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와후와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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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권남희 역, [후와후와], 비채, 2016.

Murakami Haruki, Anzai Mizumaru, [FUWA FUWA], 1998.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소설은 물론이고, 수필집, 여행기, 스크랩북, 심지어 기묘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 기담집을 읽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와후와]라는 제목의 동화집이다. '후와후와'는 일본어로 구름이 가볍게 둥실 떠 있는 모습이라든지, 소파가 푹신하게 부풀어 있는 모습이라든지, 커튼이 살랑이는 모습이라든지, 고양이 털처럼 보드랍고 가벼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유명 소설가가 쓴 동화는 어떤 재미가 있을까? 예쁜 책이 마음에 든다.

  나는 온 세상 고양이를 다 좋아하지만,

  지상에 사는 모든 종류의 고양이 중에서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

  책의 출간 배경은, 1998년 직물회사 NUNO는 문화 사업의 목적으로 반짝반짝(키라키라), 와글와글(자와자와), 폭신폭신(후와후와)... 등 직물을 표현하는 의성어와 의태어를 주제로 여섯 권의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유명 작가와 사진가의 공동작업으로 진행되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선택한 단어는 '후와후와'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에 관한 추억을 짤막하게 적고 있는데, 정말 후와후와한 기분이다.

  이미 이전에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수필집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비채, 2013.),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비채, 2012.),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비채, 2013.)에서 오하시 아유미의 동판화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던 작품을 보아서 그림이 들어간 동화는 매우 편안하게 다가온다. 참고로 안자이 미즈마루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빵가게 재습격],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등 하루키의 소설 곳곳에서 맹활약하는 '와타나베 노보루'가 그의 본명이라고 한다. 두 작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나는 그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털에

  손을 뻗어, 통통한 목덜미며

  골이 동그래진 차가운 귀 옆을, 가만가만

  같은 리듬으로 쓰다듬어주다가

  가르릉거리는 고양이 소리 듣는 걸 좋아한다.

  일본만큼 고양이가 잘 어울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늙고 폭신폭신한 털을 가진 암고양이 단쓰, 어느 오후에 햇살이 쏟아지는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며 함께 뒹구는 소년은 마치 고양이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고양이의 털, 고양이의 숨결, 고양이의 시간... 평화로운 일상인데, 나는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느껴지는 걸까? '단쓰'는 원래 털이 촘촘하고 아주 폭신폭신하면서 무늬가 복잡하고 아름다운 중국의 고급 양탄자이다. 고양이답지 않은 이상한 이름이다.

  그리고 제법 많은 것을 고양이에게 배웠다.

  생명체에게 한결같이 소중한 것을. 이를테면

  행복이란 따스하고 보드라우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든가.

  생명의 소중함과 행복의 의미는 교훈적이다. 형제가 없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고양이와 함께 놀고, 고양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추억은 자전적인 글과 그림으로 되살아난다. 나도 고양이 한 마리를 분양받아 같이 살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길을 가다가 우연이라도 집사로 간택 받고 싶은 마음인데, 이왕이면 세월의 흐름을 고려해서 어린 고양이였으면 한다. 그러면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가 될 때까지 사랑할 텐데...

  나는 손가락 끝으로 복잡한 무늬를 더듬으며

  갓 만들어진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생명의 들판을

  가로질러 갔다.

  폭신폭신하고 보드라운 감촉은 아주 오랜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고, 서로를 탐미하는 연인의 모습 같기도 하다. 동화라고 하지만, 내게는 문장 하나하나가 시처럼 느껴진다. 짧아서 아쉬운 그림 동화 [후와후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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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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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바르가스, 양영란 역, [트라이던트], 비채, 2016.

Fred Vargas, [SOUS LES VENTS DE NEPTUNE], 2004.

CWA 인터내셔널 대거상

  아직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프랑스에서는 추리 소설의 여제로 불리는 작가 프레드 바르가스의 소설 [트라이던트]를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읽은 프랑스 소설이고, 일본 미스터리나 영미 스릴러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확실한 매력을 보여준다. 트라이던트는 말 그대로 긴 손잡이 끝에 세 개의 날이 붙어있는 삼지창을 의미하는데, 고대 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무기로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넵튠)이 사용한 세발작살이다. 전국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 사건 중에는 몇 가지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것이 있는데, 뾰족하고 날카로운 흉기로 연달아 세 번 찔린 희생자가 발견된다. 현장에서 만취 상태로 범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용의자가 체포되고... 세월의 흐름과 장소의 변화로 누구도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알아채지 못하지만, 특유의 직관으로 유사성을 찾아 연쇄살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십수 년에 걸쳐 홀로 수사하는 형사가 있다.

