북슬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짹짹이라는 참새와 구구라는 비둘기 가족이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팥알이와 콩알이의 호기심과 함께 우왕좌왕 좌충우돌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늘 먹을 것을 탐하는 두 녀석은 전작과 비교해서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모습이다. 내복씨는 여전히 녀석들을 귀여워하고 가장 많은 교감을 나눈다. 마담 북슬은 이들을 내놓을 계획을 세우고, 오덕후 기질의 안경남은 참새 짹짹이를 보살피는 데에 전문적인 지식을 발휘한다. 투명인간 집동자귀신 아저씨는 존재감 없이 아내 마담 북슬의 눈을 피해 숨어 있고...

  볼수록 사박사박 연필로 그림 그림은 뚜렷한 개성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데, 은은한 정감을 느끼게 하고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집 안에서만 지내던 녀석들이 이제는 마당을 누비고 다니고 새로운 동물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는데, 앞으로의 시리즈에서는 또 어떤 활약을 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일본 특유의 정서와 서정성은 언제 보아도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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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1 - 팥알이와 콩알이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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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마키(ms-work), 장선정 역, [콩고양이① 팥알이와 콩알이], 비채, 2014.

Nekomaki(ms-work), [MAMENEKO_AZUKI TO DAIZU], 2013.

  비염과 지독한 감기를 일주일째 달고 있어서 약 기운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다. 이런 때 주인의 상태를 알아보는 반려동물이 있으면 고통이 조금 덜할까나...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내 한 몸을 추스르기도 어려운데 무슨 반려동물이냐는 비난이 있을지 모르겠다. 상당히 아프고 외롭다...ㅜㅜ 새해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의무감으로 책을 펼쳤는데, 가볍게 읽기에는 제격이다. 크게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고 눈이 가는 대로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있어서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맞춤형 독서가 되었다. '콩고양이 시리즈'의 첫 번째인 [팥알이와 콩알이]이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면, 2편을 먼저 읽어서 상대적으로 그림이나 내용의 부실함이 느껴졌는데... 그래도 나름 일본 특유의 정서를 잘 유지하면서 두 마리 고양이에 관한 알콩달콩 25개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2편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어떻게 한가족이 되었느냐였다. 여기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마음에 드는 녀석을 골라 보라는 지인의 권유로 주인은 두 마리를 입양한다. 삼색 털 암컷 고양이는 팥알이로, 검은색 수컷 고양이는 콩알이로 이름 짓는다. 그리고 여전히, 아니 처음부터 그들이 보는 세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등장하는 인물이 왜 하나같이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령 할아버지는 옷을 입은 건지 안 입은 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복장이라서 내복씨라고 하고, 마담 북슬은 북슬북슬한 파마머리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집안에서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으로 여겨지는 아버지는 집동자귀신 아저씨가 된다. 이들은 모두 한 지붕 아래에서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직접 고양이들 데려오고 아주 좋아하는 여주인이 있지만, 실제로 고양이와 많은 교감을 나누는 이는 여주인의 할아버지 내복씨이다. 마담 북슬은 틈만 나면 사고뭉치 녀석들을 내보내려고 하지만, 때때로 내복씨는 고양이의 범행을 자신이 기꺼이 뒤집어쓴다. 이것을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내복씨를 이용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두 녀석은 밤만 되면 내복씨의 잠자리 곁에서 뛰어놀고 이불 속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 잠을 잔다. 이런 녀석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와 어린 고양이의 얽힌 운명은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상자에 들어가기를 좋아하고 뭔지 모를 이유로 뛰어다니다가 집 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지만,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이기 때문에 모든 게 용납된다. 정작 당사자는 심각한 피해를 보고 정신을 못 차리지만, 고양이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고양이의 귀여움과 매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본에서 삼색 털 고양이는 행운을 가져온다고 하는데, 팥알이와 콩알이를 통해서 액운은 사라지고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사박사박 연필로 그린 그림은 딱히 잘 그렸다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은근히 정감이 간다. 고양이를 키우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나도 둘 중의 하나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아, 어지럽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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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양이 2 - 밥 먹어야지
네코마키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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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마키(ms-work), 장선정 역, [콩고양이② 밥 먹어야지~], 비채, 2016.

Nekomaki(ms-work), [MAMENEKO VOL.2_GOHANDAYO], 2013.

  어렸을 때 개를 키운 적은 있어도 고양이를 가까이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고양이에 관한 혐오증이 있었는데, 쥐를 잡아먹는다는 것과 벽을 타고 넘나드는 도둑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더 멀리했던 것 같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키우는 고양이를 보면서도 예쁘고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징그럽고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에게 고양이는 그저 그런 동물이었다.

  생각이 바뀐 것은... 세월이 흐르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고양이 사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기묘한 표정으로 까다로움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갖춘... 아, 나도 언젠가는 고양이로부터 간택을 받은 집사가 될 수 있을까? 털 관리와 배변 문제만 잘 해결된다면, 당장에라도 동거를 시작하고 싶다.

  [콩고양이​① 팥알이와 콩알이], 비채, 2014.

  [콩고양이​② 밥 먹어야지~], 비채, 2016.

  [콩고양이​③ 야! 야! 야!], 비채, 2016.

  자고로 시리즈는 한 방에 몰아서 읽어야 제맛(?)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아쉽게 1편을 건너뛰고 2편을 먼저 읽었는데, 그 재미로 인하여 조만간 1편과 3편을 섭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일본만큼 고양이가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저자는 아이치 현 나고야 시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부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한다. 여기에는 순수 창작으로 25개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삼색 털 암컷 고양이는 팥알, 검은색 수컷 고양이는 콩알, 고양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여주인, 왕년의 미남으로 고양이 주인의 할아버지 내복씨, 틈만 나면 고양이를 내보내려고 하는 엄마 마담 북슬, 집에서는 존재감 없는 아빠 집동자귀신 아저씨, 고양이 주인의 오빠 안경남, 그리고 암탉 마당이... 두 마리의 고양이가 어떻게 한가족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팥알이와 콩알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다. 그런데도 좌충우돌 사연은 잠시 세상의 번잡함을 잊고 순수한 미소를 짓게 한다.

  첫 경험은 사람이나 동물에게 어색하기는 매한가지 인가보다. 처음으로 겨울을 맞이하는 녀석들은 감기에 걸리고,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을 찾으며, 눈 위에서 깜짝 놀라기도 한다. 심지어 쥐를 보고 살며시 뒤로 물러나는 일까지 있었으니... 세상의 모든 엄마는 왜 고양이를 싫어할까? 내복씨의 잠자리에서 함께 뒹굴며, 그가 만들어준 봉재 인형에 집착하는 모습은 매우 유쾌하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때 써야 할듯한데, 사박사박 연필로 그린 그림은 단조로우면서도 멋스러운 일본 특유의 감성을 잘 살리고 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날로그의 분위기는 미묘만큼이나 묘한 매력이 있다. 아줌마 파마머리와 두꺼운 입술의 마담 북슬을 피해서 이리저리 뛰노는 팥알이와 콩알이의 겨울... 이들은 무사히 계절을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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