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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에서 ㅣ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평점 :
데니스 루헤인, 조영학 역, [월드 곤 바이 : 무너진 세상에서], 황금가지, 2016.
Dennis Lehane, [WORLD GONE BY], 2015.
데니스 루헤인을 갱스터 스릴러로 만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출발이다. 그동안 들은 소문으로는, 영미 스릴러는 결국 데니스 루헤인만 남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기회를 엿보며 꾸준히 책을 사 모으기는 했어도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 스티븐 킹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월드 곤 바이 : 무너진 세상에서]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조 커글린이 등장하는데, '커글린 가문 3부작'의 세 번째이다. 아쉽게 전작을 읽지 않아서 초반에 살짝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등장하는 이름이 많아...;;), 곳곳에서 과거의 사건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시리즈의 첫 번째는 [운명의 날](황금가지, 2010.)이고, 두 번째는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황금가지, 2013.)이다.
소문에 따르면 커글린 자신이 한때 유력한 깡패였지만 지금은 다행히 깨끗이 손을 씻은 터였다. 지금은 웨스트센트럴 플로리다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자선가이자, 병원, 무료 급식 시설, 도서관, 보호소 들의 친구였다. 혹여 항간의 소문대로 범죄세계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고 해도, 솔직히 지금 위치에 오르기까지 신세 진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에게 성의를 보인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재계 거물, 공장 주인, 건축업자 등,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노동자들의 동요를 잠재우거나 보급로를 뚫고 싶을 경우 누굴 찾아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조 커글린이야말로 공적으로 발표된 것을 사적으로 어떻게 이룰지를 아는, 이른바 도시의 가교였다. 따라서 그가 파티를 열면, 그 파티에 누가 등장하는지부터 챙겨 봐야 했다.(p.14)
조지프 커글린은 아일랜드계로 쿠바와 플로리다 탬파를 기반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 1933년 스물다섯 명을 죽이는 결전으로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자리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형과 수많은 동료가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도 잃는다.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로부터 7년. 빠른 전개와 함께 주인공 캐릭터가 아주 돋보이는데... 영화 <대부>의 돈 코르네오네가 이탈리아 이민자를 대상으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듯이 그는 개인이나 조직의 문제를 조율하는 것으로 역량을 발휘한다.
10년 전, 두목 자리를 내려놓기는 했지만, 조 커글린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 바르톨로 패밀리는 물론, 도시의 다른 패밀리들에게도 엄청난 자산으로 성장했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하세계의 남자들에게 가장 고귀한 이상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돈을 벌어주었기에 친구도 엄청나게 많았다.(p.33)
그에 관해서 좀 더 언급하면, 오래전에 두목의 자리를 친구 디온 바르톨로에게 넘기고 이제는 합법적으로 사업가와 자선가로 활동한다. 특유의 사업수단으로 막대한 이익을 나누어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패밀리의 고문이자 플로리다 전체 조직폭력계의 대부로 여겨진다. 적은 이미 제거되었고, 대부분은 그를 통해 돈벌이하기에 친구가 더 많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사건 전개는 그가 왜 정부 관계자로부터 불여우라고 불리는지, 사람들은 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우러러보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디온이 정장 재킷 단추를 잠그며 부하들에게도 재킷 단추를 잠그라고 지시했다. 성당을 향해 성큼성큼 걸을 때조차 그 셋은 잔인한 권력의 표상이었다. 조는 그런 식의 권력을 알았다. 그도 과거 밤마다 경호원을 두고 지냈지만 그렇다고 그때가 아쉽지는 않았다. 한순간도, 절대 권력의 비밀은 결코 절대적이 못 된다는 데 있었다. 절대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 누군가 빼앗기 위해 잔뜩 도사리기 때문이다. 왕자는 편히 잘 수 있어도 왕은 불가능하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경첩이 흔들리는 소리에 늘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p.62)
오랜 전쟁으로 경기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합법이든 불법이든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이득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뜬 소문으로 여길 수 있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한 방의 총알... 죽은 아내의 그리움과 과거의 상처가 되살아난다. 도대체 누가? 하필이면 왜 나를? 심리적으로 불편하다.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 난 알아. 살면서 후회를 하는 이유는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행하지 않기 때문이야. 상자를 열지 않고 모험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지금부터 10년 후, 애틀랜타의 어느 거실에 앉아 오늘을 회상하며, '그때 비행기에 탔어야 했어.'라고 후회하고 싶어? 그러지 마. 이곳엔 당신한테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저 밖엔 온 세상이 기다리고 있고."(p.350)
"언젠가 너한테 엽서가 올 거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엽서. 빈 엽서가. 그런데 그 엽서의 주소는?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 있었던 곳이다. 그럼 디온 삼촌이 어디선가 살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될 테지. 삼촌은 잘 지낼 거야."(p.392)
"산파가 우리를 자궁에서 꺼내는 순간부터, 어딘가 우리 운명이 적혀 있을지도 몰라. '너는 불에 타 죽는다. 너는 배에서 떨어져 죽는다. 너는 외국에서 객사한다.' 등등."(p.405)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혼자다.(p.408)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생.
그들이 사업이라고 부르는 돈벌이는 누군가에게 향락을 제공하거나, 곤경에 처해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를 돕고 보호하는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속이고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정해진 운명, 저주받은 인생이었을까? 절대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야 했고,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잃을 뻔했다. 늘 혼자라는 외로움...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로 다시 친구가 되어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화려하지만, 비극적인 결말... 절대 권력의 무가치함... 그냥 한 남자의 인생... 평범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진다. 암투와 음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배신과 복수... 한 마디로 미국식 누아르의 진수이다.
아들 토머스를 주인공으로 다음 이야기가 펼쳐질까?