  그렇지만 진술을 반드시 확인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담스베르그의 그 애매한 직관이 대부분의 경우 대단히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신통력이 있기에 논리를 뛰어넘어 그렇게 정확하게 들어맞힐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아담스베르그는 승진을 거듭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 파리 13구 강력계 책임자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엉뚱하고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한 아담스베르그 서장 자신은 이 신통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라는 말 대신 그저 인간, 인생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p.12)

  장 바티스트 아담스베르그 서장은 파리 13구 강력계의 책임자이다. 엉뚱하고 다분히 몽상가적인 기질을 보이지만, 남다른 직관으로 매번 사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스릴러는 강력반 반장을 주인공으로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직접 현장을 누비며 범인을 추적하는 데 반해 여기에서는 서장이라는 직책으로 전혀 다른 상황을 연출한다. 파트너보다는 보좌관과 부하 직원이 있고, 업무 협조와 함께 대외적인 활동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독자는 사건 해결의 과정을 좀 더 큰 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야간에 산책하며 오랫동안 걷는 것을 좋아하고, 평소의 차분함과는 다르게 불의 앞에서는 강한 카리스마를 드러내며 상대를 압도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여느 스릴러와 마찬가지로 여자관계에서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는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지 못하는 어리숙함을 드러낸다. 형사 아담스베르그가 등장하는 시리즈 중에서 여섯 번째 작품이다.

  술기운에 근육이 굳어지자 아담스베르그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애썼다. 바다의 신 넵튠이라는 존재로 인하여 자신의 깊은 심연에서 떠올라 온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침입자, 무시무시한 그 괴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절대로 쳐부술 수 없는 도도한 그 살인자를 그는 '세발작살'이라고 명명했다. 삼십 년 전,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 난공불락의 살인자. 십사 년 동안 그가 죽어라고 추격했으며 다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번번이 놓쳐버린 민첩한 살인자. 그는 달렸고 달리다가 넘어졌으며, 넘어지면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p.35)

  몸의 두려움과 통증은 바다의 신 넵튠의 등장을 미리 직감한 것일까? 캐나다 퀘벡으로 DNA 연수를 앞두고 아담스베르그는 어린 소녀가 칼로 세 번 찔린 채 살해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다. 30년 전의 사건... 처음 경찰이 되었을 때, 두 살 터울의 동생은 세발작살 살인마에 의해 살인 용의자로 누명을 쓴다. 그 후로도 계속된 살인... 그는 동생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십사 년 동안 살인마의 뒤를 쫓았지만, 법의 울타리와 권력의 그늘에서 매번 한계에 부딪힌다. 그는 십육 년 전에 사건에서 손을 떼었는데, 이유는 살인마의 사망 때문이다. 이미 무덤에 묻혀 저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같은 방식의 살인 사건이라니... 죽은 살인마의 귀환인가?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주인공의 동생을 의심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모방 범죄를 예상하기도 하고, 죽음을 가장했던 살인마의 등장을 기대하기도 한다. 다양한 가능성은 호기심과 집중력을 끌어올리는데...

  "내가 이 상처들의 깊이며 상처들 간의 거리 따위를 재보지 않았을 것 같은가? 난 훤히 다 외우고 있다네. 다른 점, 깊이, 형태, 벌어진 정도 등 전부 다 알고 있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네. 퓔장스 판사는 보통 사람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지. 그자는 항상 똑같은 무기로 살인을 할 만큼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네. 그자는 막강한 사람이야. 그런데 좌우지간 세발작살을 가지고 살인을 하지. 그건 그자의 상징이야. 자신의 힘을 상징하는 일종의 왕 홀笏이라는 말일세."(p.77)

  부와 권력을 지니고 세상의 존경을 함께 받는 자가 왜 세발작살을 들고 끔찍한 일을 벌이는 것일까? 사건은 홀수 해에 일어나지만,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희생된다. 모두 세 번 찔린 것과 같은 치명적인 상처가 있고... 그런데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동생이 살인 누명을 썼다면, 이번에는 아담스베르그가 살인자로 몰리게 된다. 캐나다 경찰의 추적과 프랑스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살인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동화도 있습니까?" 트라벨만은 시동을 걸며 되물었다. "야만적인 [빨간모자], 어린아이를 죽이는 [백설공주], 식인귀가 등장하는 [엄지 왕자]......"

  ...

