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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램의 선택
제인 로저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제인 로저스, 이진 역, [제시 램의 선택], 비채, 2016.
Jane Rogers, [THE TESTAMENT OF JESSIE LAMB], 2011.
아서클라크상
지구의 멸망에 관해서는 환경파괴, 핵전쟁, 화산 폭발, 운석 충돌, 외계인의 침입... 등 다양한 가상의 시나리오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 중의 하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인데, 가까운 미래에 희소 질병으로 여성이 더는 출산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인류의 생존이 길어야 70여 년 정도를 남겨두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영국인 작가 제인 로저스의 소설 [제시 램의 선택]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말하고 있는데, 과연 희망이 남아 있을까?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정확히 기록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도록,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한 치의 의문도 남지 않도록, 더없이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다.
이것은 제시 램의 고백이다.(p.9)
성경의 구약을 [OLD TESTAMENT]라고 하고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하는데, 이 책의 원제는 [THE TESTAMENT OF JESSIE LAMB]이다.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을 연상하게 하는 제목인데, 주인공 제시 램(Jessie Lamb)의 이름은 예수(Jesus)와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하고 비슷한 어감이고... 인류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을 하는 열여섯 살 소녀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마 우린 아기를 못 낳을 거야." 샐이 말했다.
"지금 살아 있는 가장 어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 사람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되겠지." 오랫동안 뉴스에 나온 이야기였지만 처음으로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나이 들었을 때쯤, 세상엔 아이들이 없을 거야."
"학교 문도 닫겠지."
"아이들한테 필요한 물건도 만들지 않을 테고."
"기저귀, 아기 옷, 유모차......"
"진짜 이상하겠다."
"그리고 죄다 노인뿐이겠지. 아무도 일하러 가지 않겠네."
"가게도 없고 청소부도 없고 버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겠지. 모든 게 서서히 정지될 거야."(p.14-15)
어느 화요일, 아빠가 내게 모체사망증후군(MDS, Maternal Death Syndrome)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뉴스에 따르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이 증후군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존 밀림의 부족이나 북극지방의 이누이트 족이 감염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MDS는 서방국가나 선진국, 혹은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임신하고도 살아 있는 여자들이 있긴 하지만, MDS가 돌기 이전에 임신한 것이었다. 그들이 출산하고 나면 다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p.18-19)
십 대 시절,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당장 눈앞에 있는 고민과 산적한 문제 때문에 이것을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구나 임신과 출산은 내 일이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성장기 소녀에게 있어서 종말은 별다른 의미보다는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의 멸망과는 별개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은 다른 고민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문제로 다가온다.
나이 든 사람, 우리 부모, 정치인, 사업가들이 이 세상을 엉망으로 망가뜨려서 화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겐 권력이 필요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재앙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니까. MDS가 가장 끔찍한 재앙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 다른 문제도 많았다. 전쟁, 홍수, 기아. 사람들은 그저 쾌락을 채우는 데 급급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중단해야 했다. "이제 어른들은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말할 자격이 없어." 제이컵이 말했다.(p.32-33)
"난 연구소 문을 닫게 하는 데 힘을 결집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
"MDS가 거기서 나왔으니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복잡하고 끔찍한 연구를 계속하는 과학자들한테서."
"하지만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학자도 있잖아."
"그런 사람도 있지. 하지만 미생물이나 아원자 입자, 아니면 돌연변이 같은 걸 연구하는 사람이 더 많아. 겨우 조금 더 알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걸 통제하기 위해서."(p.46-47)
전단지에는 하느님이 자연재해를 통해 인간에게 경고해왔지만 무지한 인간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다. 세상이 옛날처럼 흉흉해지자 하느님이 홍수를 일으켜 노아의 방주만 살아남게 했다고. 이제 우리 인간이 악의 손길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할 거라고.(p.59)
수천 년에 걸쳐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해온 것을 감안할 때 MDS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했다. 남성은 여성의 성행위를 혐오하고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 대한 여성의 소유권을 시기한다. 그것이 바로 남성이 처녀와 결혼해서 여성을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싶어 하는 이유다. 남성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코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었다. 남성만 상속이 가능했고 아무도 딸을 원하지 않았다. 수백만의 여아가 살해되고 낙태되었다.(p.89)
언젠가부터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남자를 두려워하는 여자도 있었다. 모두 임플라논을 시술받았지만 여전히 섹스를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주위에 죽은 여자가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섹스가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p.91)
모체사망증후군(MDS)은 여자가 임신하면 면역체계에 변화를 일으켜 감염이 시작된다. 바이러스가 몸속으로 퍼지면 광우병(CJD)을 일으키는데, 한 마디로 AIDS와 CJD를 결합한 질병이다. 여기에는 그 원인을 테러리스트의 생화학 무기 때문인지, 어떤 특정 과학자가 우연으로 만든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는데, 절대로 우연이 아님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질병을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는데... 가령 십 대들은 몇몇 정치가와 기업인에 의해서 세상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중대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어른들의 욕망으로 세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비판한다. 동물보호단체는 과학자들의 무분별한 동물 실험을 비난하고, 과학을 통해서 불필요한 살육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한다.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인간이 신의 뜻을 거스른 결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여성 단체에서는 지난 수천 년에 걸쳐서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한 결과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성 소수자의 모임이 늘어가고 성 정체성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혼란의 틈에서 제시 램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게 자기 운명이라고 믿으면서 죽은 거지. 대리모를 자청하는 여자애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닌가?
"예수님처럼." 내가 말했다.
"맞다. 제서룬, 바로 그거야. 인간의 희생은 예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어. 한 나라의 왕이 곤경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는 거였으니까."(p.115-116)
"미래가 없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의 삶은 살아야 할 가치를 잃게 될 거야."(p.190)
살면서 임신, 출산, 죽음, 종말... 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다른 쪽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해 보았는데, 인류의 미래에 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사고하는 기회가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고결한 정신과 죽음의 의미 그리고 그 이후에 관해서도... 뭔가 뚜렷한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이 성장한 기분이다. 인류의 밝은 미래에 희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