  "암요. 도처에 살인사건이 난무하죠. 파란 수염 같은 인물은 연쇄 살인마잖아요. 저는 [파란 수염]에서 열쇠에 묻은 핏자국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대목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문지르고 또 문질러서 겨우 없앴나 하면 어느새 다시 나타나죠. 죄의식으로 인한 오점 같다고나 할까요.(p.87)

  "때가 되면, 그자들을 볼 필요도 없을 테지. 목소리도 필요 없고, 혹시 이런 건 아닐까 저런 건 아닐까 의심할 필요도 없단 말이야. 범죄 현장에 가서 땀 한 방울만 채취해 오면 자기 집에 자빠져 있던 범인 놈을 족집게로 콕 집어내듯 잡아올 수 있겠지. 그런 다음엔 놈의 치수대로 만든 상자 안에 가두어버리면 그만이지."(p.199)

  "그렇지. 때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마음이 안 좋을 때 제일 자주 나뭇가지에 걸리곤 하지. 자넨 그 악마 때문에라도 나뭇가지들을 피해야 하네. 자넨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서 강을 건너선 안 되지. 내 말 알아듣겠나? 모든 걸 밖으로 던져버리고 언덕을 기어올라서라도 꽉 붙잡고 쓰러지지 말아야 하네."(p.237)

  "그다음엔 새로 들어온 가족들이 유령을 짜-증-나-게 만들죠. 왜 그런지 아세요? 이 사람들이 가구를 옮긴다. 벽장을 치운다. 낡은 살림은 버린다. 다락도 말끔하게 정리한다. 이러면서 유령의 영역을 마구 훼손하기 때문이죠. 요컨대 유령의 은신처를 모두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유령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고요."(p.244)

  "중요한 건 드러난 단서를 읽을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거예요."

  "짜증나게 만들고, 숨을 곳을 막아버리고, 원죄를 드러나게 하라."(p.245)

  "극단적인 상황인 건 확실해요. 강력계에서 서장님에 대해서 저마다 떠들어대는 것 때문에 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서장님은 고독한 산책가이고, 몽상에 잠겼다가 불현듯 먹이를 덮치는 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그런 소문들 말이에요. 그게 독특한 건 사실이지만 저는 거기서 또 다른 면을 보았다고 생각해요. 서장님은 내적인 확신에 따라 행동하신다는 거죠. 사고의 자율성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다른 사람들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드러나지 않는 고집 같은 거라고 해도 좋겠네요."(p.347-348)

  모친 살해. 범행에 쓰인 도구는 세발작살. 모르당의 말이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왔다. 원죄가 발생하는 거죠. 최초의 살인이 일어납니다. 유령이 등장하게끔 짜인 그런 범죄들이 분명 존재하니까요.(p.438)

  개성 있는 뚜렷한 성격으로 역할이 잘 분담된 등장인물과 함께 범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 과정을 밝히는 것은 오락적인 재미가 있다. 사건의 동기 또한 신화와 연결하여 그만의 의식을 치르는 과정임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이 다음 희생을 막고 범인을 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건조한(?) 하드보일드 서스펜스와는 다르게 은유와 상징으로 덧입은 관념적인 언어의 사용은 길을 멀리 돌아가는 기분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서 이것이 사건의 해결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특히 프랑스와 퀘벡 지역의 언어 사용의 차이, 이름의 어원을 밝히는 과정은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데, 앞뒤 구별 없이 처음으로 읽은 작품이라서 초반부는 살짝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을 순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주인공 아담스베르그의 일생을 지배한 거대한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였는데, 전작에서는 과거의 상처와 세발작살 살인마에 관한 어떤 언급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만든 연인 카미유와의 사연도 알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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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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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조영학 역, [월드 곤 바이 : 무너진 세상에서], 황금가지, 2016.

Dennis Lehane, [WORLD GONE BY], 2015.

  데니스 루헤인을 갱스터 스릴러로 만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출발이다. 그동안 들은 소문으로는, 영미 스릴러는 결국 데니스 루헤인만 남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기회를 엿보며 꾸준히 책을 사 모으기는 했어도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 스티븐 킹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월드 곤 바이 : 무너진 세상에서]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조 커글린이 등장하는데, '커글린 가문 3부작'의 세 번째이다. 아쉽게 전작을 읽지 않아서 초반에 살짝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등장하는 이름이 많아...;;), 곳곳에서 과거의 사건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시리즈의 첫 번째는 [운명의 날](황금가지, 2010.)이고, 두 번째는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황금가지, 2013.)이다.

  소문에 따르면 커글린 자신이 한때 유력한 깡패였지만 지금은 다행히 깨끗이 손을 씻은 터였다. 지금은 웨스트센트럴 플로리다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자선가이자, 병원, 무료 급식 시설, 도서관, 보호소 들의 친구였다. 혹여 항간의 소문대로 범죄세계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고 해도, 솔직히 지금 위치에 오르기까지 신세 진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에게 성의를 보인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재계 거물, 공장 주인, 건축업자 등,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동요를 잠재우거나 보급로를 뚫고 싶을 경우 누굴 찾아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조 커글린이야말로 공적으로 발표된 것을 사적으로 어떻게 이룰지를 아는, 이른바 도시의 가교였다. 따라서 그가 파티를 열면, 그 파티에 누가 등장하는지부터 챙겨 봐야 했다.(p.14)

  조지프 커글린은 아일랜드계로 쿠바와 플로리다 탬파를 기반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 1933년 스물다섯 명을 죽이는 결전으로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자리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형과 수많은 동료가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도 잃는다.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로부터 7년. 빠른 전개와 함께 주인공 캐릭터가 아주 돋보이는데... 영화 <대부>의 돈 코르네오네가 이탈리아 이민자를 대상으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듯이 그는 개인이나 조직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으로 역량을 발휘한다.

  10년 전, 두목 자리를 내려놓기는 했지만, 조 커글린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바르톨로 패밀리는 물론, 도시의 다른 패밀리들에게도 엄청난 자산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하세계의 남자들에게 가장 고귀한 이상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돈을 벌어주었기에 친구도 엄청나게 많았다.(p.33)

  그에 관해서 좀 더 언급하면, 오래전에 두목의 자리를 친구 디온 바르톨로에게 넘기고 이제는 합법적으로 사업가와 자선가로 활동한다. 특유의 사업수단으로 막대한 이익을 나누어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패밀리의 고문이자 플로리다 전체 조직폭력계의 대부로 여겨진다. 적은 이미 제거되었고, 대부분은 그를 통해 돈벌이하기에 친구가 더 많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사건 전개는 그가 왜 정부 관계자로부터 불여우라고 불리는지, 사람들은 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우러러보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디온이 정장 재킷 단추를 잠그며 부하들에게도 재킷 단추를 잠그라고 지시했다. 성당을 향해 성큼성큼 걸을 때조차 그 셋은 잔인한 권력의 표상이었다. 조는 그런 식의 권력을 알았다. 그도 과거 밤마다 경호원을 두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그때가 아쉽지는 않았다. 한순간도, 절대 권력의 비밀은 결코 절대적이 못 된다는 데 있었다. 절대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 누군가 빼앗기 위해 잔뜩 도사리기 때문이다. 왕자는 편히 잘 수 있어도 왕은 불가능하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경첩이 흔들리는 소리에 늘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p.62)

  오랜 전쟁으로 경기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합법이든 불법이든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이득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뜬 소문으로 여길 수 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한 방의 총알... 죽은 아내의 그리움과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난다. 도대체 누가? 하필이면 왜 나를? 심리적으로 불편하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 난 알아. 살면서 후회를 하는 이유는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행하지 않기 때문이야. 상자를 열지 않고 모험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10년 후, 애틀랜타의 어느 거실에 앉아 오늘을 회상하며, '그때 비행기에 탔어야 했어.'라고 후회하고 싶어? 그러지 마. 이곳엔 당신한테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저 밖엔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고."(p.350)

  "언젠가 너한테 엽서가 올 거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엽서. 빈 엽서가. 그런데 그 엽서의 주소는?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있었던 곳이다. 그럼 디온 삼촌이 어디선가 살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될 테지. 삼촌은 잘 지낼 거야."(p.392)

  "산파가 우리를 자궁에서 꺼내는 순간부터, 어딘가 우리 운명이 적혀 있을지도 몰라. '너는 불에 타 죽는다. 너는 배에서 떨어져 죽는다. 너는 외국에서 객사한다.' 등등."(p.405)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혼자다.(p.408)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생.

  그들이 사업이라고 부르는 돈벌이는 누군가에게 향락을 제공하거나, 곤경에 처해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를 돕고 보호하는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속이고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정해진 운명, 저주받은 인생이었을까? 절대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야 했고,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다. 늘 혼자라는 외로움...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로 다시 친구가 되어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결말... 절대 권력의 무가치함... 그냥 한 남자의 인생... 평범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진다. 암투와 음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배신과 복수... 한 마디로 미국식 누아르의 진수이다.

  아들 토머스를 주인공으로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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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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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튜 매서, 공보경 역, [사이버 스톰], 황금가지, 2016.

Matthew Mather, [CYBERSTORM], 2013.

  테러 방지를 목적으로 특정 기관이 개인의 사생활을 마음대로 들춰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로 안전해지는 것일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실제로 아무런 문제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더 큰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책을 펼치면서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한 마디로 대박이다. 그동안 SF와 재난이라는 소재는 많이 경험하지 못했지만, 영화의 단골 메뉴라서 아주 익숙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푹 빠져서 읽었다. 사이버 세상의 문제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 이상이고, 여기에 대응하는 인간은 생존마저 힘겹고 처절하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려면 물리적인 영토를 지배해야만 가능했어. 그런데 그 고리를 최초로 부순 게 뭔지 알아?"

  "사이버?"

  ...

  "아니. 우주 시스템이야. 1957년도에 스푸트니크 호가 우주로 발사된 이래로 우주 공간은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해왔어."

  "그게 사이버랑 무슨 상관이야?"

  "그 고리를 두 번째로 부순 게 바로 사이버거든. 사이버는 우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적 거점으로 떠오르고 있어. 역할은 똑같아. 정보를 수집하고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p.44-45)

  가상의 미래가 아닌 현재, 크리스마스를 앞둔 뉴욕 첼시의 어느 아파트, 세계 최고의 도시는 인터넷이 지배하고 있다. 은행 거래를 포함해서 건물의 냉난방은 물론이고... 편리함과 저렴함을 이유로 예전에는 사람의 손으로 작동하던 것을 이제는 컴퓨터가 정보통신으로 제어한다. 사회 시스템은 최첨단 기술의 집약 적용으로 완전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술함이 있다. 보안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여전히 위협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있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마음먹고 해코지를 해온다면, 이것을 당해낼 재간은 없어 보인다. 단순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대량 살상이 가능한 새로운 사이버 무기를 개발 중이고 아무도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뿐이야. 핵무기라고 하면 일단은 너부터도 겁을 내지. 히로시마나 비키니 섬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으니까. 그런데 사이버 무기라고 하면 파괴력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양국의 정부 기관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사회기반시설을 사이버 무기로 공격할 수 있는 거라고. 크리스마스트리에 지팡이 모양 사탕을 매달 듯이 가볍게 최후의 심판일을 도래시키는 거야."(p.46-47)

  마이클 미첼은 양육과 진로의 문제로 아내와 가벼운 다툼이 있었지만, 연휴를 맞이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는 소셜 미디어를 전문으로 하는 벤처 금융회사에서 일하는데, 다소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반면 옆집에 사는 찰스 멈포드는 가장 가까운 친구인데,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을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주의이다. 그래서 지하 창고에 비상 발전기와 생필품을 저장해 두고 있다. 12월 23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500대 기업의 경우, 취약점 목록은 언제든 수만 개를 상회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문자 그대로 수백만 개의 취약점들을 손보지만 해커는 구멍 하나만 있으면 파고들어 올 수 있으니 애초에 해커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기업이든 정부든 모든 조직은 미지의 취약점이나 제로데이에 대비해 이미 알려진 취약점의 목록을 계속 업데이트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공격 백터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방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p.66)

  제1일, 처음 시작은 조류 독감 주의 경보였다. 잠시 뒤에 인터넷이 마비되고, 기상청은 뉴욕에 폭풍우를 예고한다.

  제2일, 건물의 전기가 끊기고 난방을 멈춘다. 도시에 식량, 난방, 응급의료 서비스에 비상이 걸린다. 사건 사고 소식과 함께 미국은 중국과 군사적으로 대치 중이라 생화학 공격과 사이버 테러를 당했다는 소문이 돈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제3일, 자동차에서 휘발유를 빼내어 발전기 연료로 사용한다. 아파트에 남은 주민은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제4일, 약탈자에 의해 창고가 털린다. 피난민 몇 명을 받아들인다.

  제5일, 물이 나오지 않는다. 건물에 남은 사람과 물품 목록을 작성한다. 거리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하수처리장이 기능을 상실한다.

  제6일, 러시아와 중국의 협공이라는 소문이 돈다. 병원의 폐쇄로 환자 이송 자원봉사를 한다. 물과 음식의 부족으로 사람들은 식료품점을 약탈한다.

  제7일, 침입자를 잡는다.

  제8일, 도시는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인다. 교도소는 형 집행을 일시 정지하고 가벼운 형벌의 범죄자를 석방한다. 침입자를 경찰에 넘기지만,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제9일, 몇몇 건물에 화재가 일어나 도시가 불타오른다.

  제10일, 아파트 1층 로비를 임시 병원으로 하고 화상자를 돕는다. 도시는 배설물과 쓰레기 때문에 악취로 뒤덮인다.

  제11일, 이틀 치 식량만 남아, 식량을 나누고 개별 생존으로 전환한다. 침입자가 석방된다.

  ...

  제16일, 씻지 못해 몸에 이가 생긴다. 도시에 콜레라가 유행한다.

  제17일, 2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등유 난로의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다.

  제18일, 침입자가 다시 쳐들어온다.

  제19일, 군용 수송기로 비상 식료품을 투하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가지려고 싸움을 일으킨다.

  제20일, 대통령 특별담화, 맨해튼 섬은 격리된다.

  제21일, 이란의 야시야니 해킹 그룹이 자신의 소행이라는 발표를 한다.

  ...

  제23일, 눈을 녹여 물을 사용하지만, 배고픔으로 사람들은 쥐를 잡아먹는다.

  제25일, 탈진.

  제26일, 피난민들이 아파트로 들어오려고 해서 총을 쏴서 쫓아낸다.

  제27일, 인육을 먹는 사람이 생긴다.

  ...

  "꼭 그렇지도 않아. 여긴 지구상에서 인터넷이 제일 잘 연결된 나라야. 인터넷을 통해 모든 곳에 접속이 가능해. 반면에 중국에서는 발전소며 상수도 시설 대부분이 스위치, 레버 같은 수동 장비로 작동되지."

  "우린 기본적으로 자유로이 인터넷에 접속을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다른 나라들은 인터넷에 대한 접근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니까. 우리가 대규모 사이버 공격에 취약한 건 사실이야. 다른 나라들은 우리보단 위험에 훨씬 덜 노출이 돼 있어."(p.162)

  "우아한 퇴보라는 말로 내가 말하려고 했던 건, 현재 시대의 방법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 과거의 방법으로 돌아갈 길도 없다는 뜻이야."

  "예를 들면?"

  "이번에 선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물류 시스템이 한 예지. 예전에 큰 회사들은 한 도시 안에 십여 개의 지역 창고를 둬서 각각 저장과 분배를 할 수 있게 했어.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중앙 창고 몇 개만 두고 주문을 받자마자 바로바로 배송을 한단 말이야. 창고에는 거의 물건이 쌓이질 않아."

  "공급망이 망가졌을 때 지역 창고에 물품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문제다?"(p.214)

  "이런 짓을 벌이는 자를 반드시 추적해서 잡는다는 걸 알려줘야 돼요. 그러려면 우선 보안을 강화해야겠죠. 나라 안팎으로요. 겁이 나서 똥을 지리게 만들어줘야죠."

  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공포를 무기로 쓰자고? 공포에 기반을 둔 전쟁 억제는 냉전 시대의 유물이야. 우리가 겁이 나니까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들자, 그런 계획인 거야? 공포에 기반을 둔 사회는 권력이 한곳에 몰리게 되어 있어."(p.219)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자유도 없다!"

  로리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우린 테러리스트가 두려워서, 정부가 우리의 위치, 우리가 하는 일에 관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도록 허용하고 있죠. 사방에 카메라를 설치하게 내버려두고 있고요."(p.239)

  "개인의 이메일과 모든 기록, 하고 있는 일, 다니는 모든 장소를 다 들여다볼 권리를 정부에게 주는 새로운 법이 만들어진 거 아십니까?"

  "몰랐습니다."

  "정부가 돌격용 자동 소총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에 제한을 두겠다는 기미만 보여도 사람들은 자유를 빼앗겼다고 발광을 하죠. 그런데 이 법은 동의도 얻지 않고 개인이 하는 모든 활동을, 살짝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 주는 겁니다." 로리는 한층 더 목청을 높여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저는 개인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유는 시민적 자유를 의미하고, 시민적 자유의 토대는 사생활의 보호입니다. 사생활 보호가 되지 않는다는 건 시민적 자유를 못 누린다는 것이고, 이는 자유롭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정부가 전 국민의 지문을 채취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p.240)

  "정부가 그 정보를 어디에 쓰겠느냐가 바로 문제인 겁니다. 이 나라 곳곳에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용의자로 취급받는 게 좋습니까? 정부가 그쪽의 개인 정보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정말 믿어요? 지금까지 발생한 최대의 데이터 누출 사고는 정부가 보유한 개인 정보 누출 사고였습니다. 악당들은 항상 정부 데이터를 털죠. 사기업 정보를 훔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요. 사생활 보호가 되질 않죠."(p.241)

  "우리 조상들은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급습했는데, 후손인 우리는 두렵다는 이유로, 조상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자유를 포기하고 있는 겁니다. 로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를 차례로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척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린 어떤 개인적인 위험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우리의 삶을 침범하고 우리를 범죄 용의자로 취급할 권리를 갖도록 허용해 버리죠. 두려움 때문에 자유를 포기하는 겁니다."(p.242)

  "사회를 대상으로 게임 이론을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보면, 범죄자라는 요소를 포함시킬 때 사회가 더 강력해져."

  "시뮬레이션?"

  "범죄자는 사회를 향상시켜. 사회 기관과 네트워크를 강하게 만들어 약점을 없애주는 거지"(p.283)

  "이렇게 생각해 봐. 나한테는 불법적인 일이 너한테는 합법적인 일일 수도 있어. 우리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거나, 아니면 네 도덕적 기준이 네가 살고 있는 사회의 법과 다르다거나."

  "그게 어떤 식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데?"

  "사회가 진화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당시에 노예제도는 합법이었으니까 그가 노예를 부린다고 해서 그를 범죄자라고 부를 수는 없어. 하지만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범죄자지. 인도에서 소금법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던 간디도 당시에 범죄자 취급을 받았어. 두 사람 다 지금은 영웅이잖아. 범죄자는 사회의 경계선을 밀어내는데 도움이 돼."(p.284)

  "그렇기는 하지만, 이 문제는 결국 전에 우리가 논의했던 주장과 연결이 됩니다. 사생활 보호가 시민적 자유의 토대라는 주장 말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사이버 공간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고,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도 개인적 자유를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안정적인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사이버 공간에 늘 정보의 흔적이 남게 되죠."

  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완벽하게 안정적인 인터넷은 모퉁이마다, 집집마다 설치된 감시 카메라처럼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전부 녹화한다. 오히려 감시 카메라보다도 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 인터넷상에서의 상호 작용을 전부 완벽하게 기록하므로 누구든 그 정보를 확보한 자는 우리의 생각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가 있는 것이다.(p.370)

  현대화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받침대 역할을 하는 다리 몇 개를 쓰러뜨리면 전체 시스템이 멈추고 만다. 도시들은 복잡한 시스템에 의존해 늘 완벽하게 작동하지만, 이 시스템이 무너지면 도시 사람들은 급속도로 죽어간다.

  시스템 몇 개를 무너뜨린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발생해 당장 복구가 불가능해진다. 응급 구호 서비스에도 과부하가 가해지는데, 그로 인해 그 전 시대의 기술이나 시스템으로 내려앉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모두 정체되고 마비되어버린다.

  정치인과 군대는 핵무기라는 끔찍한 위험을 안고서, 기존의 적을 억제하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교전 규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이버 무기에 관해서는 전문 지식이 구축되어 있지 않고, 교전 규칙도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p.523)

  [사이버 스톰]은 눈보라와 함께 찾아온 사이버상의 문제가 현실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치 미국 드라마 한 시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일자별로 한 회가 끝나는 느낌이다. 나름의 반전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있고... 무엇보다 처음에는 이웃과 동료를 챙기고 자원봉사를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이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과 질병 그리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매년 찾아오는 겨울의 눈보라와는 다르게 전기와 인터넷으로 제어되는 세상에서 사이버 테러는 사회기반시설을 파괴하고 도시를 공황으로 몰아넣는다. 점차 사회 시스템은 망가지고 국가는 무기력하다. 등장하는 인물 간의 대화는 공포 정치의 무력감을,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 보호에 관해서, 사회 진화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테러 방지와 범죄자 색출을 위한 무분별한 개인 정보 이용과 사생활 보호 사이의 합의점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전 국민의 지문 등록이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또 다른 법령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지나치게 통제해야 한다는 모순 속에서 사이버 테러를 막기 위한 총체적인 점검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잘 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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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가노 료이치, 엄정윤 역, [창백한 잠], 황금가지, 2016.

Kano Ryoichi, [AOZAMETA NEMURI], 2012.

  [환상의 여자](황금가지, 2015)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나는 가노 료이치의 소설 [창백한 잠]이다. 하드보일드 풍의 일본 미스터리로 욕망을 좇는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추적하고 있다. 사건 발생부터 해결 이후까지 대략 9일 정도의 시간을 담고 있는데, 담백한 문체와 빠른 전개로 나름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이야기 중심의 글이 매우 흥미로울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성향에 맞지 않아서...;; 가벼운 작품인데도 시간을 들여서 읽어야 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의 일부분이 약간씩 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죽음에 가까워진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동이 틀 무렵의 사진을 고집하게 된 후부터 조금은 해답에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그린 세계를 제발 표현할 수 있게 해 달라, 그것을 이 한 장으로, 나의 손끝으로 잡아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아마도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일이 죽음을 끌어당기게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리라.(p.8-9)

  다쓰미 쇼이치는 사진작가이다. 전직 탐정이라는 흥미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조작이라는 누명으로 한동안 그 세계에서 퇴출당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호구지책으로 흥신소에서 잠시 일을 했는데, 아마도 증거 수집을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한듯싶다. 어쨌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억울함을 풀고 복귀할 수 있었지만, 한동안 후유증이 있었다. 그는 폐허가 된 곳을 찾아가 동이 틀 무렵의 빛을 필름에 담는 작업을 하는데, 시작은 새벽 미명에 문 닫은 다카하마 호텔을 촬영하다가 건물 안에서 한 여자의 죽임을 발견한다.

  "여긴 조그만 마을입니다. 신문사든 경찰이든 모두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셈이지요. 무언가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 조사하려면 아무래도 저희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다쓰미 씨라면 얽힌 관계도 없고 게다가 몇 년간 여러 사건의 조사를 전문적으로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p.71)

  지방의 작은 마을은 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져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인간관계로 구성원을 이루고 있다. 한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에게 개발이라는 바람은 환경 보존과 도시 발전이라는 서로 상충한 충돌을 일으키는데, 다카하마 역시 공항 건설을 두고 찬성하는 이와 반대하는 이로 나뉘어 있다. 죽은 여자는 지역 사회에서 유명한 저술가로 활동하며 자연 보호 운동을 펼치던 인물이다. 살인 사건은 5년 전의 화재를 계기로 호텔을 폐업하게 된 사연과 맞물려 여러 가지 의혹을 증폭시키는데, 연이어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음모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는 제가 일본인과 한국인 혼혈이라는 점을 스스로 그다지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마 좀 더 훨씬 근본적인 이유는 이종원이 저에게 계속 먼 존재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제가 열 살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서 저희를 남겨 두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그전에도 수없이 많은 여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여자들 사이를 전전하고 다니면서 집에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집에 있는 부친의 모습은 거의 기억이 안 납니다. 저에게는 항상 어딘가에 있다가 갑자기 훌쩍 돌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쓰미 씨, 어머니로부터 그가 집을 나갔다고 들었을 때 제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까? 조금도 쓸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긴커녕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기뻤습니다.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죠."(p.119)

  "안비루 씨, 저는 가정의 맛을 거의 모릅니다. 아버지는 제가 철들었을 무렵에는 안 계셨고, 어머니는 저에게는 정말로 마음 깊이 사랑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후지코와의 관계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

  "무엇이 무서웠던 거죠?"

  "그렇게 물어보시면 난감합니다만, 뭐든지 다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이윽고 아이가 생기겠죠. 그렇지만 그때 난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있을까. ......상상이 안 되더군요.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제가요."

  "본인도 아버지처럼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p.270)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계속 언급되는 재일 한국인 이종원은 파렴치한 인물로 죄의 원흉이다. 그로부터 시작한 돈과 이성을 향한 욕망은 마침내 살인이라는 범죄로 이어지고, 여기에 얽히고설킨 인물 사이의 관계는 또 다른 욕망으로 진화한다. 불행한 가정환경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가족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인공에 관한 심리는 사건을 풀어가면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지만, 결과는 안타까움만 남는다. 욕심으로 직업적 가치를 잃은 사람, 사라지는 안개처럼 꿈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 세월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사막의 신기루를 찾아 내달리는 사람,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사람... 현실에서는 모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모두 창백한 잠을 자는 것 같다.

  "흙의 공기를 빼는 거야. 힘과 끈기가 필요한 작업이지. 세 시간은 걸려. 그리고 제대로 공기를 뺄 수 있게 되기까지 3년이나 4년은 걸리지. 그렇지만 도자기를 하고 싶다면 이건 기본이야. 일단은 흙을 주무르고, 흙이 숨 쉬게 만들어야 해, 그런 점을 그 애는 바보 같다고 생각한 거겠지.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바로 이 마을을 떠났어. 내 슬하를 떠나서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하겠다고 한 거야. 그렇지만 나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었어."(p.345)

  왜곡되고 뒤틀린 소유욕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망친다. 주변 사람을 끌어들여 상처를 떠안기고 범죄라는 더는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진다. 힘과 끈기로 공기를 빼낸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듯이 인내와 절제로 부적절한 탐욕을 제거한 후에야 드디어 참된 인생이라는 교훈을 말하는 것 같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 있으나 가끔 뜬금없는 전개와 작위적인 진행으로 논리성에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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